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저머니 쉐퍼(1876~1919·사진)는 메이저리그에서 15년 동안 뛰면서 통산 타율 .257, 9홈런, 309타점, 201도루를 남긴 내야수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메이저리그 역사에 이름 한 줄을 남기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은 선수라는 것.


그렇다고 쉐퍼가 그저 평범한 선수였던 건 아닙니다. 그는 비가 오면 우비를 입은 채로 수비하러 나가고,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당시에는 야간 경기가 없었습니다) 심판에게 정확한 스트라이크 판정을 부탁한다며 등불을 들고 타석에 들어서는 괴짜 캐릭터였습니다.


하지만 1911년 8월 4일(이하 현지시간) 선보인 플레이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입니다. 그는 이 경기에서 9회말 1루 도루에 성공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쉐퍼는 1루로 도루를 감행해 성공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다른 베이스가 아니라 1루를 훔칠 수 있던 걸까요?


미국야구조사협회(SABR)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건 쉐퍼가 몸담고 있던 워싱턴(현 미네소타)과 방문 팀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2-2로 맞서고 있던 9회말 2아웃이었습니다. 당시 워싱턴은 1, 3루에 주자를 내보낸 상태였는데 1루 주자가 쉐퍼였습니다.


쉐퍼는 자신이 도루를 시도하면 화이트삭스 포수 프레드 페인(1880~1954)이 2루로 공을 던질 테고, 그 사이 3루 주자였던 클라이드 밀란(1887~1953)가 홈 스틸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습니다. 


에드 월시와 프레이 페인이 좌우에 자리잡고 있는 야구 카드. 스털링 스포츠 옥션 홈페이지


쉐퍼는 계산대로 열심히 2루로 뛰었지만 페인도 눈 뜨고 당할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2루로 공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첫 시도에 실패했다고 주눅 들 쉐퍼가 아니었습니다. 쉐퍼는 화이트삭스 투수 에드 월시(1881~1959)가 다음 공을 던지는 사이 이번에는 1루를 향해 뛰었습니다.


그러자 휴 더피(1866~1954) 화이트삭스 감독이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와 톰 코널리(1870~1961) 구심에게 항의했습니다. 이미 포수 페인이 '쉐퍼에게 아웃을 선언해야 한다'며 항의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홈플레이트 쪽이 시끄러운 틈을 타 쉐퍼는 다시 2루로 뛰었습니다. 이번에는 페인이 참지 못하고 2루로 공을 뿌렸고 쉐퍼는 계획대로 런다운에 걸렸습니다. 3루 주자 밀란은 그 사이 홈플레이트를 노렸지만 결국 태그아웃 당하고 말았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그대로 이닝이 끝나야 하는 상황.


그러나 쉐퍼가 "화이트삭스 선수 10명이 경기장에 있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습니다. 더피 감독이 현역 선수라고 주장했던 것. 실제로 더피 감독은 밀워키(1901년)와 필라델피아(1904~1906년)에서 '플레잉 감독'으로 뛰었던 적이 있습니다.


코널리 심판이 이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이 경기는 결국 워싱턴의 3-2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코널리 심판의 쉐퍼 사랑은 계속됐습니다. 공식 기록원은 이 상황에서 쉐퍼에게 도루를 한 개만 기록했지만 코널리 심판은 경기 후 "쉐퍼는 2루에서 1루로 돌아갈 수 있는 완벽한 권리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아주 틀린 이야기도 아닙니다. 당시에는 야구 규칙 어디에도 '2루 주자가 1루로 뛰면 안 된다'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쉐퍼는 이 빈 틈을 적극적으로 노렸습니다. 그러니까 쉐퍼가 1루를 훔친 게 이날 한 번만이 아니었던 것.


'1루에 살아나가는 23가지 방법' 포스트에 쓴 것처럼 디트로이트 시절 팀 동료였던 데이비 존스(1880~1972)에 따르면 쉐퍼는 1908년 무렵에도 정확히 날짜를 기억할 수 없는 경기에서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1루 도루에 성공한 적이 있습니다. 단, SABR은 이 내용은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1루를 훔치면 안 됩니다. 야구 규칙에 역주 금지 조항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주자가 정규로 베이스를 점유한 뒤 수비를 혼란시키려고 하거나 경기를 희롱할 목적으로 역주하였을 경우 이때 심판원은 즉시 “타임”을 선언하고 그 주자에게 아웃을 선고하여야 한다.

─ 한국야구위원회(KBO) 2019 야구규칙 5.09(10)


대신 가까운 미래에는 타자 주자가 1루 도루에 성공하는 모습은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사무국 의뢰로 각종 실험을 진행 중인 애틀랜틱 리그는 후반기부터 △포수가 포구에 실패했을 때 △볼 카운트에 관계없이 △아웃 당할 위협을 무릅쓰고 △타자 주자가 1루로 뛰어도 좋다는 규칙을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요컨대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을 모든 투구에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과연 이 새 규칙이 메이저리그에 올 때까지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 뒤에는 태평양을 건너 한국 프로야구 규칙도 바꿔 놓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원하시는 팀 이름을 넣으시오)는 과연 이닝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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