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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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야구장에서 본 첫 번째 홈런 기억하시나요? 저는 제 인생 첫 번째 선발투수가 박정현이었다는 건 기억하는데 홈런은 누구였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김경기라고 믿고 싶지만 그 못난이 팀 타자들도 아주 가끔씩은 담장을 넘기곤 했거든요.

그런데 첫 번째 장외홈런은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1994년 김재현이었습니다. 크게 휘두른 방망이에 맞는 순간 곧바로 수원구장 우측 담장 저 멀리 총알처럼 날아가던 라인드라이브 타구.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겁니다.

하일성 해설위원은 그때 곧잘 그런 말을 했습니다. '저 친구는 300홈런을 칠 재목이다.' 그때는 아직 프로야구 최다 홈런 기록이 250개도 안 될 때였습니다. 방망이 끝을 잡고도 원래 다들 그렇게 치는 거라는 듯 씨익 웃던 소년이라면 못할 게 없어 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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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LG 야구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김재현의 야구가 LG 야구라고 믿습니다. 스스로 '서울 도련님'이라는 자만에 빠진 야구가 아니라 '서울 도련님'의 자존심을 지키는 야구. 다른 선택을 앞에 두고도 늘 '김재현이기를' 선택하던 자존심.

그저 야구하는 '오렌지족'처럼 생각하던 김재현은 달리 본 건 1999년 프로야구선수협회 사건이 터졌을 때였습니다. 그때 LG 선수들은 처음부터 선수협에 가입하지 않거나 하루 만에 모두 탈퇴했죠. 팀 동료들이 탈퇴하던 그 순간 김재현은 홀로 가입 신청서를 냈습니다. 그때 김재현은 겨우내 선수협의 '얼굴'로 구단과 맞서 싸웠죠.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이 삼성이나 LG를 응원하지 않는 제게 각별한 이유도 바로 김재현입니다. 큼직한 2루타성 타구를 날리고도 쩔룩이며 1루로 걸어가던 모습에 찡해서 그랬던 건 아닙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팬들을 보고 웃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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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망이를 아주 짧게 쥐었거든요. '아, 정말 치고 싶구나'하는 생각이 TV 화면 멀리 저한테도 느껴졌거든요. '그래, 쳐라. 꼭 쳐라.' 전라도 어느 여관에서 저는 8년 전 봤던 그 타구를 또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슬픈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얼마나 다시 그라운드에 서고 싶어 했는지, 그가 어떤 유니폼을 정말 입고 싶어했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니까요. 그저 이젠 서로에게 상처가 될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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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김재현은 SK 와이번스로 팀을 옮깁니다. 뻔히 답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궁금한 게 있어요. 왜 유지현이 아니라 김재현이 등번호 7번을 달았을까. 왜 그 팀은 그 번호까지 안긴 선수와 끝끝내 그렇게 헤어져야 했을까.

어쩌면 LG 야구가 두려웠던 건지도 모르죠. 그 자유분방한 자존심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모르죠. 끝끝내 '김재현이기를' 드러내는 그 스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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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홈런을 칠 거라던 하일성 이야기는 틀렸고 이제는 여고생이 야구장을 찾아도 "김재현 보러 왔냐"던 때도 지났지만, 앞으로 김재현 같은 선수를 또 볼 수 있을까요? 기록보다 기억에 남는, 자존심 덩어리 진짜 '서울 도련님'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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