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메달이요? 메달이 문제가 아닙니다. 8강도 갈까 말까예요. 메달을 딴 적이 없어요, 우리 대표팀이.

 

김연경 선수가 세계적인 선수는 맞는데 김연경 선수 2, 3명 있는 것도 아니고요.

 

8강이면 잘한다고 생각해요. 선수 구성도 많은 변화가 있고요.

 

8강만 가도 잘한 거로 생각하고 8강까지만 가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한유미 KBS 프로배구 해설위원은 2021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를 통해 드러난 한국 여자 대표팀 현실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문제는 수비"라는 이 KBS 기사 내용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한 위원 진단 자체는 'I couldn't agree more'입니다.

 

한국 여자 배구의 자랑 김연경. 국제배구연맹(FIVB) 홈페이지

특히 '김연경 선수가 2, 3명 있는 게 아니다'는 지적이 바로 우리 대표팀 현실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일 큰 이유는 공격력.

 

김연경(33·중국 광밍유베이)은 이번 VNL 예선 라운드에서 공격 효율 .311로 공격 점유율 15% 이상을 기록한 선수 가운데 5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그래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일본에서는 고가(코가) 사리나(高賀紗理那·25·NEC), 이시카와 마유(石川眞佑·21·도레이) 두 선수가 나란히 8, 9위를 차지했다는 점입니다.

 

김연경이 한국 대표팀 공격을 혼자 이끌었다면 일본은 공격에서 최소 쌍두마차 체제는 구축했던 겁니다.

 

한국에서 김연경 다음으로 공격 효율이 높았던 건 전체 23위에 이름을 올린 박정아(28·한국도로공사·.235)였습니다.

 

일본에서는 팀 내 3위 구로고 아이(黑後愛·23·도레이)가 공격 효율 .253으로 20위입니다.

 

일본 여자 배구 간판 고가 사리나(왼쪽). 국제배구연맹(FIVB) 홈페이지

고가는 2015~2016 시즌 신인왕이자 2016~2017 최우수선수(MVP) 출신으로 현재 일본 V.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이번 도쿄(東京) 올림픽에서 메달을 자신하는 데는 (안방에서 대회를 치른다는 것 말고도) 고가가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이유도 큽니다.

 

고가는 이번 대회에서 총 254점(공격 226점, 서브 17점, 블로킹 11점)을 올려 득점 순위 5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나도 일본 여자 배구 간판' 이시카와 마유. 국제배구연맹(FIVB) 홈페이지

이시카와는 일본을 2019 20세 이하 FIVB 세계여자선수권대회 정상으로 이끌면서 최우수선수(MVP) 타이틀까지 차지했던 선수입니다.

 

2019~2020 V.리그 신인상 수상자이기도 한 이시카와는 이탈리아 알리안츠에서 뛰는 일본 남자 대표 선수 이시카와 유키(石川祐希·26)와 남매지간으로도 유명합니다.

 

이시카와 역시 226점(공격 202점, 서브 15점, 블로킹 9점)으로 이 대회 득점 랭킹 8위에 자리했습니다.

 

상대 서브를 받고 있는 고가 사리나. 국제배구연맹(FIVB) 홈페이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고가, 이시카와 두 선수는 이번 대회 때 공격 효율뿐 아니라 서브 리시브 효율에서도 톱 10 안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시카와가 .445로 서브 리시브 점유율 15% 이상을 기록한 선수 가운데 2위에 이름을 올렸고 고가는 .403으로 5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일본에서는 두 선수만 서브 리시브에서 빛난 게 아닙니다.

 

점유율 미달로 이 순위표에서는 빠졌지만 상대 서브 가운데 14%를 받은 코바타 마코(小幡眞子·29·JT)도 서브 리시브 효율 .493을 남겼습니다.

 

이번 VNL에서 상대 서브를 2% 넘게 받은 선수 가운데 코바타보다 서브 리시브 효율이 높은 선수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팀 리시브 효율 .407로 예선 라운드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대회 16개 참가국 가운데 가장 높은 기록입니다.

