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프로배구 남자부 현대캐피탈이 역대 최장인 18연승으로 2015~2016 NH농협 V리그 정규리그를 마감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삼성화재가 2005~2006, 2006~2007 시즌에 걸쳐 17연승을 기록한 게 남녀부를 통틀어 최다 연승 기록이었습니다. 기록은 기록이지만 '전력'이라는 측면에서는 한 시즌에 연승이 이어져야 좋을 터. 그러면 올 시즌 현대캐피탈은 정말 프로배구 역사상 가장 강한 팀일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자면 '네, 그렇습니다.' 


일단 '강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절대 전력만 놓고 보면 올 시즌 현대캐피탈보다 2005~2006 시즌 삼성화재가 더 강했습니다. 현대캐피탈은 '엘로(Elo) 레이팅' 1780으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10년 전 삼성화재는 1818로 이보다 38 높았습니다. 프로배구 남자부 역사상 이 레이팅 1800점을 넘긴 채 정규리그를 마감한 건 이때 삼성화재가 유일합니다. 아래 표를 보시면 같은 시즌 현대캐피탈이 성적은 더 좋은데 레이팅은 더 낮습니다. 한번 천천히 이유가 뭔지 알아보시죠.


▌역대 프로배구 남자부 엘로 레이팅 상위 5개 팀
 순위  시즌  구단  승점  승점 비율  엘로 레이팅
 1  2005~2006  삼성화재  86  81.9%  1818
 2  2015~2016  현대캐피탈  81  75.0%  1780
 3  2005~2006  현대캐피탈  93  88.6%  1739
 4  2011~2012  대한항공  80  74.1%  1713
 5  2005  삼성화재  53  88.3%  1710

※승점은 당시 경기 결과를 토대로 현재 기준에 따라 계산한 것, 승점 비율은 전체 승점(경기수×3) 중 따낸 비율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이름을 딴 이 랭킹 시스템은 1500점에서 시작해 이기면 점수를 더하고 지면 빼는 방식으로 순위를 정합니다. 강한 팀을 꺾으면 점수가 많이 오르고, 약한 팀에 패하면 많이 깎이는 방식입니다. 이 레이팅은 또 과거 성적이 아니라 현재 맞대결에서 어떤 팀이 강한지 알려주는 게 특징입니다. 이 블로그에 엘로 레이팅을 처음 소개했을 때 썼던 케이스를 다시 소개해 드리면:


예를 들어 한국 여자 축구 대표팀(랭킹 18위·1833점)이 미국(1위·2180점)을 3-0으로 꺾었다면 레이팅은 1864점으로 31점 오릅니다. 반면 같은 점수차로 져도 1829점으로 4점밖에 깎이지 않습니다. 반면 가나(50위·1475점)를 1-0으로 꺾으면 2점이 오르는 데 그치지만 지면 33점이 떨어집니다. 여자 축구팀을 예로 든건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여자 랭킹만 엘로 레이팅을 토대로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문장 뒤에 덧붙이자면 "그래서 여자 랭킹이 남자 랭킹보다 더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하고 쓸 수 있습니다. 프로배구에도 제법 잘 맞아 떨어집니다. 제가 1월 25일에 쓴 기사도 한번 보시죠.


현대캐피탈은 승점으로 따지는 팀 순위는 계속 3위였지만 (1월) 9일 삼성화재에 3-0 승리를 거둔 뒤 줄곧 파워랭킹 1위를 지키고 있다. 그 사이 레이팅은 1570점에서 100점 이상 오르며 상승세를 탄 팀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3위 대한항공에 승점 8점 차로 뒤진 4위 삼성화재가 아직 포기하기 이른 이유도 이 지표를 보면 드러난다. 삼성화재는 이날 대한항공이 패하면서 파워랭킹 2위로 올라섰다. 아직 치고 올라갈 전력이 된다는 의미다. 게다가 삼성화재(25경기)는 대한항공보다 한 경기를 적게 치른 상태다. 다음 경기에서 삼성화재가 이기면 승점 차는 5점으로 줄어들게 된다.


얼추 맞추지 않았나요? 물론 숫자는 숫자인 만큼 아주 딱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레이팅을 토대로 올 시즌 여자부에서는 GS칼텍스가 '봄 배구' 마지막 티켓을 거머쥘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흥국생명이 그대로 3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올 시즌 제일 중요한 경기에서 GS칼텍스가 흥국생명에 패하고 말았거든요.


