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이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소개한 '엘로(Elo) 레이팅'이라는 평점 시스템이 있습니다.


이 평점 시스템을 가지고 2015년 프로야구를 정리했던 글을 인용하면 엘로 레이팅은 이런 개념입니다.


헝가리 출신인 엘뢰(Élő) 아르파드 전 미국 마케트대 물리학과 교수(1903~1992·사진)가 만들어 엘로 레이팅입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LOL·League of Legends)'나 '월드 오브 탱크(WoT·World of Tanks)' 같은 컴퓨터 게임을 해보셨다면 이미 이 레이팅 시스템을 경험해 보신 겁니다. 게임 안에서 사용자 실력을 측정할 때 쓰는 도구가 바로 엘로 레이팅이거든요.


그래도 이 시스템을 제일 많이 쓰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체스. 원래 이 시스템 자체가 체스 선수 랭킹을 정하려고 세상에 나온 겁니다. 미국체스연맹에서 일하던 케니스 하크니스(1896~1972)가 1950년 만든 공식을 1960년에 엘뢰 교수가 손본 것. 이 시스템은 1980년부터 국제체스연맹(FIDE)에서 공식 랭킹 산정 시스템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엘로 레이팅 작동 원리는 간단합니다. 먼저 기본적으로 1500점을 갖고 시작합니다. 그 다음 자기보다 점수(레이팅)가 높은 사람에게 이기면 점수를 많이 얻고, 지면 조금 잃습니다. 거꾸로 레이팅이 낮은 사람에게 이기면 조금 얻고, 지면 많이 잃죠. 레이팅 차이가 클수록 점수 변화가 큽니다.


예를 들어 한국 여자 축구 대표팀(랭킹 18위·1833점)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친선 경기에서 미국(1위·2180점)을 3-0으로 꺾었다면 레이팅은 1864점으로 31점 오릅니다. 반면 같은 점수차로 져도 1829점으로 4점밖에 깎이지 않습니다. 반면 서울에서 가나(50위·1475점)를 1-0으로 꺾으면 2점이 오르는 데 그치지만 지면 33점이 떨어집니다. 여자 축구팀을 예로 든 건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여자 랭킹만 엘로 레이팅을 토대로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아, 세월이 흘러 FIFA는 이제 남자 랭킹을 계산할 때도 엘로 레이팅을 토대로 삼습니다. 지난해 러시아 월드컵 이후 랭킹 계산법을 바꾸면서 이 평점 시스템을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위에 링크한 2015년 프로야구 정리 포스트를 읽어 보신 분이라면 시간에 따라 엘로 레이팅이 어떻게 변했는지 연결하면 재미있는 그림이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하셨을 겁니다.


당연히 야구만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프로배구에도 엘로 레이팅을 적용할 수 있다는 걸 이렇게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올 시즌도 되겠죠?


대한항공이 1위로 끝마친 프로배구 2018~2019 도드람 V리그 남자부 각 팀 정규리그 경기별 엘로 레이팅을 정리하면 아래 GIF처럼 그릴 수 있습니다.



한 번 7개 팀을 따로 따로 떼어서 150일에 걸친 이번 시즌 정규리그를 어떻게 보냈는지 점검해 보시죠. (승점에 따른) 팀 순위 순서입니다.



대한항공: 네 끝은 창대하리라


시즌 개막전에서 현대캐피탈에 0-3으로 완패하면서 기분 나쁘게 시즌을 시작한 대한항공. 그래도 이를 극복하고 2라운드까지 고공 비행을 이어갔지만 3라운드 중반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제일 큰 위기는 1월 25일이었습니다. 대한항공은 이날 의정부 방문 경기에서 KB손해보험에 2-3으로 역전패하면서 이번 시즌 제일 낮은 엘로 레이팅 1442를 기록하게 됩니다. 다음 경기(1월 29일) 때 OK저축은행을 3-1로 잡으면서 숨을 돌렸지만, 2월 3일 현대캐피탈에 2-3으로 패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엘로 레이팅 1451).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2월 6일 서울 방문 경기에서 당시 레이팅 1633으로 현대캐피탈(1654)에 이어 엘로 레이팅 2위였던 우리카드에 3-0 완승을 기록한 것. 그 뒤로 대한항공은 8연승 고공 비행을 계속했고 엘로 레이팅은 1641까지 올랐습니다.


11일 열린 최종전에서 OK저축은행에 2-3으로 패하면서 최종 엘로 레이팅 1572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이는 이미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했기 때문에 생긴 일. 만약 이 경기에서 대한항공이 3-2로만 이겼어도 시즌 최종 레이팅은 1647까지 올랐습니다.



현대캐피탈: DTD란 무엇인가?


