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너 담당 종목 다 끝났다며? 기사는 잘해야 단신이겠지만 그래도 배구장이나 한 번 가봐라."

선배가 이렇게 말씀하시기에 별 생각 없이 안산 상록수체육관으로 향했습니다. 정구를 제외하면 2014 인천 아시아경기서 제 담당 종목은 일정을 모두 마친 상황. 그렇게 차를 몰고 체육관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네, 저는 이 대회 남자 배구 준결승전에서 한국이 일본에 1-3으로 패하는 걸 현장에서 지켜 본 유일한 한국 기자입니다.

이 경기는 아시아경기가 주로 열리는 인천이 아니라 안산에서 열린데다 이날 송림체육관에서 여자 배구 결승전이 있었습니다. 배구 기자 대부분이 여자 결승전으로 향했던 게 당연한 일. 저는 그저 "손이 빈다"는 이유로 남자 배구 경기장에 갔던 겁니다. 1세트는 '룰루랄라'하며 보다가 중간에는 긴장이 됐고 나중에는 그저 모든 걸 포기하게 됐습니다. 응원차 경기장을 찾은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님하고 마주쳤는데 인사를 건넬 수 없을 정도 표정이 굳어 계시더군요.


물론 이란이 너무 세서 금메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안방에서 일본에 패할 거라고 예상한 배구 전문가는 별로 없던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다 기자석에 놓아 둔 모니터로 여자 경기를 보니까 "한국 배구가 이래서 문제"라는 생각이 딱 들더군요. 다른 건 하나뿐이었습니다. 여자팀 에이스는 김연경(26·페네르바흐체)인데, 남자팀은 박철우(29·삼성화재)라는 것.

요컨대 이런 이야기입니다. 프로배구는 갈수록 '외국인 선수 몰방(沒放)'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국내 선수들 플레이 패턴도 여기에 익숙해진 게 당연한 일. 여자 팀에서는 김연경이 외국인 선수 구실을 훌륭히(그 이상) 소화했습니다. 반면 박철우는 그냥 박철우였던 게 문제였던 겁니다.

흔히 '몰빵 배구'라고 표현하는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총포나 기타 폭발물 따위를 한 곳을 향하에 한꺼번에 쏘거나 터뜨림"은 '몰방'이 맞습니다.


가자! 몰방배구 세계로!

13일 경기까지 2014~2015 NH농협 V리그 남자부 경기에서 외국인 선수는 전체 공격 시도 중 46.8%를 책임졌습니다. 기대보다 적다고요? 현대캐피탈이 아가메즈(29·콜롬비아) 교체 과정에서 외국인 선수가 뛰지 않은 경기가 있었고, 우리카드 까메호(25·쿠바) 역시 정상 컨디션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여자부는 49.0%로 역시 지난 시즌 45.2%보다 3.8%포인트 올라갔습니다.

▌프로배구 V리그 남자부 외국인 선수 공격 점유율 추이 

※2014~2015 시즌은 13일 현재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생 배구에서 대형 라이트 자원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어차피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 보니 선수들이 다른 자리를 찾아 보는 거죠. 올 시즌 토종 선수 가운데 공격 점유율 30%를 넘긴 선수는 LIG손해보험 김요한(29·32.4%), 현대캐피탈 문성민(28·30.2%) 딱 두 명뿐입니다. 모두 왼쪽에서 공격하는 선수들이죠.

외국인 선수가 없었더라면 라이트가 맞았을 이 선수들에게 왼쪽 날개 공격수 자리를 내주다 보니 리시브도 흔들립니다. 감독들은 틈만 나면 "리시브가 문제"라고 하는데 원래 서브를 받지 않아도 될 선수들을 리시브 받는 자리에 박아두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 리시브가 흔들리는 세터는 외국인 선수에게 공을 띄우고, 그러면 다시 국내 선수 공격이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진 겁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더 생깁니다. 세터가 크기 힘들게 된 겁니다. 삼성화재 주전 세터 유광우(29)가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는 게 반증일 겁니다. 국가대표로 쓸 수 없는 몸 상태지만 외국인 선수에게 공 띄우는 건 이만한 선수가 없으니까요. 지난 시즌 B급 용병 바로티(23·헝가리)하고 손발을 맞출 때는 차세대 국가대표 주전 세터처럼 보였던 옥저(OK저축은행) 이민규(22)도 S급 용병 시몬(27·쿠바)에게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하고 말입니다.

