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2010년 시애틀에서 은퇴한 전직 메이저리그 에릭 번즈(43·사진)는 2015년 7월 28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 라파엘에 있는 앨버트 파크에서 재미있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앨버트 파크는 독립리그 퍼시픽 어소시에이션 소속 산 라파엘 퍼시픽스가 안방으로 쓰는 구장. 이날 이 구장에서는 퍼시픽스와 발레이오 애드미럴스가 경기를 치렀습니다. (독립리그란?)


번즈는 투수가 공을 던질 때마다 투구 추적 시스템 'PFX(Pitch F/X)'가 측정한 결과에 따라 스트라이크 또는 볼을 선언했습니다. 요컨대 번즈가 '로봇 심판'의 목소리가 됐던 것. 이 경기가 로봇 심판 프로야구 데뷔 무대였습니다.



올해는 북미 대륙 반대편, 그러니까 대서양(Atlantic Ocean) 연안에서 로봇 심판이 맹활약할 예정입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역시 독립리그인 애틀랜틱 리그에 의뢰해 3년간 로봇 심판을 포함해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애틀랜틱 리그에는 8개 팀이 참여하고 있으며 슈거 랜드 스키터즈를 제외한 7개 팀이 미국 북동부에 연고지를 두고 있습니다. 지난해 이 리그 출신 32명이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8일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한 제휴 내용을 보면 애틀랜틱 리그 구심은 올 시즌부터 '트랙맨' 도움을 받아 스트라이크를 판정하게 됩니다. 트랙맨은 2017년부터 PFX를 대체한 시스템으로 군사용 레이더 기술을 활용해 투·타구를 추적합니다. '도움을 받는다'는 건 이어폰으로 판정을 전해듣게 된다는 뜻입니다.


심판에게 편향이 없다는 것


로봇 심판을 도입하는 건 그저 스트라이크·볼 판정에서 오심이 (사실상) 사라지는 것 이상으로 야구를 뒤흔들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부작위 편향(不作爲 偏向·omission bias)'이 있지만 로봇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부작위 편향은 한 마디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에서는 접전 상황에 심판이 휘슬을 잘 불지 않는 게 대표적 부작위 편향 사례로 손꼽힙니다. 심판 본인이 경기 결과에 끼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에 반칙 선언을 줄인다는 겁니다.


야구에서 부작위 편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볼카운트별 스트라이크 존 차이입니다. 2015년 '베이스볼 비키니'에 쓴 것처럼 볼카운트 3볼-0스트라이크 때 스트라이크 존은 0볼-2스트라이크 때보다 50% 정도 넓습니다(그래픽 참조).


만약 볼카운트 3-0에서 구심이 볼을 선언하면 타자는 볼넷을 얻어 1루로 걸어나가게 되고(타자에게 유리), 0-2에서 스트라이크를 선언하면 삼진으로 타자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가게 됩니다(투수에게 유리).


반면 3-0에서 스트라이크가 나오거나 0-2에서 볼이 나오면 그냥 계속 승부를 이어가면 됩니다. 그래서 심판 본인도 모르게 '내 책임을 줄이고 싶다'는 심리가 작동해 스트라이크 존을 다르게 적용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관습적 오심'은 타격 결과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2016~2018 프로야구에서 볼카운트 3-0 이후 타자는 OPS(출루율+장타력) 1.290을 기록했습니다. 3-1 이후가 되면 이 기록은 1.135로 내려갑니다. 스트라이크 하나가 타자 생산성을 약 12.1% 깎아 먹은 셈입니다. 거꾸로 볼카운트 0-2 이후 .509였던 OPS는 1-2 이후에는 .565로 11% 올랐습니다.


지금까지는 투수나 타자 모두 볼카운트에 따라 스트라이크 존이 이렇게 변한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경기에 참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봇 심판에게는 이런 편향이 없을 테니 볼카운트 승부 양상도 변할 수 있고, 이에 따라 타격 결과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거리가 달라진다는 것


타격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시도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애틀랜틱 리그는 올 하반기에 투수판과 홈플레이트 사이 거리를 24인치(60.96㎝) 늘리기로 했습니다. 원래 60피트 6인치(18.44m)였던 거리를 62피트 6인치(19.05m)로 늘리는 것. 똑같은 속도로 던진다고 해도 멀리서 던지면 공이 더 느리게 날아올 거고 그러면 타자에게 유리한 결과가 늘어날 수 있습니다.


단, 마운드 높이(10인치·25.4㎝)나 기울기(1피트·30.5㎝당 1인치)에는 변화를 주지 않기로 했습니다. 마운드를 그대로 들어서 뒤로 옮기는 셈입니다. 후반기에 변화를 주기로 한 건 전반기 데이터와 비교할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잠깐 상식.txt 


투수판-홈플레이트 사이 거리를 딱 60피트가 아니라 60피트 6인치를 덧붙인 이유를 두고 "당시 야구장 설계도에 표시된 '60피트 0인치'를 시공자가 잘못 읽어 60.6피트로 했다는 설이 정설처럼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하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드파운드법에서는 '10인치=1피트'가 아니라 '12인치=1피트'입니다. 그러니까 60피트 6인치는 60.6피트가 아니라 60.5피트입니다. 엉뚱한 숫자를 가져다 붙인 게 아니라 그냥 반(半)피트를 더한 겁니다.


미터법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18m는 너무 가깝고 19m는 너무 먼 것 같으니 18.5m로 하자고 한 것 셈. 이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요?


