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민족주의는 신경병처럼 피할 수 없는 현대 발전 이론의 병리학이다. 신경병처럼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여차하면 백치로 전락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세계에 떠맡겨진 무력감이라는 딜레마에 뿌리를 두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유아주의와 동일한 것으로서, 대체로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 톰 네언 주장을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에서 재인용


안현수(29·러시아명 빅토르 안)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파벌싸움이 러시아로 귀화한 결정적 이유는 아니다."

"올림픽이 끝나면 모든 걸 말하겠다"던 안현수는 22일 2014 소치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3관왕에 올랐습니다. 그 뒤 공식 기자회견에 이어 한국 기자들 질문에 계속 답했다고 하네요. 이 자리에서 그는 쇼트트랙 파벌 문제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벌은 있었다. 그런 부분이 내가 귀화를 결정한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정말 이미 말씀드렸듯 여기에 온 것은 정말 좋아하는 운동을 하고 싶었고, 믿어주는 곳에서 마음 편히 운동하고 싶어 온 것이다. 나 때문에 이런 문제로 인해 한국에서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 부분에 있어 한국 선수들과 부딪히는 기사들이 많이 나간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안현수는 일부에서 "일부러 안현수를 떨어뜨리려고 국가대표 선발전 일정을 조정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자기 생각을 밝혔습니다.

2008년 무릎 부상을 당했고, 부상 여파로 1년간 4번의 수술을 받았다. 그래서 밴쿠버 전에 한 달 밖에 운동하지 못하고 선발전에 나가 떨어졌다. 이게 나에게 특혜를 줘야하는 것이다. 룰이 있다. 그 시간이 나에게 부족했다.
 
제가 지난 글에 쓴 것처럼 비록 안현수였다고 하더라도 특혜를 요구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 본인도 이 점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일단 이 인터뷰로 2010 밴쿠버 올림픽 대표팀 선발 문제는 일단락됐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자연스레 귀화 문제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2010 대표팀에 뽑혔다면 귀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으니까요. 

그러면 그 이후 상황을 알아봐야 합니다. 아버지 안기원 씨는 2011년 4월 12일에 "(안현수가) 러시아빙상연맹의 요청으로 1년간 러시아에서 뛰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안현수는 이번 인터뷰에서 "러시아에 올 때에는 처음부터 귀화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훈련하면서 환경과 시스템 부분에 있어서 부상 여파가 커 나에게는 믿어주는 것에 대한 것이 가장 컸다. 여기 계신 회장님도 나를 많이 믿어주셨다. 나를 러시아로 데려오면서 회장님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결정을 내리는데 회장님도 결과로 보여줘야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빨리 좋아지려고 노력했다. 처음 와서 1,2년은 힘들었다. 적응 문제도 있지만 나의 조급함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올림픽을 위해 한 것이기 때문에 회장님이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셨다. 그런 부분이 맞물려 결정을 내린 가장 큰 계기가 됐다. 러시아는 나를 인정해주고 믿어주는 곳이어서 결정을 내렸다.
 
또 성남시청 해체로 한국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고민이었다는 이야기도 털어놨습니다. 그때 러시아에서 손을 내밀었다는 겁니다. 안현수는 아버지가 17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전화 출연해 "성남시청 해체되기 전에 현수는 러시아 가는 것이 확정이 돼 있었(다)"고 했던 인터뷰 내용도 반박했습니다.  
 
나 또한 2008년 당시 좋은 대우를 받고, 성남시청에 입단하게 됐고 입단 후 한 달 뒤에 부상을 당했다. 그로 인해서 저를 영입한 성남시청에 제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많이 노력을 했다. 빨리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맞물려서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 이후에 팀이 해체되고, 솔직히 해체된 시기가 계약이 끝나는 해였다. 다른 팀도 있지 않느냐는 말도 있었다. 솔직히 한국에 실업팀이 많지 않다. 선수들도 거의 꽉 차있는 상태다. 저를 원하는 팀들이 있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여러 문제로 한국에서 시끄러웠고, 부상이 있는 상태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있어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래서 제가 원하는 올림픽을 다시 나가보고 싶었다. 정말 저를 위한 선택이고, 모든 것은 제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다. 그 결정에 대해 지금도 후회는 없다. 저 또한 이런 기회를 준 러시아와 연맹 회장에 고맙다.
 