이번 시즌을 통틀어 한 팀이 한 경기에 제일 엘로 레이팅을 크게 잃은 경우는 2월 7일 수원체육관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선두 현대캐피탈은 이날 1시간 24분 만에 최하위 한국전력에 0-3 셧아웃 패배를 당했습니다.


이날 경기 전까지 현대캐피탈은 엘로 레이팅 1654로 1위, 한국전력은 1189로 최하위였습니다. 이 평점 시스템은 이날 한국전력이 승리할 확률이 5.7%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번 시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예상 승률이 낮았던 게 이 경기 한국전력이었습니다.


충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현대캐피탈은 사흘 뒤 안방 경기에서 KB손해보험에 1-3으로 패했고 엘로 레이팅 점수는 1508점까지 내려갔습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듯 현대캐피탈은 5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OK저축은행을 3-0으로 꺾고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6라운드 첫 경기에서 대한항공에 0-3 완패를 당하면서 사실상 정규리그 우승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카드: 추락하는 것에는 '노아'가 없다.


2008년 창단 후 첫 번째 '봄 배구' 진출에 성공한 우리카드.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최대어로 꼽히는 아가메즈(34·콜롬비아)를 잡는 데 성공했지만, 시즌 개막과 함께 4연패를 당하면서 '역시나 올해도…'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던 것도 사실. 1라운드 순위표에서 우리카드보다 밑에 있는 건 한국전력 한 팀뿐이었습니다.


하지만 2라운드 초반이던 지난해 11월 10일 세터 노재욱(27)을 한국전력에서 트레이드해 오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결국 우리카드는 2라운드 때 대한항공(15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승점 13점을 더하면서 상승 발판을 마련했고 3라운드, 4라운드를 거치는 동안 계속 상승세를 이어간 끝에 제일 높은 엘로 레이팅(1594)으로 5라운드를 마쳤습니다. 


그렇게 우리카드가 '창단 첫 봄 배구' 이상을 꿈꾸던 순간 6라운드 첫 경기에서 아가메즈가 2세트 도중 서브를 넣은 뒤 코트에 쓰러졌고, 결국 왼쪽 내복사근이 2㎝ 정도 찢어졌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가메즈가 빠지자 우리카드는 다시 연패 모드로 돌아갔고 결국 시즌 최종전에서 현대캐피탈이 주전 선수에게 휴식을 준 덕에 3-2로 승리하며 라운드 전패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허리 디스크에 문제가 있는 노재욱마저 통증을 호소해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빠졌다는 점. 신영철 우리카드 감독은 "아가메즈는 부상 부위도 어느 정도 회복됐고 본인도 플레이오프 경기를 뛰겠다는 열정이 가득하다"면서 "하지만 노재욱은 플레이오프에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삼성화재: "부늬기부터 바꿔야 돼, 부늬기, 부늬기!"


3라운드가 끝났을 때 삼성화재는 5위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승점 28점으로 3위 OK저축은행(31점)과는 불과 3점 차이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V리그 남자부에서는 3, 4위가 승점 3점 이내일 때 준플레이오프를 연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봄 배구 희망을 접기에는 아직 일렀던 상황. 게다가 '명가' 삼성화재 아닙니까.


4라운드 때도 삼성화재는 우리카드(14점) 현대캐피탈(13점)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승점 10점을 기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문제는 '결정적인 경기'에서 모두 패했다는 것. 삼성화재는 4라운드 맞대결에서 우리카드에는 1-3, OK저축은행에는 0-3으로 패했습니다. 그 결과 4라운드 첫 경기였던 V 클래식 매치에서 현대캐피탈을 3-1로 꺾으면서 1598까지 올랐던 엘로 레이팅은 4라운드 종료 때 1470까지 내려왔습니다.


이후에도 분위기 반전 카드 같은 건 없었습니다. 삼성화재는 5라운드 때 2월 4일 한국전력에 3-0 승리를 기록한 걸 빼면 나머지 다섯 경기에서는 1승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6라운드 때도 좀처럼 분위기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시즌 마지막 세 경기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4위 자리는 굳혔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


강팀에는 약하고, 약팀에만 강한 게 결국 올 시즌 삼성화재 발목을 잡았습니다. 삼성화재는 이번 시즌 최종 순위 5~7위에 자리한 OK저축은행 KB손해보험 한국전력을 상대로는 13승 5패를 기록하면서 승점 36점을 기록했지만 대한항공 현대캐피탈 우리카드를 상대로는 6승 12패, 승점 19점이 전부였습니다. 



OK저축은행: 신종 몰방(沒放)


1라운드가 끝났을 때 OK저축은행은 당시 1위 현대캐피탈과 나란히 승점 14점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현대캐피탈보다 두 세트를 더 내줬기 때문에 세트 득실률에서 뒤져 2위였습니다.