또 정사각형 모양인 1~3루 한 변 길이도 15인치(38.1㎝)에서 18인치(45.72㎝)로 3인치(7.62㎝) 늘어납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베이스에 밟을 곳이 늘어나 선수 안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베이스가 커진다는 건 베이스 사이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찰나에 아웃과 세이프가 갈린다는 뜻에서 '야구는 인치의 게임'이라는 표현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타석~1루 거리가 3인치 줄어드는 건 적지 않은 변화를 불러일으킬 확률이 높습니다.


▌잠깐 상식.txt 또


만약 포스아웃 상태에서 공과 사람이 동시에 들어왔다면 - 예를 들어 1루에서 접전이 벌어졌을 때 - 심판은 어떤 판정을 내려야 할까요? 정답은 '세임 타임 세이프'입니다.


게다가 1, 2루 (물론 2, 3루도) 사이 거리가 가까워지면 도루(시도)가 늘어날 수 있습니다. 두 베이스가 모두 3인치씩 늘어나니까 이때는 6인치(15.24㎝)가 줄어듭니다. 


세이버메트릭스(야구통계학)에서는 도루를 쓸데 없는 것이라고 판단한다고 믿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도루는 '너무 위험한 투자'니까 성공률을 따져보면서 시도하라는 게 세이버메트릭스 기본 결론입니다.



따라서 도루 성공률이 올라갈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도루 시도가 늘어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도루가 늘어나면 '야구는 던지고 치고 달리는 스포츠'에서 '달리는'이 빠져 애를 먹고 있는 메이저리그 흥행 성적에도 도움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야구가 빨라진다는 것


당연히 도루만으로 부족합니다. 야구가 다시 던지고 치고 달리는 스포츠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인플레이 타구가 늘어야 합니다. 인플레이 타구를 늘리는 가장 확실한 길은 삼진을 줄이는 것.


지난해 메이저리그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삼진이 안타보다 많았습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구원 투수 숫자가 늘어난 게 삼진이 늘어난 이유라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데이터를 살펴봐도 그 영향이 큽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이에 대해 내놓은 해법은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면 최소 세 타자를 상대하게 하는 겁니다. 올해부터 애틀랜틱 리그에서 새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면 최소 세 타자를 상대하거나 아니면 이닝을 끝마쳐야 합니다. 최소 세 타자 상대 규칙을 처음 들었을 때 '9회 1사에 위기가 찾아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하고 물었는데 이에 대한 해답인 셈입니다.


이 규칙을 적용하면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 숫자가 줄어들 확률이 높습니다. 이렇게 되면 경기 시간을 줄이는 효과도 나타날 겁니다. 이에 덧붙여 현재 2분 5초로 돼 있는 투수 교체 제한 시간도 1분 45초로 20초 줄어듭니다. 이닝이 끝나고 공수를 바꿀 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합니다.


마이너리거 삶을 그린 영화 '19번째 남자'에서 마운드에 선수가 모인 장면


'티 파티(tea party)'도 금지하기로 했습니다. 티 파티는 마운드에 (주로) 내야수가 모여 작전 회의를 벌이는 걸 뜻합니다. 올해부터 애틀랜틱 리그에서는 투수를 교체할 때 또는 투수가 다쳤을 때를 제외하면 선수 또는 코칭 스태프가 마운드를 방문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경기 시간을 줄이려는 이유입니다.


애틀랜틱 리그는 또 올해부터 수비 시프트를 제한하기로 했는데 이 역시 경기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애틀랜틱 리그에서는 투수가 공을 던질 때 2루를 기준으로 양쪽에 야수가 두 명씩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어기면 심판은 볼 데드를 선언하고 타자는 볼을 하나 얻게 됩니다.


수비 시프트 제한이 공격력을 끌어올릴지는 의문이지만 투구 사이 간격, 즉 인터벌은 줄일 겁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갈수록 투구 인터벌이 길어지는 추세입니다. 야수가 자리잡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투수가 공을 던지는 일이 늘어서 생기는 일. 야수가 자리를 옮겨야 하는 일이 줄어들면 인터벌도 줄어들게 되고 그러면 경기 시간도 줄어들 겁니다.



야구가 진화한다는 것

변형 야구라고 할 수 있는 '배틀볼' 리그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홈런왕 강속구'


지금까지 말씀드린 건 아래 일곱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구심은 트랙맨 레이더 추적 시스템 도움을 받아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린다.
  • 투수를 교체할 일이 있거나 선수가 다쳤을 때를 제외하면 코칭 스태프나 선수는 마운드에 방문할 수 없다.
  • 투수는 부상이 아니면 최소 세 타자를 상대하거나 이닝을 끝내기 전에는 마운드에서 내려올 수 없다. 
  • 1~3루 한 변 길이는 15인치에서 18인치로 늘어난다.
  • 투수가 공을 던지는 시점에는 2루를 기준으로 양쪽에 내야수가 두 명씩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 공수 교대, 투수 교체 제한 시간을 2분 5초에서 1분 45초로 줄인다.
  • 후반기부터 투수판에서 홈플레이트 사이 거리를 24인치 늘린다. 마운드 높이나 경사는 바꾸지 않는다.


이 중에 몇 가지나 3년 뒤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살아남은 내용은 야구를 어떻게 바꿀까요? 이런 변화를 진화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또 어떤 후속 조치가 뒤따라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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