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메이저리그(MLB)에서 투구 인터벌이 가장 긴 투수는 지오바니 가예고스(31·세인트루이스)입니다.
가예고스는 주자가 없을 때도 상대 타자가 타격 준비를 마친 시점으로부터 평균 19.8초가 지나야 공을 던집니다.
MLB 공식 규칙 5.07(c)는 '투수는 주자가 없을 때는 포수로부터 공을 받은 순간으로부터 12초 안에 공을 던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예고스는 이 '12초 룰'을 계속 어겨가면서 공을 던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MLB 규칙에는 주자가 있을 때 투구 간격을 제한하는 내용은 따로 없습니다.
한국 프로야구는 주자가 있을 때 19초 이내에 공을 던지라고 주문하고 있는데 가예고스(24.5초) 이 규정 역시 깔끔하게 무시합니다.
이 'MLB의 성준'이 내년에도 이런 페이스로 공을 던졌다가는 바로 바로 '볼' 판정을 받게 됩니다.
MLB 사무국에서 주자가 없을 때는 15초, 있을 때는 20초 안에 공을 던져야 하도록 규칙을 수정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구장 홈 플레이트 뒤편에 투구 제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초시계 '피치 클록'까지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투수에게만 의무를 보여하는 건 아닙니다.
타자 역시 피치 클록이 8초 아래로 떨어지기 전까지 타격 준비를 마쳐야 합니다.
타자가 이 규정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구심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합니다.
MLB 사무국은 △피치 클록 도입 △수비 시프트 금지 △베이스 크기 확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규칙 개정안을 9일(현지시간) 발표했습니다.
MLB 사무국은 2019년부터 독립리그 '애틀랜틱 리그'에 의뢰해 각종 규칙 변경을 실험했습니다.
마이너리그에서도 로봇 심판 도입을 비롯해 각종 실험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구단 대표 6명, 선수 대표 4명, 심판 대표 1명이 참가하는 경기력 향상 위원회(The Competetion Committee) 투표를 거쳐 이 실험 중 일부를 채택하기로 했습니다.
예상하시는 것처럼 선수 대표 4명 모두 피치 클록 도입과 수비 시프트 금지에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다수결에서 밀려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이 포스트를 가예고스 이야기로 시작한 건 수비 시프트보다도 투구 타이머가 경기에 끼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겁니다.
(적어도 2018년까지) 리그 전체 관점에서 보면 수비 시프트가 끼친 영향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투구 타이머는 (적어도 마이너리그에서는) 효과가 확실했습니다.
MLB 사무국은 올해부터 AAA 투수들에게 주자가 없을 때는 15초, 주자가 있을 때는 19초 안에 공을 던지라고 주문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해 3시간 4분이었던 AAA 평균 경기 시간은 올해 현재 2시간 38분으로 26분(14.1%)이 줄었습니다.
사실 직접적으로 경기 시간을 제한하는 데 소요 시간이 줄어들지 않으면 그게 더 재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LB에서 2시간 37분 이전에 경기가 끝났던 건 1979년(2시간 35분)이 마지막입니다.
이후 44시즌을 치르는 동안 MLB 평균 경기 시간은 우상향 추세를 이어왔습니다.
올해 현재는 3시간 7분으로 AAA와 비교했을 때 30분(19.1%)이 더 깁니다.
MLB 평균 경기 시간은 2012년(2시간 56분) 이후 11년 동안 한 번도 3시간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야구 경기 시간이 일어나는 제일 큰 이유는 (주로 파울볼 때문에) 투구수가 늘어난다는 점입니다.
투구수를 줄이는 방법보다는 투구 간격을 제한하는 게 훨씬 간단하니까 피치 클록 도입은 일단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MLB 경기에서 공을 250개 이상 던진 투수는 총 458명입니다.
이 458명이 공을 하나 던지는 데는 피치 클록 기준으로 평균 12.4초가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리그 전체적으로는 15초 제한 시간이 큰 문제가 되리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제는 가예고스를 비롯해 이 중 15.3%(70명)가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이 15초 기준에 맞춰 공을 던지기만 했어도 올해 MLB 전체 경기 시간은 7시간 이상 줄어들었을 겁니다.
물론 이들뿐 아니라 경계선에 있는 다른 투수들도 공을 더욱 빨리빨리 던질 확률이 높습니다.
주자가 있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458명 가운데 10.6%(49명)가 규정 위반 상태입니다.
이 선수들이 투구 타이머 규정을 지킨다고 하면 전체적으로 4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물론 투구 타이밍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면 기량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AAA 기준으로는 투구 제한 시간이 생긴다고 실점이 늘어나지는 않았습니다.
AAA에서는 특별히 부상이 늘어났다는 조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경기가 빨리 끝나 휴식 시간이 길어지면서 부상이 줄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투구 타이머는 공이 투수 손을 떠날 때마다 초기화가 됩니다.
타자에게 공을 던질 때뿐 아니라 주자에게 공을 던질 때 = 견제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투수가 이를 역이용하면 '경기 시간을 줄이겠다'는 취지가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이에 MLB 사무국은 투수가 투구판에서 발을 뗄 수 있는 횟수를 타석당 두 번으로 제한하기로 했습니다.
투수가 투구판에서 발을 떼지 않은 채로 견제를 하면 '보크'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투수가 같은 타석에서 세 번째로 발을 풀었을 때도 보크를 선언합니다.
MLB는 이와 함께 한 변 길이가 15인치(약 38.1㎝)였던 베이스는 각 18인치(약 45.7㎝)로 키우기로 했습니다.
견제가 줄어들고 베이스가 커지면 = 베이스 사이 거리도 가까워지면 도루도 늘어날 겁니다.
애틀랜틱 리그에서 진행 중인 실험을 소개할 때 말씀드린 것처럼 MLB는 기본적으로 야구는 '던지고 치고 달리는 스포츠'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루가 늘어나도록 경기장 환경을 바꾸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베이스를 키우면 밟을 곳이 늘어나기 때문에 부상 방지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내년에는 호세 레예스(39·당시 뉴욕 메츠)가 2007년 78도루를 기록한 뒤 명맥이 끊긴 70도루 클럽 회원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야구는 원래 연회 = 파티를 시작하기 전에 몸을 푸는 놀이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여유가 넘치는 종목'이지만 이제는 넘쳐도 너무 넘칩니다.
야구와 8촌 사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 시간이 야구보다 더 길기로 소문 났던, 크리켓도 '트웬티20(T20)' 도입 이후로는 2시간 안팎이면 승부가 끝납니다.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도 2019년 이미 "야구는 기본적으로 7회까지 하는 종목"이라고 선언했습니다.
MLB가 먼저 제도를 도입했으니 한국야구위원회(KBO)도 내년 혹은 내후년에 이 제도를 따라할 확률이 높습니다.
한국 프로야구도 1999년 이후 한 번도 3시간 밑으로 평균 경기 시간이 줄어든 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