재미있는 건 올 시즌 여자부 최종 엘로 레이팅에서 GS칼텍스가 1582점으로 흥국생명(1587점)에 이어 2위라는 겁니다. 사실 6일 경기 전까지는 IBK기업은행이 1616점으로 1위였는데 이날 GS칼텍스에 패하면서 3위(1574점)로 내려 앉았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계속 맞대결에서 이겨야 랭킹을 유지하는 체스하고 달리 프로 스포츠에서는 우승을 확정하고 나면 힘을 아끼느라 레이팅에서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2005~2006 시즌에 삼성화재가 현대캐피탈보다 강했던 이유를 알아보시죠. 첫 단락에 쓴 것처럼 당시 삼성화재는 한창 연승 중인 팀이었습니다. 이 시즌 삼성화재는 2006년 1월 30일에 현대캐피탈에 2-3으로 패한 뒤 단 한번도 패하지 않고 시즌을 마쳤습니다. 그 사이 1662점에서 시작한 레이팅이 156점 올랐습니다. 왜냐? 13연승을 거두는 동안에 최강팀 현대캐피탈을 두 번 연달아 꺾었거든요.


당시 프로배구 남자부는 '2강'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1위 현대캐피탈은 세트 득실률 3.96을 기록했습니다. 3-1로 이기면 세트 득실률이 3이니까 3-0 경기가 그만큼 많았던 겁니다. 실제로 31승 중 19승(61.3%)이 3-0 완승이었습니다. 삼성화재도 세트 득실률 3.13이었습니다. 나머지 4개 구단은 모두 1이 되지 않았고 심지어 한국전력은 0.297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즌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 모두 레이팅이 높은 건 두 팀이 나머지 팀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했다는 증거입니다. 대신 두 팀 사이는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포스트시즌까지 모두 끝났을 때는 현대캐피탈이 레이팅 1814점으로 결국 1위 자리를 탈환했습니다. 거꾸로 삼성화재는 1705점으로 내려왔습니다. 


▌2005~2006 V리그 후반 현대캐피탈 vs 삼성화재 엘로 레이팅 추이


프로배구 남자부는 퍽 오래 두 팀이 2강 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에 때문에 접근법을 조금 비틀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실제로 경기를 벌일 때는 2005~2006 삼성화재랑 올 시즌 현대캐피탈이 맞붙는 게 아닙니다. 올해 팀끼리 대결을 벌이는 거죠. 그러면 그 시즌 랭킹 1위하고 2위 팀 사이에 레이팅이 얼마나 차이나는지 알아 보면 '압도적인 팀'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래가 바로 그걸 정리한 표입니다.


▌1, 2위간 엘로 레이팅 차이
 순위  시즌  1위 구단  엘로 레이팅  2위 구단  엘로 레이팅  차이
 1  2015~2016  현대캐피탈  1780  삼성화재  1504  276
 2  2011~2012  대한항공  1713  현대캐피탈  1561  152
 2014~2015  삼성화재  1682  한국전력  1530
 4  2013~2014  삼성화재  1609  현대캐피탈  1526  83
 5  2005~2006  삼성화재  1818  현대캐피탈  1739  79

※올 시즌은 6일 현재


엘로 레이팅이 280점 차이가 나면 점수가 높은 팀이 낮은 팀을 상대로 승률 83.4%를 기록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올 시즌 현대캐피탈은 이 랭킹 2위 삼성화재하고 붙어도 이 정도 승률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문자 그대로 압도적이죠. 현대캐피탈은 올 시즌 6라운드에서 프로배구 역사상 처음으로 한 라운드 전 경기에서 3-0 승리를 거두는 기록도 새로 썼습니다.


분명 정규리그 성적만 보면 이 전력 평준화 시대에 현대캐피탈은 놀랄 만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당연히 현대캐피탈로서는 여느 시즌보다 우승이라는 수확물을 얻어내고 싶을 겁니다. 이 지표대로라면 올해 '봄 배구'는 싱겁게 끝날 터. 과연 현대캐피탈이 챔피언결정전까지 이렇게 압도적인 전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혹시 궁금하신 분이 계실까 봐: 역대 레이팅 4위에 이름을 올린 2011~2012 대한항공도 후반기 18경기에서 딱 2패만 당할 정도로 시즌이 흐를수록 강한 면모를 자랑했던 팀입니다. 당시 순위는 2위였지만 전력만 놓고 보면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던 직전 시즌보다 더 좋았습니다. 이때 대한항공 지휘봉을 잡고 있던 신영철 감독은 내심 우승을 노렸겠지만 삼성화재(라고 쓰고 가빈이라고 읽는다)의 벽은 이때도 참 높고 두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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