또 한번 악순환이 찾아올 차례. 용한 세터가 없으니 감독으로선 더욱 외국인 선수에 집착하게 되고 몸값 300만 유로(약 41억571만 원)짜리 선수가 아시아 경기서도 동메달밖에 따지 못하는 나라 리그로 흘러들게 되는 겁니다. 비싼 선수 데려왔으니 점유율이 올라가는 것도 당연한 일. 이런 사정은 여자부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외국인 선수 몸값 상한선 28만 달러(약 3억856만 원)를 더 크게 어기는 건 오히려 여자부 쪽입니다.


몰방배구→인기하락?


그런데 여기서 딜레마가 생깁니다. 국제 경쟁력을 강화해야 하니까 프로 리그도 규정을 바꾸는 게 맞을까요? 올 시즌 프로배구는 문자 그대로 '황금기'입니다. 특히 시청률이 그렇습니다. 남자부 2라운드 평균 시청률이 1.09%(닐슨코리아 전국 유료 가구 기준)로 1% 넘었고, 여자부에도 15경기 가운데 5경기(33.3%)가 시청률 1%를 넘었습니다. 외국인 선수 '몰방'이 프로배구 흥행 실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건 지금 당장으로선 그냥 공자님 말씀일 뿐인 겁니다.

일단 올 시즌에는 여자부에서 현대건설 이다영(사진 왼쪽), 흥국생명 이재영(이상 19) 쌍둥이 자매가 등장해 스타 갈증을 해소한 상황. 그래도 저 역시 장기적으로 토종 스타 선수가 부족해지면 언젠가는 인기를 갉아먹게 될 거라고 봅니다. 한국배구연맹(KOVO)도 이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자부는 당장 다음 시즌부터 트라이아웃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건설 폴리(24·아제르바이잔)처럼 올 시즌 맹활약하고 있는 선수들도 다음 시즌이면 볼 수 없게 됩니다. 남자부도 '특정 구단 입김으로' 제도 도입을 미루고 있을 뿐 결국 트라이아웃 제도로 갈 겁니다.

트라이웃 제도를 통해 지금 뛰고 있는 S급 선수들 대신 미국대학체육협의회(NCAA) 출신 선수들이 들어오면 지금보다 배구가 더 흥미진진해질까요? 국내 선수들 기록이야 더 좋아지겠지만 그게 곧 실력 향상으로 뜻하진 않을 겁니다. 몰방 대상이 외국인 선수에서 국내 선수로 바뀔 뿐이겠죠. 그저 '외국인 선수들이 너무 잘하니까 좀 못하는 애들 데려오자'고 해서 쉽게 풀릴 문제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몰방배구, 신장제한은 어떨까?


역시나 공자님 말씀 같은 해법은 '유소년 배구 선수 육성'인데, 이게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당장 중국 교포 출신 이영(18·강릉여고)이 GS칼텍스에서 1라운드 지명을 받을 만큼 대형 국내 선수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여자 고교부 팀도 18개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심심찮게 국가대표를 배출하던 남자 대학부에서도 사실상 한국전력 전광인(23)을 마지막으로 스타 선수 명맥이 끊긴 상황이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임시 방편으로 신장(키) 제한도 해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일단 키 제한을 걸어 두면 지금처럼 라이트 공격수 일변도로 선수를 뽑기 힘들기 때문에 몰방 문제가 자연 소멸할 수 있을 걸로 봅니다. 지금은 남자부에 2m짜리 토종 센터도 부족한 판에 외국인 라이트 공격수들이 줄줄이 2m가 넘으니까요. 덧붙여 프로야구처럼 외국인 선수 몸값도 현실화하고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C급 선수들만 트라이아웃 문을 두드릴 테고 프로리그 인기가 하락할 게 당연한 일입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꼭 필요한 건 맞는데 그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는 게 문제 해결 첫걸음이라는 말은 맞지만 프로배구는 문제를 알고도 너무 오래 방치한 게 사실입니다. 지금 분위기라면 어느 팀에서 "시몬도 안 되니 삼성화재 레오(24)를 막으려면 이 방법 뿐"이라며 드미트리 무세르스키(26·러시아·아래 동영상)마저 데려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말 이렇게 되기 전에 시행착오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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