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2020 도쿄 올림픽에 출전한 노바크 조코비치. 도쿄=로이터 뉴스1

압박감은 특권이다(Pressure is privilege).

 

노바크 조코비치(34·세르비아·세계랭킹 1위)는 2020 도쿄(東京) 올림픽 8강에 진출한 뒤 '골든 그랜드 슬램 도전 스트레스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골든 그랜드 슬램은 같은 해에 4대 메이저 대회(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 US 오픈)는 물론 올림픽 금메달까지 차지하는 일을 뜻합니다.

 

조코비치는 올해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에서 모두 우승한 상태로 도쿄 올림픽에 출전한 상태였습니다.

 

이제는 잘 아는 것처럼 조코비치는 도쿄 올림픽 4강전에서 패하면서 골든 그랜드 슬램 달성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US 오픈에 출전한 노바크 조코비치. 뉴욕=로이터 뉴스1

그래도 US 오픈에서 우승하면 같은 해에 4대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는 캘린더 그랜드 슬래머로는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

 

프로 선수가 4대 메이저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된 1968년 이후(오픈 시대) 이런 기록을 남긴 남자 선수는 로드 레이버(83·호주) 한 명뿐입니다.

 

지난달만해도 조코비치가 도쿄 올림픽 패배 후유증으로 US 오픈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던 게 사실.

 

관측은 관측일 뿐 이런 대기록을 눈 앞에 두고 출전조차 하지 않을 조코비치가 아니었습니다.

 

조코비치는 US 오픈에서 우승하면 역대 최다 메이저 우승 기록도 새로 쓸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US 오픈 메인 코트 '아서 애시 스타디움'에 자리잡고 있는 '압박감은 특권이다' 문구 

사실 '압박감은 특권'이라는 멘트 저작권은 여자 테니스 전설 빌리 진 킹(78)에게 있습니다.

 

US 오픈 경기장 이름이 '빌리 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이고, 이 경기장 메인 코트인 '아서 애시 스타디움' 출입구 앞에서 저 문구가 선수를 기다립니다.

 

조코비치는 12일(현지시간) 결승전을 앞두고도 저 문구를 지나 아서 애시 스타디움에 들어섰습니다.

 

그건 결승전 상대 다닐 메드베데프(25·러시아·2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메드베데프는 조코비치 다음으로 세계랭킹은 높지만 메이저 대회 우승 경험은 제로(0)인 선수.

 

올해 호주 오픈 결승전에서도 1시간 53분 만에 조코비치에게 무릎을 꿇었던 메드베데프였습니다.

 

캘린더 그랜드 슬램을 향해 온 신경을 집중한 노바크 조코비치. 뉴욕=로이터 뉴스1

그러나 자기 마음만큼 자기 마음대로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또 있을까요?

 

그렇게 곧잘 우리는 머리로는 그렇다는 걸 잘 알면서 마음이 못 따라가는 시간에 놓이게 됩니다.

 

그 시간에는 당연히 몸도 마음 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메드베데프보다 8년 8개월 20일 먼저 태어난 조코비치는 그보다 5시간 35분을 더 뛰고 나서야 결승전 무대를 밟을 수 있었습니다.

 

1세트 첫 게임부터 40-15로 앞서다가 역전당한 조코비치는 프랑스 오픈 때처럼 첫 두 세트를 먼저 내주고 말았습니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자 노바크 조코비치가 부러뜨린 라켓. 뉴욕=로이터 뉴스1

3세트서도 시작과 함께 0-4로 끌려가던 조코비치는 4-5로 추격하면서 압박감을 떨쳐 내려 했습니다.

 

코트를 바꾸려고 벤치로 들어오는 순간 만원 관중(2만3000명)이 그에게 박수로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순간 조코비치는 수건을 감싸고 눈물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얼음장 같았던 동유럽 사나이는 갑자기 뉴욕 팬들이 사랑하는 '언더 도그'가 돼 있었습니다.

