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東京) 올림픽 마지막 날인 8일에도 한국은 메달 획득 없이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날 여자 배구 대표팀이 1976 몬트리올 대회 이후 45년 만에 메달에 도전했지만 최종 순위는 4위였습니다.
한국은 이날 아리아케(有明) 아레나에서 열린 동메달 결정전에서 세르비아에 0-3(18-25, 15-25, 15-25)으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여자 배구는 한국이 이번 대회에서 4위에 이름을 올린 12번째 (세부) 종목입니다.
이번 도쿄 대회는 한국이 출전한 18번째 여름 올림픽입니다.
이 전까지는 한국이 이렇게 4위를 많이 차지한 적이 없습니다.
앞선 17차례 올림픽에서는 2000년 시드니 때 9개가 최다 4위 기록이었습니다.
이번 도쿄 대회만 살펴 보면 한국은 최다 4위 랭킹에서 4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보다 4위에 자리한 종목이 많은 나라는 미국(26개),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15개) 그리고 영국(14개)뿐입니다.
미국(1위), 영국(4위), ROC(5위)는 메달 숫자도 많은 반면 한국(16위)은 4위만 많은 재미있는 기록을 남긴 겁니다.
한국은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금 6개, 은 4개, 동 10개 등 메달을 총 20개 따냈습니다.
메달 숫자만 따지면 1984 로스앤젤레스(LA) 대회 이후 가장 나쁜 성적입니다.
단, 4강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조금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한국은 이번 대회 때 총 32개(= 메달 20개 + 4위 12개) 종목에서 4강 안에 들었습니다.
역시 좋은 성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2016 리우데자네이루 때보다는 7개 종목이 늘어난 결과입니다.
그래서 한국 스포츠가 희망적이냐? 그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일단 메달리스트가 나이 들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번 대회에서 메달을 딴 한국 선수 34명은 평균 27.6세입니다.
이보다 한국 올림픽 메달리스트 나이가 많았던 건 1952 헬싱키, 1956 멜버른 대회뿐이었습니다.
두 대회 모두 평균 28.5세였고 메달리스도 전부 2명씩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올림픽을 1년 미뤘으니까 한 살은 빼는 게 맞습니다.
그렇게 26.6세로 메달리스트 나이를 낮춰도 역시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앞선 17차례 올림픽에서는 전체 메달리스트 가운데 7.7%만 30대였습니다.
이번에는 역대 한국인 최고령 메달리스트 기록을 새로 세운 오진혁(40·양궁)을 비롯해 26.5%가 30대 이상입니다.
30대 메달리스트가 이렇게 늘어난 제일 큰 이유는 금 1개, 은 1개, 동 3개를 차지한 펜싱 때문.
펜싱 메달리스트 16명 평균 나이는 30.1세, 이 중 절반인 8명이 30대 선수입니다.
2024 파리 대회 때는 이 선수 모두가 나이를 세 살씩 더 먹습니다.
당장 사브르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동메달을 딴 김정환(38)은 이미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선수입니다.
이번 대회서 4위를 차지한 선수도 희망을 논하기는 살짝 애매합니다.
여자 배구, 야구, 탁구 남자 단체전 등 출전 선수가 3명 이상인 종목을 제외한 이번 올림픽 4위 한국 선수 11명은 평균 25.4세입니다.
이들 역시 파리 대회 때는 평균 28.4세가 됩니다. 올림픽 선수로서는 적은 나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한국 올림픽 출전 역사상 이전 대회 4위를 그다음 올림픽 메달로 바꾼 건 1972 여자 배구 대표팀뿐입니다.
이렇게 한국 '엘리트 스포츠'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굳이 강조한 건 이기흥(66) 대한체육회장 때문입니다.
이 회장은 이날 대회 결산 기자회견에 나서 "이번 대회를 통해 세대교체를 완전히 이뤄냈다"고 평했습니다.
그러면서 근거로 제시한 선수가 황선우(18·서울체고)와 신재환(23·체조)이었습니다.
황선우가 한국 수영 미래라는 건 확실히 사실에 가까울 겁니다.
다만 2000년 시드니 대회 이후 메달리스트가 평균 나이가 22.8세인 체조 남자 뜀틀(도마)에서 금메달을 딴 23세 선수를 세대교체 사례라고 내세우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신재환이 파리 대회 때 또 메달을 목에 걸지 말라는 법은 물론 없지만 일단 '오늘'을 축하하면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이 회장 시각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건 "한국 스포츠가 다시 세계를 호령하려면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가 절실하다"는 발언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는 "이번에 금메달 4개를 따낸 양궁은 협회장사인 현대자동차그룹에서 37년간 500억 원 정도를 투자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현대차가 한국 양궁을 세계 최강으로 만든 건 물론 상찬(賞讚)해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고 좋은 싫든 한국 (엘리트) 스포츠가 기업 후원에 의존해 여기까지 굴러온 것 역시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단, 이런 식으로 기업이 특정 종목을 후원하는 건 소위 엘리트 체육 화룡점정에는 도움이 되지만 체육계 전반이 골고루 발전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대한체육회장은 엘리트 체육뿐 아니라 생활 체육을 대표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이 회장은 "체육인들의 사기도 많이 떨어졌다"는 말을 통해 스스로 엘리트 체육인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토하기도 했습니다.