OK저축은행이 이렇게 잘 나갈 수 있던 건 외국인 선수 요스바니(28·쿠바)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요스바니는 공격 성공률(60.9%)에서는 1위, 득점(166점)과 서브(세트당 0.65개)에서는 2위에 이름을 올리면서 1라운드 최우수선수(MVP)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2라운드부터 곧바로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물론 '요스바니가 계속 서브를 받는 건 옳은 일일까' 포스트에 쓴 것처럼 요스바니 본인이 아니라 OK저축은행에서 요스바니에게 부담을 주는 방식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요스바니는 공격 점유율 39.8%, 서브 리시브 점유율 34.3%를 책임지고 있었었는데 두 기록 합계(74.1%)가 이렇게 높은 선수는 프로배구 역사상 요스바니가 처음이었습니다.


이러면 '용가리 통뼈'라고 해도 버티기가 힘든 노릇. 시즌 개막 전부터 좋지 않았던 무릎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고 어깨 부상까지 찾아오고 말했습니다. 이 때문에 요스바니는 두 번 다시 라운드 MVP 모드를 보여주지 못했고, 팀 성적도 내리막길을 걷고 말았습니다.  



KB손해보험: 2% 늦게 도착한 긴급 출동


만약 올 시즌 V리그가 4~6라운드(후반기) 순위만으로 포스트시즌 진출팀을 결정했다면 KB손해보험은 최소 준플레이오프는 경험할 수 있었을 겁니다. 후반기 때 KB손해보험은 12승 6패를 기록하면서 승점 30점을 더했습니다. 이보다 승점을 많이 가져간 팀은 대한항공(36점)과 우리카드 현대캐피탈(이상 30점)뿐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1~6라운드 성적을 모두 더하기 때문에 KB손해보험은 그저 '고춧가루 부대'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5라운드가 끝나고 계속 외국인 선수 펠리페(31·브라질)에게 공격을 몰아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썼지만 KB손해보험이 새 얼굴 발굴에 실패한 건 아닙니다. 제일 눈에 띄는 선수는 레프트 김정호(22). 시즌 초반 이강원(29)을 삼성화재에 내주고 받아 온 김정호는 5라운드 이후 경기당 평균 11.2점(공격 성공률 54.6%)를 올리면서 새 팀에 녹아든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1월 17일 제대한 정동근(24)도 상대 서브 22.1%를 받는 동안 리시브 성공률 43.1%를 기록하면서 KB손해보험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정동근도 원래 삼성화재 선수였는데 서류상으로만 한국전력을 거친 뒤 KB손해보험 유니폼을 입고 코트에 복귀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팀 성적은 지난 시즌 4위에서 6위로 내려 앉았지만 다음 시즌에도 권순찬 감독이 계속 KB손해보험 지휘봉을 잡고 있을 확률이 높은 상황입니다. 권 감독은 팀 수석코치를 지내다 2017년 4월 사령탑에 앉았으며 이번 시즌을 마치면 계약 기간이 끝납니다. '계륵' 김요한(33)을 OK저축은행으로 트레이드한 것 역시 리빌딩 관점에서 권 감독 공이라면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전력: 총체적 난국


전광인(28)이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현대캐피탈로 떠날 때부터 불안했습니다. 세터가 넘치는 팀에서 보상선수로 노재욱을 지명하면서 불안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시즌 개막 전 외국인 선수 사이먼(27·독일)과 (나중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김인혁(24)이 팀을 떠나면서 위기는 점점 현실과 가까워졌습니다. 대체 외국인 선수 아텀(26·러시아)도 별 활약 없이 한국을 떠났습니다.


뚜껑을 열자 '패패패패패패패패패패패패패패패패' 행진이 이어졌습니다. 가장 괴로웠던 건 역시 주장 '덕큐리' 서재덕(30). 그는 '패패패패패패패패패패패패패패패' 당시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솔직히 힘들어요. 며칠 전 꿈엔 (전)광인이가 나타나 '형 같이 뛰어요'라고 하더라니까요"하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한국전력은 이 인터뷰 후 바로 다음 경기 그러니까 개막 후 17번째 경기에서 KB손해보험을 3-2로 꺾고 시즌 첫 승을 기록했습니다. 참고로 V리그 남자부는 팀당 36경기를 치릅니다. 거의 시즌 절반을 지난 다음에야 첫 승을 기록한 겁니다. 이후에도 한국전력은 시즌이 끝날 때까지 3승을 추가하는 데 그쳤습니다.


안타까운 건 다음 시즌이라고 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 팀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서재덕은 군 입대로 자리를 비우고, 김철수 감독도 '리시브 타령' 명창 자리를 내놓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와중에 연고지를 광주로 옮길 수도 있는 상황. 과연 내년에는 한국전력이 '정상적인 팀'으로 리그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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