 

마지막 게임에 들어가기 전 눈물을 보인 노바크 조코비치. ESPN 중계화면 캡처

다음 게임은 메드베데프 서브 차례. 조코비치가 프랑스 오픈에 이어 세트 스코어 0-2를 뒤집으려면 브레이크가 필요했습니다.

 

뉴욕 팬들은 메드베데프가 서브를 넣을 때마다 야유를 보내며 조코비치에게 힘을 보탰지만 결국 이 게임이 결국 마지막 게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30-40 상황에서 조코비치가 리턴한 공이 네트를 넘어가지 못하면서 경기는 그대로 끝이었습니다.

 

조코비치는 그렇게 2시간 15분만에 0-3(4-6, 4-6, 4-6)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노바크 조코비치 캘린더 그랜드 슬램 꿈이 물거품으로 변한 그 순간. 유튜브 캡처

조코비치는 비록 캘린더 그랜드 슬램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뉴욕이 사랑하는 패자'가 됐습니다.

 

이날 서브 에이스(6-16), 공격 득점(27-38), 실책(38-31) 등에서 모두 뒤진 조코비치는 "오늘 내 경기력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결국 패해서 마음이 쓰라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러분 응원을 받아 기쁨으로 마음이 벅차다. 뉴욕에서 이런 느낌은 처음 받아 본다.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해 "현재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할 자격이 있는 선수가 있다면 그건 바로 메드베데프"라면서 "앞으로 이 무대에 자주 서게 될 것"이라고 축하 인사를 건넸습니다.

 

노바크 조코비치(왼쪽)에게 축하를 받고 있는 다닐 메드베데프. 뉴욕=로이터 뉴스1

메드베데프는 "팬 여러분과 조코비치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로 예의를 갖췄습니다.

 

이어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나는 사실 조코비치가 테니스 역사상 최고 선수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팬들 박수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 "오늘 여러분이 조코비치를 더 많이 응원한 것 같지만 완전히 이해한다. 2019년 생각이 많이 났다"는 말로 더 큰 박수를 이끌어 냈습니다.

 

 

메드베데프는 2019년 이 대회 결승에 올라 라파엘 나달(35·스페인·5위)에게 2-3(5-7, 3-6, 7-5, 6-4, 4-6)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메드베데프는 당시 볼 보이가 가지고 있는 수건을 빼앗는 등 코트 매너 때문에 팬들 눈밖에 나는 바람에 대회 내내 팬들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대신 결승에서 패한 뒤 "오늘 세트 스코어 0-2로 뒤진 상황에서 경기를 더 오래 보고 싶어하시는 팬들이 응원해 주신 덕분에 에너지를 받을 수 있었다"면서 팬들에게 사과 의사를 건넸습니다.

 

 

당시 "0-2로 뒤진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20분 뒤에 0-3으로 패하면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생각했다"고 답했던 유머 감각은 이날도 빛이 났습니다.

 

메드베데프는 "오늘이 세 번째 결혼기념일인데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 오늘 패하면 어떤 선물을 사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우승 상금 250만 달러(약 29억2500만 원)가 들어 있는 봉투를 전해 받고는 "여기서 열어 봐야 하느냐"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사회자도 "우리를 믿으라"고 말하며 관중들에게 웃음을 선물했습니다.

 

2021 US 오픈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추고 있는 다닐 메드베데프. 뉴욕타임스 제공

현역 20대 선수가 메이저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한 건 지난해 이 대회 챔피언 도미니크 팀(28·오스트리아·6위) 이후 메드베데프가 처음입니다.

 

단, 결승전에서 조코비치, 나달, 로저 페더러(40·스위스·9위) 등 '빅3'를 물리치고 정상에 오른 건 메드베데프가 처음입니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남자 테니스 삼국지도 대단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메드베데프는 또 이날 우승으로 2005년 호주 오픈 정상을 차지한 마라트 사핀(41·은퇴)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 출신 남자 메이저 단식 챔피언이 됐습니다.

 

남녀 러시아 선수를 모두 합치면 2014년 프랑스 오픈 챔피언 마리야 샤라포바(34·은퇴) 이후 첫 우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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