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이태 전 토요판 커버스토리 '[토요판 커버스토리]대한민국은 왜 야구에 열광하는가' 마지막 단락에 이렇게 썼습니다.

 

야구에는 '확인사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다. 점수 차가 크게 날 때는 도루를 해서는 안 되고, 홈런을 치고 나서 과도하게 세리머니를 했다가는 빈볼을 감수해야 한다. 

 

야구 규칙에는 '홈런성 타구가 날아가는 새에 맞아 그라운드에 떨어지면 홈런인가 아닌가'처럼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문제도 정답(홈런)이 나와 있다. 하지만 유독 이런 예의에 대해서는 불문율이다. 그저 선수 스스로의 양심이 기준이다. 

 

본질을 따져 보면 야구에서 확인사살을 금지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야구는 공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와야 점수가 나는 가장 인문학적인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제법 멋을 부렸지만 '양심'이 기준이라는 건 언제든 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프로야구에서 불문율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미국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스포츠 전문 매체 '스포팅 뉴스'에서 꼽은 가장 멍청한(dumbest) 불문율 다섯 가지를 한 번 보겠습니다.

 

 

5. 큰 점수차에 도루하지 말아라.

롯데 황재균(28)을 떠올리시는 분이 적지 않을 터. 황재균은 올해 4월 12일 사직 경기서 한화 이동걸(32)이 던진 공에 맞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빈볼이라고 생각했던 공이었죠. 롯데가 7-0으로 앞서던 1회말 황재균이 2루를 훔친 게 발단이었습니다. 10일 경기 때도 역시 한화를 상대로 8-2로 앞선 6회말 2루타를 치고 나간 뒤 3루를 훔친 황재균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점수차'라는 게 사실 모호합니다. 저 4월 10일 사직 경기도 연장 11회까지 가서 10-9 한 점 차이로 끝이 났습니다. 단지 그 순간에 크게 이기고 있었을 뿐인 겁니다. 이 상황에서 점수를 더 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스포팅 뉴스는 번트도 비슷한 관점에서 점수차가 얼마든 괜찮은 플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4. 노히트 노런 상황에서 번트하지 말아라.

이번에는 한화 김경언(33)이 떠오릅니다. 한화는 이달 9일 잠실 경기서 LG 소사(30)에게 8회초 1아웃까지 노히트 노런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그때 타석에 들어선 김경언이 볼카운트 1볼 노스트라이크에서 기습 번트를 시도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은 방망이에 맞지 않은 채 포수 미트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에 대해 스포팅 뉴스는 "상대 투수가 대기록을 세울 수 있게 가만히 도와줘야 하는 게 옳은 일이냐"면서 "1회 노히트 상황에서 번트를 대도 괜찮다면 9회라고 다를 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노히트 노런 중인 투수가 기습 번트로 안타를 내주기 싫다면 번트 대기 어려운 공을 던지면 그만"이라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습니다.

 

 

3. 거만 떨지 말아라.

그러니까 홈런을 쳤다고 방망이를 집어 던지거나 적시타를 쳤을 때 너무 좋아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사실 한국하고 미국이 문화가 많이 다릅니다. 미국에서 배트 던지기(빠던)은 보복을 감수해야 하는 행위지만 한국에서 빠던은 그저 빠던일 뿐이니까요.

 

롯데 최준석(32)은 "방망이 중심에 공이 맞으면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이 나온다. 따로 의식하고 하는 행동은 아니다. 미국에서 뛰더라도 방망이를 던질 것 같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에 사람들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스포팅뉴스 역시 미국프로농구(NBA)나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사례를 들어 같은 주장을 펼쳤습니다.

 

 

2. 보복하라. 반드시 보복하라.

 

이 역시 한국 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 문화가 좀 다른 내용. 상대 투수가 우리 타자에게 빈볼을 던지면 우리도 갚아줘야 하는 게 메이저리그식입니다. 게다가 메이저리그에서는 세 타자 연속 홈런이 나오면 아무 잘못도 없는 그다음 타자가 빈볼을 맞기도 합니다. 심지어 한번 당한 모욕을 잊지 않고 있다가 한참 뒤에 갚아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스포팅 뉴스가 내놓은 해법은 '이기는 게 최고 보복'이라는 것. 저 역시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아, 보복 투구와 관련해 재미있는 건 날씨가 더우면 더울수록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즉각 대응하는 비율도 늘어난다는 점입니다. 날이 더울수록 몸에 맞는 공이 늘어나는데 특히 우리 팀 타자가 몸에 맞았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1. 불문율을 따라라.

스포팅 뉴스는 "불문율은 완전히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야구는 아무 감정도 없는데 사람들은 불문율을 따라야만 야구를 존중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며 "불문율은 그저 '오늘 경기를 못한 건 알지만 그건 모두 네 탓이야'하고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어 "경기를 똑바로 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속임수를 쓰지 말아라', '더티 플레이를 하지 말아라(이것도 주관적이다)'하는 것 말고 도대체 똑바른 방식이라는 게 뭔가. 그런 건 없다"며 "방망이를 던지고 홈런을 오래 응시하라. 기쁘면 기쁨을 만끽하라. 야구는 어차피 놀이다. 왜 재미를 포기해야 하나"고 물었습니다. 

 

 

0. 그래도 불문율을 따라라.

 

야구 규칙에는 분명 "각 팀의 목적은 상대팀보다 많이 득점하여 승리하는 데에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10-0으로 이기고 있어도 10-1로 이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썩 보기 좋지만은 않습니다. 저는 제 응원팀 경기가 열리는 날마다 간절히 승리를 바라지만 그에 못지 않게 명승부도 기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기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다'는 게 야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톰 켈리 전 미네소타 감독(65)은 "불문율이란 최선을 다하되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잊지 않는 것에 대한 내용"이라고 말했습니다. 상대가 나를 존경하지 않으면 명승부가 나올 수 없고, 내가 상대를 존경하지 않으면 상대도 나를 존경할 리 없습니다. 홍성흔(38)이 홈런 후 힘차게 홈플레이트를 즈려 밟는 장면이 두산 팬들을 열광케했을지는 몰라도 장외홈런을 치고도 묵묵하게 고개 숙인 삼성 이승엽(39)이 모든 야구 팬에게 선물한 감동을 이길 수는 없겠죠.

 

사실 야구는 아주 위험한 종목입니다. 시속 150㎞가 넘는 공이 언제든 머리를 향해 날아오고, 슬라이딩 한 번 못 피했다가는 강정호(28·피츠버그)처럼 무릎이 아작나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런 일을 매일 해야 합니다. 또 수비팀 9명이 항상 필드에서 기다리는 동안 공격팀은 많아야 7명이 전부입니다. 문화적 차이는 있겠지만 그 안에서 서로 조심하고 존중하는 게 최선입니다.

 

그게 야구가 가장 인문학적 스포츠인 이유 아닐까요?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근원에 관해 묻는 학문. 그래서 정답이 없습니다. 야구에 양심에 묻는 불문율이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고, 또 그 불문율을 따라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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