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1939년 오늘 메이저리그 경기가 첫 TV 전파 중계를 탔다.

당시 사용된 카메라는 달랑 두 대. 중요한 경기라면 수 십 대도 동원하는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숫자.

사실 당시엔 뉴욕 시내 전체에 TV가 400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70년 만에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야구를 보는 우리의 눈도 달라졌고, 우리가 야구를 접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미디어와 가장 친숙한 스포츠, 야구.

야구 팬들은 경기장 밖에서 어떤 방식으로 야구와 부대끼며 살아왔을까.


1. 신문 

야구는 신문의 속성과 아주 잘 들어맞는다. 기자들에게 거의 매일 '얘기되는' 쓸 꺼리 제공해 주기 때문.

그만큼 야구에 대한 신문의 관심은 뜨거웠다.

미국 사람들은 야구를 흔히 'National Pastime'이라고 부른다. 이 말이 신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57년 '뉴욕 머큐리'였다.

야구 기록의 아버지라 불리는 헨리 채드윅은 1859년 '뉴욕 클리퍼'에 박스스코어(Box Score)를 실었다.

참고로 메이저리그가 공식출범한 것은 1869년이다.

※우리 스포츠신문에 박스스코어 대신 실리는 '땅표'를 고 이종남 기자가 만들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2. 라디오

뉴욕 소재 신문사나 TV방송사가 메이저리그를 처음 다룬 것과 달리 1921년 첫 라디오 중계는 피츠버그에 위치한 KDKA 차지였다.

1925년 윌리엄 리글리 구단주는 컵스, 샤이삭스 전경기를 라디오로 생중계했다. TV 중계가 시작된 1939년에는 모든 팀이 전 경기 생방송 체제를 구축했다.
 
'야자' 시간에 소매 끝으로 이어폰 빼서 야구 중계를 듣던 추억, 다들 가지고 계시지요?



4. TV

역시 브루클린이었다. W2XBS(WNBC의 전신)는 신시내티-브루클린 더블헤더를 첫 중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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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TV 프로그램도 없는 상태에서 야구 중계를 서두른 것은 뉴욕 세계 박람회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영국과 최초 TV 발명 문제를 놓고 대립하고 있어 기술을 먼저 선보이고 싶어했다.

금요일밤 그리고 토요일 오후 2시면 어김없이 공중파에서 야구 중계를 하던 그 때의 설렘은 언제라도 그리울 듯.


5. 700 전화 서비스 

미국에 이런 서비스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고 어쩐지 일본 서비스를 베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700 전화 서비스.

김소식 하일성 허구연 등 당대 내로라 하는 해설자들 이름을 걸고 서비스했지만, 사실 요즘으로 치면 '알바'가 경기장에서 녹음한 내용을 들려주는 방식이었다.

19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분이라면 '정보이용료' 공포가 무엇인지 알고 계실 듯.


6. CATV

KBS에서 '위성채널'을 만들면서부터 '정규방송 관계로…'가 없는 야구 중계를 시작했다. 올해부터는 하루에 열리는 프로야구 전경기 중계가 가능한 상황. 또 야구 중계 기회가 늘다보니 보다 세련된 화면을 송출하는 기술 역시 업그레이드 됐다.

미국은 1977년부터 CATV가 본격적으로 임팩트를 줬다. 현재 야구팀 소유 CATV 방송사도 여러 곳. 


7. 인터넷

텔넷 시절 '하이텔'부터 요즘 '싱아흉아'까지 글과 그림 또 VOD 등으로 인터넷을 우리가 야구를 보는 방식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위에 열거한 6가지 방식이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해야 할까?

미국 역시 MLB.TV는 스포츠 비즈니스의 대표적 성공모델로 자리잡았다. PFX는 정말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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