아닙니다. 한국 스포츠는 이제 다시 일본을 벤치마킹해야 합니다.
물론 이번 올림픽 때 일본이 종합 3위를 차지한 건 '안방 어드밴티지'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올림픽 메달을 총 58개(금 27, 은 14, 동 17개) 따낸 이유가 그 하나뿐일 리는 없습니다.
일본이 다시 '엘리트 스포츠 강국'이 된 건 생활 체육 정책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그 덕에 한국식 엘리트 체육 정책을 접목하면서 다시 국제대회에서도 성적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여자 농구입니다.
평균 키 175.6㎝인 일본 여자 농구 대표팀은 이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반면 일본보다 평균 키가 5㎝ 가까이 큰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3전 전패로 탈락한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참고로 한국 여자프로농구(WKBL) 선수 연봉이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선수보다 더 많습니다.
한국 여자 농구가 기업 후원이 부족해서 성적을 내지 못한 건 아닙니다.
차이는 '풀뿌리 스포츠 팀'입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일본 여자 고교부 농구팀 숫자는 3569개, 선수는 4만9824명입니다.
반면 같은 시점에서 한국 여고 농구팀은 19개, 선수는 146명이 전부였습니다.
맞습니다. 일본은 '농구가 취미'인 학생 숫자를 다 센 거고 한국은 '엘리트 선수'만 따진 거라 이 숫자를 일대일로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는 정말 압도적인 차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당연히 농구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지난해 기준 일본 여고 배구부 숫자는 3621개였습니다. 한국은 17개입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일본 여자 배구는 역대급으로 망했고, 특히 한일전 패배가 뼈아팠습니다.
그래도 올림픽 4강을 밟은 한국 여자 배구가 일본을 앞질렀다고 생각하는 배구 관계자는 아마 없을 겁니다.
한국에 사실 풀뿌리 스포츠 모델이 없는 게 아닙니다. 태권도장이 바로 딱 그 모델입니다.
한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행했던 글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제목: 애들을 태권도장에 보내는 이유
보통 주 5일. 1시간의 가격대가 13~20만 원.
다른 학원보다 저렴하고 특별한 도구나 시설비용이 없음.
인성 교육, 훈육 개념까지 추가되고 안전하게 재미있게 놀이하면서 애들 체력 키워줌.
태권도만 배우는 게 아니라 줄넘기, 피구 등등 여러 놀이를 배울 수 있음.
유치원이나 학교 앞에서 픽업해줘서 운동하고 다음 학원까지 차로 데려다 줌.
주말엔 철마다 체육 소풍 데려가고 생일 파티나 놀이 프로그램까지 관장이나 사범이 짜서 활동함.
가끔 밤에 다 같이 모여서 영화 관람하고 간식 먹기도 함.
태권도장에서 주말엔 추가 비용 조금 내면 도장 안 다니는 동생까지 해서 1박 재워주는 프로그램도 있음. 엄빠들 주말 데이트 가능.
초등학교 학예회나 학교 체육 시간 실습 같은 것도 알아서 준비해줌.
부모 퇴근이 늦어지면 재량으로 남아서 자율 체육 활동도 가능함.
방학 때는 보통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장에 있어도 된다 함. 밥까지 줘서 맞벌이 부부들이 선호한다 함.
애들 에너지를 쭉쭉 뽑아 줘서 에너지 소진으로 집에 와서 풀 잘 잔다고 함.
동네 태권도장은 종합 육아 센터라고 함.
사실 이게 요즘에만 벌어지는 일도 아닙니다.
그냥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이런 어른들 사정을 몰랐을 뿐 그때도 태권도장은 종합 육아 센터 구실을 했습니다.
그렇게 놀고 즐기는 와중에 소질과 재능이 있는 누군가는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게 아주 자연스러고 또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이런 일이 태권도만 가능하고 다른 종목에서는 불가능한 걸까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프라 구축을 강조하는 허구연 MBC 프로야구 해설위원은 "학창 시절 야구를 했던 회사원, 은행원, 정치인이 늘어야 진짜 야구 저변이 확대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또 "우리는 엘리트 선수는 공부를 너무 안 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운동을 너무 안 해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야구계에는 이미 리틀야구 팀을 통해 점점 태권도장 모델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야구처럼 시설과 장비가 필요한 종목이 해내는 데 다른 종목이라고 못할 리 없습니다.
이 회장이 정말 기업체 후원을 요청하고 싶었다면 적어도 이런 패러다임 전환 이야기를 꺼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올림픽 메달리스트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스포츠는 항상 희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겁니다.
여러 종목이 앞다퉈 아이들이 즐길거리를 제공하는 바람에 '태권도장 다 문 닫게 생겼다'는 이야기가 나와야 한국 엘리트 스포츠도 발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