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정구 대표팀 장한섭 감독(46·NH농협은행)은 100일 넘게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습니다.
2014 인천 아시아경기 단식 토너먼트가 열린 9월 30일이었습니다.
소속팀 제자이자 대표팀 에이스인 김애경(26)이 8강전에서 오바 아야카(27·일본)와 맞붙어 타이브레이크까지 갔습니다.
또다른 8강전에서도 김보미(24·안성시청·아래 사진 오른쪽)가 치앙완치(31·대만)를 상대로 타이브레이크를 간 상황. 자칫 두 선수 모두 8강에서 떨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다음 날 만난 장 감독은 "정말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옆에 있는 사람한테 '담배 한 대 달라'고 했는데 그게 누구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며 "오늘은 많이 피우라며 누가 두 갑을 주고 갔다"며 웃었습니다.
다행히 두 선수 모두 타이브레이크 끝에 승리를 챙겼고, 4강에서 김애경을 꺾은 김보미가 결국 단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김보미가 공식 경기에서 자타공인 1인자 김애경을 꺾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단식은 4강이 사실상 결승전이나 다름 없습니다.
스포츠 약소국도 메달을 챙겨갈 수 있게 배려하는 '비전 2014' 프로그램 때문입니다. 토너먼트를 둘로 나눠 한 쪽은 아예 약한 선수들을 몰아넣은 것.
그러니 한국 선수가 금메달, 은메달을 나눠 갖는 훈훈한 장면은 없었습니다. 대신 3, 4위전도 없기 때문에 4강에서 패한 선수는 자동으로 동메달을 차지하게 됩니다.
남자 쪽에서도 이변이 벌어졌습니다. 역시 남자 대표팀 에이스 김동훈(25·문경시청)이 4강에서 김형준(24·이천시청·사진 왼쪽)에 패한 겁니다.
김형준은 "결승전 경기가 끝나고 동훈이 형이 먼저 와서 축하해주더라. 동훈이 형한테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연습할 때는 4 대 6 정도로 졌다. 경기 전에 동훈이 형한테 '멋진 경기 하자'고 말하면서 경기가 끝나면 진심으로 형을 축하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욕심을 버리고 경기한 게 도움이 돼 오히려 결과가 반대로 나오지 않았나 싶다"고 덧붙였습니다.
이튿날 열린 혼합복식에서는 김애경이 '정구계 이용대' 김범준(25·문경시청)과 짝을 이뤄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김애경에게 "어젯밤 잘 났냐"고 물었더니 "푹 잘 잤다. 9시 반부터 계속 잤다"고 말하더군요. 김애경은 테니스로 치면 세리나 윌리엄스하고 비교할 수 있는 최정상급 선수지만 유독 아시아경기 금메달하고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이 금메달로 한 풀이에 성공한 겁니다.
김범준도 이날 딸이 태어난 지 100일 되는 날이었는데 큰 선물을 해줬습니다.
2014 인천 아시아경기 정구 남녀 복식 정상을 차지한 주옥, 김애경, 김동훈, 김범준(왼쪽부터)
여자 에이스 김애경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이제 동갑내기 남자 에이스 김동훈이 나설 차례.
(나이는 김애경이 한 살 많지만 김동훈이 '빠른 생일'이라 둘은 사실 동기입니다. 김형준하고 김보미는 동갑인데 김형준이 빠른 생일이라 오빠 대접을 받습니다.)
김동훈은 김범준과 짝을 이뤄 역시 자신의 생애 첫 아시아경기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김동훈은 대회 개막 전 "금메달을 따면 스스로에게 비밀 선물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비밀 선물은 '쌍꺼풀 수술'이었는데 과연?
김애경은 한 걸음 더 앞서 갔습니다. 김애경은 소속 팀에서도 손발을 맞추는 주옥(25)과 여자 복식 정상에 올랐습니다.
7년간 파트너로 뛰며 숱한 기록을 써내려간 두 선수가 일궈낸 이 승리가 '금메달 싹쓸이'로 가는 교두보였습니다.
김애경-주옥은 4년 전 광저우 대회 때도 복식 결승전에서 3-1로 앞서다가 금메달을 놓쳤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영혼의 파트너'가 결국 일을 냈습니다.
한 번 금메달 맛을 본 선수들을 그 누구가 멈출 수 있을까요? 대표팀은 3, 4일 이틀 동안 열린 단체전에서도 남녀팀 모두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러면서 혼합복식 파트너 김범준과 김애경은 모두 3관왕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한국 정구는 2002 부산 대회 이후 12년 만에 금메달 7개를 모두 싹쓸이했고 말입니다.
물론 이렇게 좋은 성적을 내는 데 안방 어드밴티지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구 대표팀은 이번 대회를 케미컬(하드) 코트에서 치르면서 과감히 안방 어드밴티지를 포기했습니다.
클레이 코트에서 치른 부산 대회 때 금메달을 모두 챙긴 반면 케미컬 코트에서 열린 2006 도하, 2010 광저우 때는 금메달을 2개씩만 따낸 걸 감안하면 이례적인 선택입니다.
순위 | 남자 단식 | 여자 단식 | 남자 복식 | 여자 복식 | 혼합 복식 | 남자 단체 | 여자 단체 |
1994 히로시마 | - | - | 금 | 은 | - | 은 | 금 |
1998 방콕 | - | - | 동 | 금 | - | 금 | 금 |
2002 부산 | 금 | 금 | 금 | 금 | 금 | 금 | 금 |
2006 도하 | 동 | - | 은 | 동 | 금 | 동 | 금 |
2010 광저우 | 금 | 은 | 은 | 은 | 금 | 동 | 동 |
2014 인천 | 금 | 금 | 금 | 금 | 금 | 금 | 금 |
김태주 대한정구협회 사무국장은 "이번에도 개최국이라 클레이 코트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구의 세계화 차원에서 케미컬 코트를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대신 91년 만에 동아일보기 전국정구대회를 케미컬 코트에서 치른 것을 비롯해 올해 열린 거의 모든 전국 대회를 케미컬 코트에서 치르며 적응력을 키웠습니다.
남자 대표팀 주인식 감독(51·문경시청)은 "케미컬 코트 적응력을 높이려고 서브와 하프 발리를 집중적으로 연습한 게 주효했다. 다 고생한 선수들 덕분"이라고 우승 소감을 밝혔습니다.
주 감독은 2002 부산 대회 때 대표팀 감독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 감독 지휘봉에서 아시아경기 금메달만 14개가 쏟아진 셈입니다.
대한체육회에 물어보니 '관련 기록이 없다'는 답변. 그래도 '비공식' 최다 메달 지도자로는 분명 손색 없는 성적입니다.
아시아경기가 열리기 전 제 페이스북에 "야구 기사를 쓰면서는 그저 야구를 취재하는 기자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허락해주신다면, 정구에서는 기자 일을 하는 정구인 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 온 마음을 다해 이번 아시아경기 때 정구 대표팀 선전을 기원합니다. 한국 정구야, 흥해라! 흥!"하고 썼습니다.
바람대로 정말 잘해줘고 정말 자랑스러운 우리 정구 대표팀입니다.
정구하고 테니스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인포그래픽으로 확인해 보셔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