결국 안현수는 자기에 더 유리한 환경을 찾아서 떠났던 겁니다.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한국이 안현수를 기다려주지 못한 게 분명 잘못입니다. 그러나 본인 말처럼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나이도 적지 않고, 몸값은 비싼 데다, 부상까지 안고 있는 선수를 무작정 기다려주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팀들이 있지 않았던 것"이죠. 게다가 지금하고 달리 한국 대표팀처럼 대체재가 적지 않던 상황이었습니다.

안현수는 러시아 진출 사실을 아버지가 밝힌 6일 뒤 마지막 한국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했습니다. 결과는 5위였습니다. 쇼트트랙 대표는 4명이고, 5위는 예비 멤버입니다. 이번 소치 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금메달리스트 공상정(18·유봉여고) 같은 선수가 바로 대표 선발전 5위 선수죠. (화교 출신이라 경우는 다르지만 공상적 역시 2011년 한국으로 귀화했습니다.)

안현수도 이렇게 뛸 수 있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겁니다. 안현수는 러시아 진출을 앞두고 "지난 주에 치른 마지막 대표팀선발전이 저한테는 자신감을 되찾게 해준 경기"라며 "러시아에 가서 체력을 보완한다면 이전의 제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재기란 다시 국가대표가 되는 게 아니라 쇼트트랙 황제가 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역시 같은 이영미 칼럼입니다.

내가 만약 러시아까지 와서 재기하지 못하고 은퇴한다면 그 모든 화살이 다시 나한테 쏟아질 것이 분명했지만 도저히 그 벽을 뚫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좌절에 빠져 있을 때 성남시청 시절 인연을 맺었던 스승 황익환 감독님이 개인 코치 자격으로 러시아에 들어오셨다. 연맹 측에서 시름에 빠져 있는 날 위해 황 선생님을 초빙한 것이다. 선생님을 만난 이후 조금씩 달라지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러시아에서 날 처음 보시고 굉장히 놀라셨던 걸로 안다. 쇼트트랙 황제 안현수가 아닌 패배자의 모습만 하고 있는 안현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면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게 잘못됐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습니다. '직업 스포츠'에서는 민족주의적 특성이 반감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개념 정의를 바탕으로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잠정적인 제안은 바로 '배타성'과 '경쟁'의 관계에 대한 접근이다. 그리고 스포츠가 대개 팀(Team) 위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억압'에 대한 고찰 또한 가능하다. 민족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기제로서 작용하듯, 소위 팀워크(Team Work)라는 것을 위해 개인 또한 자기 욕망을 조절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안현수는 이 틀을 벗어던지고 떠났습니다. 억압으로부터 탈출한 거죠. 그런데 우리는 올림픽이라는 무대 앞에서 이 민족주의적 사고를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동조현상에 시달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복잡한 사안을 따져보기보다 우리나라를 빛낼 수 있는 인재를 파벌싸움으로 내쫓아버린 대한빙상경기연맹을 악의 구렁텅이로 만드는 게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이렇게 안현수가 인터뷰했는데도 여전한 네이버 댓글 분위기가 이를 증명합니다. (네이버 댓글이 편항적인 만큼 이번 사태 역시 사실이 아닌 통념이 우리 판단을 좌우했습니다.)

※링크를 클릭하시면 닉네임이 그대로 보이기에 모자이크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스포츠와 민족주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에게 민족주의마저 없다면 스스로 '비인기 종목'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놓고 4년마다 한번씩 응원하는 아이러니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또 4년에 한번이라도 관심을 기울이는 게 그 종목 선수들에게 에너지가 될 것이고 말입니다.


그래도 한번쯤 우리가 지나치게 신경병, 무력감, 유아주의에 빠져 "백치로 전락할 수 있는 잠재력"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정말 변화와 개선을 바란다면 통념이 아니라 팩트 앞에 겸손한 자세로 문제에 접근하는 게 옳은 일일 테니 말입니다. 그게 스스로 빅토르 안이 되겠다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또 다른 빅토르 안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감 모두를 지켜갈 수 있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상정이 잘못한 게 없는 것처럼 안현수도 마찬가지라고 믿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안현수를 애타게 그리워한 오늘 서울 SK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2014 SK 핸드볼 코리아리그 여자부 개막전에서는 삼척시청과 인천시청이 24-24로 비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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