 

반면 한국은 팀 리시브 효율 0.219로 참가국 16개국 가운데 12위에 그쳤습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면 프로배구와 서브 리시브 '성공' 측정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 숫자를 프로배구와 직접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서브 리시브 타령'을 지긋지긋해 하는 사람이고, 통계적으로 서브 리시브 효율이 팀 성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이 정도 차이가 나면 '도대체 한국은 무얼 하고 있나'하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대표팀 리베로 오지영(맨 앞). 국제배구연맹(FIVB) 홈페이지

한국 대표 선수 가운데 리시브 효율이 가장 높았던 건 (물론) 리베로 오지영(33·GS칼텍스)입니다.

 

오지영은 상대 서브를 총 288개 받았는데(리시브 점유율 24.9%) FIVB 기록원은 그 가운데 101개를 성공이라고 평가했고 서브 득점을 내준 건 15번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지영은 이 대회서 서브 리시브 효율 .299를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리시브 효율 2위는 누구일까요?

 

상대 서브를 받고 있는 김연경. 국제배구연맹(FIVB) 홈페이지

네, 바로 바로 김연경(.244)입니다.

 

팀에서 상대 서브를 가장 많이(점유율 25.4%) 받은 이소영(27·KGC인삼공사)은 서브 리시브 효율 .207이 전부였습니다.

 

상대 서브 12.5%를 받은 박정아도 서브 리시브 효율 .110을 기록하는 데 그쳤습니다.

 

그러면 이 선수들이 공격에서는 팀에 얼마나 기여를 했을까요?

 

두 일본 선수를 넣어서 슬로프 차트를 그려보면 이런 결과가 나타납니다.

 

당연히 한국은 팀 전체 공격 효율도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VNL을 공격 효율 .223으로 마쳤습니다. 참가국 16개국 가운데 14위에 해당하는 성적입니다.

 

반면 리베로를 제외한 평균 키가 한국(181.9㎝)보다 3.7㎝ 작은 일본은 공격 효율 7위를 기록했습니다.

 

공격 효율 .298을 기록한 고가는 키 180㎝로 이소영(176㎝)보다 크지만 공격 효율 .294인 이시카와는 173㎝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팀 수비는 어땠을까요?

 

상대 공격 커버율 = 상대 공격이 우리 코트 안에 떨어지기 전에 받아낸 비율을 보면 한국은 50.9%로 7위 기록을 남겼습니다.

 

4위에 이름을 올린 일본(54.1%)보다는 낮지만 공격 효율 순위보다는 이 기록 순위가 더 높습니다. 

 

물론 서브 리시브는 공격보다 수비에 가까운 플레입니다. 그래도 범위를 좁히면 수비 때문에 한국이 이번 VNL 때 꼴찌에서 2등을 한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부적으로' 이유를 찾자면 수비보다 공격이 문제였던 겁니다.

 

그리고 종목을 막론하고 수비만 잘해서는 절대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한국 공격이 떨어지는 이유가 '서브 리시브를 못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너무 단정적입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16개 나라 성적을 보면 서브 리시브 효율로는 공격 효율 차이 가운데 27%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세이메트릭스(야구 통계학) 대두 이후 '찬밥' 신세가 된 타율도 팀 득점 차이 가운데 73.3% 정도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한국이 배구를 못하는 이유는 공격을 못하기 때문이고, 공격을 못하는 이유는 김연경이 한 명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서브 리시브가 흔들려서 공격을 못한다고 믿으신다고 해도 그 이유 역시 김연경이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공격수' 가운데 김연경보다 서브 리시브를 잘하는 선수가 없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런던 올림픽 당시 김연경(가운데). 동아일보DB

그러니까 한국 여자 배구 전성시대는 어쩌면 김연경이 전성기였던 2012 런던 올림픽 4강, 2014 인천 아시아경기 금메달로 이미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한 위원 말대로 이제 냉정하게 현실을 돌아봐야 할 차례입니다.

 

제가 괜히 틈날 때마다 유소년 배구 지원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김연경이 은퇴하고 나면 한국 여자 배구는 올림픽 같은 세계 무대가 아니라 아시아 대회에서도 그저 메달이 목표인 상황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댓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