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는 홈런밖에 없구나, 하는 엉성한 폼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3할을 때리는 것도 싫었고…
우리 팀도 돈 좀 쓸 때 늘 삼성은 보약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지없이 그 오만함을 꺾는 타자가 있는 것도 싫었어요.
아니, 당신이 유니콘스로 온다고 했을 때도
어쩌면 우리 캡틴이 아까웠는지 몰라요.
솔직히 그랬죠.
나는 당신이 한 방 치기보다 그냥 아웃으로 물러나기를
기왕이면 삼진이나 병살로 타석에서 물러나기를 늘 바랐으니까요.
그래야 내가 즐겁게 야구를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당신을 인정하기 어려웠나 봅니다.
'썩 괜찮은 타자지만 대들보신(梁神)이라고?
삼성 팬한테나 그렇겠지.'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걸쭉한 사투리를 쓰는 전라도 '주먹'이
"대한민국 최고 타자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양준혁이요'하고 답했을까요?
영등포시장에서 저 대답을 하고 8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 이유가 뭔지 몰랐습니다.
어쩌면 늘 '아닌 이유'만 떠올렸는지도 몰라요.
'MVP는커녕 홈런왕 한 번도 못 해본 선수잖아.'
'지금은 저렇게 날라 다녀도 큰 경기에 약하다고.'
'아니, 왜 중심타자가 쳐야지 자꾸 볼넷을 골라?'
어쩌면 오늘 마지막 타석까지도
나는 그대를 뼛속까지 인정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전준호보다 조금 더 나은 타자'라고
애써 깎아 내리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왜 양준혁 은퇴 글 안 써요?'하는 소리에
시큰둥하게 '양준혁은 우리 팀 선수가 아니니까요'하고 대답했던 것처럼…
아니, 2000안타 때문이 아니에요.
당신을 진짜 인정하게 됐던 것.
언제인지 당신이 끝내기 2루타를 쳤던 그 때.
아니, 그 타구는 굳이 2루타가 될 필요가 없었죠.
타구가 좌측 펜스를 때리던 순간 좌익수는 이미 경기를 포기했으니까요.
이미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 왔으니까요.
그런데도 당신은 뛰었죠.
1루를 지나 2루까지
뒤늦게 좌익수가 릴레이 한 공을 2루수가 잡아
더 이상 뛸 수 없을 때까지.
그래서
당신이 2루를 밟고 손을 번적 뜬 순간
이미 승부가 결정 난 그 경기가 비로소 끝났습니다.
당신 커리어 마지막 끝내기 안타는
그렇게 너무도 당신다웠습니다.
공보다 빨라야 사는 게 야구 규칙이기 때문이 아니라
양준혁이 죽기 살기로 뛰었기에
이제껏 그 규칙이 의미가 있었다는 것
아니, 양준혁이 그렇게 뛰었기에
야구가 우리 마음속에 여태 살아 있었다는 것.
맞습니다, 당신이 곧 야구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 1루를 향해 뛰는 당신 모습에
나도 모르게 조금 울었습니다.
당신이 울면서 뛰는 게 너무 가슴에 와 닿아서…
맞아요.
삼성 팬이 아니라 그런가 봐요.
저는 1299 득점이라는 기록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언젠가 다시 돌아와
꼭 한 점을 보태주리라는 약속이라고 믿으니까.
1루까지 최선을 다해 뛰던 양준혁을 기억해 달라고요?
아니요, 언젠가 1300번째 홈플레이트를 향해 뛰어오는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영원히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는 걸 알면서도
당신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양신이니까.
한 번도 야구를 배신하지 않았던 대들보니까.
내 생애 최고 적장(敵將),
정말 고마웠습니다.
꼭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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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ni註 ────────
은퇴 경기 보면서 쓰다가 술 마시러 나가서 완성 못한 글
잠 안 와서 다시 만지작 거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