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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KBO

LG의 지초(芝草) 이종열



지난해 말 은퇴를 선언한 뒤 스키장에서 가족, 팬들과 보낸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이종열 코치. 사진 제공 김범수 씨(이종열 선수 팬클럽 '괴물변신' 회장)


LG 유니폼을 가장 오래 입은 선수

통산 타율 .247로 1000안타를 치려면 4000번도 넘게 타석에 들어서야 한다. 그는 5461타석에 들어서 안타 1175개를 때려냈다. 주전도 아니었다. 19년 동안 선수 생활을 하면서 한 시즌에 100 게임 넘게 출전한 것도 8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 흔한 타이틀 하나 차지한 적도 없다.

이런 선수는 아무도 '스타'라고 부르지 않는다. 젊을 때는 "베테랑 선수들 기회를 빼앗는다"고 치이고 나이를 먹으면 "어린 선수들 기회를 갉아 먹는다"고 치인다. 내야 어느 자리에 내놔도 빠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리그를 대표할 만한 수비 실력이 아닐 때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타구에 얼굴을 맞아 앞니 4개가 부러져도, 인대가 찢어져도 그는 야구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19년을 버텼고 LG 트윈스 유니폼을 가장 오래 입은 선수가 됐다. 30일 은퇴식을 맞이하는 이종열 육성군 코치 이야기다.


유니폼엔 이름이 두 개 : 팀 이름 + 선수 이름

1991년 장충고를 졸업하고 LG 트윈스에 입단했지만 자리가 없었다. 훗날 LG 감독을 지낸 김재박과 이광은이 아직 LG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였고, 국가대표 송구홍은 이 코치와 입단 동기였다. 한대화, 유지현도 몇 해 지나지 않아 이 팀에 합류했다.

이종열은 버텼다. 3루에서 밀리면 2루로 자리를 옮겼고 3루가 비면 다시 3루를 향했다. 오른쪽 타석에서 안 되면 왼쪽 타석으로 옮겨 다시 투수를 노려봤다. 팬들이 '단추'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작은 두 눈에 웃음을 띤 채 그는 자기 이름을 그렇게 조심스레 팬들에게 알렸다.

'이종열'이 주인공이었던 경기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조연' 이종열이 빠진 경기도 기억하기 힘들다. 그는 김정민 최동수와 함께 마지막 남은 1994 우승 멤버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 때 1승 3패로 몰린 5차전에서 3안타 2타점을 때려내 승부를 대구로 끌고간 것도 이종열이었다. 2000년대 후반 팀이 침체기에 빠졌을 때는 주장으로서 후배들을 다독이기도 했다.

냉정히 말해 '2류 선수'가 한 팀에서 19년을 '버틴다'는 건 운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팀이 필요로 하는 자리는 어디든 달려가 채웠고, 자기가 부족한 부분은 남몰래 채웠다. 타격감이 떨어질 때면 현대 타격 코치이던 김용달 코치(LG 출신)와 몰래 만나 타격 교정을 받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 그는 그렇게 누구보다 'LG맨'으로 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LG의 지초(芝草)

이 코치는 지난해 9월말 은퇴를 선언한 후 자기 팬 사이트에 공자 '교우' 편을 인용해 소감을 밝혔다.

"선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향기로운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그 냄새를 맡지 못하나 이는 곧 향기와 더불어 동화된 것이다."

- 중략 -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니 하루하루는 더디게 지나갔지만 한달, 1년은 빠르게 지나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듯 선수로서의 생활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풋내기 청년에서 이제는 두 아이의 아빠, 한 가정의 가장이며 LG TWINS 에서 가장 오랜 선수생활을 한 당당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최선을 다했지만 결코 혼자만의 결과는 아닙니다. 좋은 코치와 동료들, 선진야구를 표방한 구단의 과감한 투자인 교육리그, 그리고 구단주님의 애정 어린 관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종열이라는 선수는 존재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항상 자리 자리잡고 있는 열광적인 팬들. 이 시간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초, 난초와 함께 동화되어온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 한 번도 'LG의 간판'으로 불리지 못했지만 이 코치는 그렇게 LG의 지초, 난초가 됐다. 육성군 코치로 시작하는 그의 앞날이 선수 시절보다 더욱 향기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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