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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19살이던 조지는 1914년 7월 11일 보스턴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는 데뷔 경기서 6이닝 동안 상대 타선을 단 5안타로 틀어막았다. 7회 2점을 내주고 마운드에서 내려왔지만 팀은 4-3으로 이겼다. 통산 첫 승이었다.

조지는 1914 시즌 세 경기에 더 나와 23이닝을 던지며 승리를 한 번 더 맛봤다. 시즌 평균자책점은 3.91. 시즌이 끝난 뒤 그는 헬렌 우드포드와 결혼했다.

이듬해 선발 로테이션을 꿰찬 조지는 32경기서 18승 8패, 평균 자책 2.44를 기록했다. 이 해 레드삭스는 월드챔피언에 올랐다.

다음 시즌은 23승 12패였다. 그는 이 시즌 평균자책 1.75로 1위에 올랐다. 만 21세 이전에 아메리칸리그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한 선수는 그 전에도 그 뒤로도 없다. 조지는 이 시즌 역대 최고 투수로 손꼽히는 월터 존슨과 맞대결에서 4승 1패로 우위를 점했다. 왼손 투수인 조지는 이 시즌 완봉승을 9번 기록했다. 왼손 투수 단일 시즌 최다 완봉승 기록은 62년이 지난 뒤에야 깨졌다.

이해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조지는 혼자 14이닝을 던지며 승리투수가 됐다. 월드시리즈는 물론 포스트시즌 역사상 14이닝 완투승을 거둔 것 역시 조지뿐이다. 레드삭스는 월드시리즈 2연패(連覇)에 성공했다.

1917년에는 커리어 최다인 326과 3분의 1 이닝을 소화하며 24승 13패를 기록했다. 6월 23일 심판에게 주먹을 날려 10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걸 감안하면 대단한 기록. 선두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낸 뒤 화를 참지 못해 심판에 항의했던 것이다. 보스턴 레드삭스 역사상 2년 연속으로 23승 이상을 기록한 왼손 투수는 아직까지도 조지밖에 없다. 1900년 이후로 만 23세 이전에 2년 연속 23승 이상을 거둔 것 역시 그뿐이다.

1918년 조지는 투수로 20게임밖에 출장하지 않았다. 대신 월드시리즈에서 3승 무패, 평균 자책 0.87로 맹활약했다. 조지가 이 해 월드시리즈에서 기록한 29와 3분의 2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은 43년이 지나고서야 1961년 화이티 포드가 깰 수 있었다.

이 시즌 조지는 13승 7패, 평균 자책 2.22를 기록했다. 1919시즌에는 9승에 그쳤다.

1920 시즌을 앞두고 조지는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됐다. 그 뒤 마운드 위에서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조지가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오른 것은 1920년 1경기, 1921년 2경기, 1930년 1경기, 1933년 1경기 등 총 5경기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5경기 모두 이겼다.

조지는 결국 94승 46패, 평균자책 2.28으로 커리어를 마쳤다. 월터 존슨과 통산 맞대결은 6승 1패였다.

메이저리그 역사 상 10시즌 이상 투수로 나서 모두 5할 승률 이상을 기록한 투수는 두 명밖에 없다. 한명은 앤디 패티트, 또 한 명은 조지 허먼 "베이브" 루스다.

베이브 루스, 야구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나이.

사실 루스는 1918 시즌 투수로 뛰면서도 리그 최다인 11홈런을 쏘아 올렸다. 이듬해에는 단일 시즌 리그 최다 홈런 기록을 29개로 바꿔 놓았다.

양키스 유니폼을 입은 첫해 루스는 홈런 54개를 날렸다. 한 시즌 만에 리그 최다 홈런 기록을 두 배 가까이 늘린 것. 당시 2위 조지 시즐러의 홈런은 겨우 19개였다. 양키스를 제외하면 필라델피아 필리스만 루스보다 '팀'홈런이 많았다.

이 시즌 루스는 아메리칸리그 전체 홈런 369개 중 14.6%를 때려냈다. 2001년 단일 시즌 홈런 최다 기록을 73개로 갱신한 배리 본즈가 같은 비율을 기록하려면 431개를 더 때려야 한다.

이후 이 홈런왕 일대기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메이저리그 역사 상, 아니 미국 스포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

병원에 입원한 11살짜리 꼬마 팬에게 홈런을 약속하고, 시카고 컵스 홈구장 리글리필드에서 "예고 홈런"을 날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스토리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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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삭스 시절 팀 동료였던 해리 후퍼는 투타 양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루스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 "He liked to pitch, but he loved to hit."

 

방송가 레드 바버는 "야구는 루스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면서 "루스가 홈런을 때려내면서 야구가 짜릿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루스가 홈런을 때려내면서 야구공 제조사는 반발력이 좋은 공을 생산해 "라이브 볼" 시대가 열렸고, 야구 방망이 끝에 둥근 손잡이(knob)가 붙기 시작했다.

2월 7일은 베이브 루스의 생일이었다. 루스는 사실 1895년 2월 6일 태어났지만, 1934년 일본 방문 차 여권을 갱신하기 전까지 자신이 1894년 2월 7일에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루스가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보스턴을 찾았을 때 4만8000여 관중이 경기장을 찾아 기립 박수로 그를 떠나보냈다. 당시 보스턴 홈구장 펜웨이파크의 최다 수용 인원은 3만5000명이었다.

 

루스는 "내가 펜웨이파크를 나설 때 팬들이 따라 나와 운 것을 알고 있나요?"하고 물으며 "사실 나도 울었어요"하고 말했다. 루스의 양키 스타디움 마지막 타석을 지킨 팬들은 2000여 명뿐이었다.

Happy Birthday to "King of Crash", 내 응원팀을 86년 동안이나 저주에 시달리게 만든 장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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