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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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그리고 상상력

야구는 어릴 때 할머니 무릎을 베면 들려오던 옛날이야기 같습니다. 참 평온하게 시작하지만 느닷없이 침을 꼴깍 삼키게 되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떨 때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맺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귀신이 밤에 다녀가지 않을까' 잠을 못 이루기도 합니다.

늘 비슷하게 시작하지만 결말이 그때그때 다르던 할머니 이야기를 들을 때처럼 야구를 볼 때도 계속 상상을 하게 됩니다. '이 공 다음에는 어떤 공이 올까.'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어린 소년은 잠들기 전 생각하죠. '내가 프로야구 선수가 되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저는 곧잘 이야기합니다. "야구는 지루한 영혼에게만 지루하다."

제 상상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는 처음 야구장에 갔을 때가 아닌가 싶어요. 예전 글에 그 때 소감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제법 어둑한 땅거미가 깔리고, 경기장 밖에는 이미 여기저기 좌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미 한잔씩 하고 경기장에 들어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비좁은 주차장을 돌고 돌아 자동차를 주차하고, 긴 줄을 기다리며 혹시 매진되지나 않았을까 조마한 마음에 매표소 앞에 섭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받아든 어린이용 야구표. 아버지 뒤를 따라 혹시라도 아버지를 놓칠까 북적대는 사람들 틈으로 바짝 아버지 뒤에 붙어 섭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마침내 조명탑에 불빛이 눈에 들어옵니다. 시야를 압도하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환한 다이아몬드. 경기가 무르익을수록, 하얀 달빛 아래, 야구공은 더더욱 하얗게, 아름답게 뻗어 나갑니다. 아, 내가 정말 야구장에 있구나. 아, 여기가 늘 TV로만 보던 그곳이구나. 저 선수들이 바로 그 선수들이구나.

누군가 타임머신을 만든다면 저는 꼭 부탁할 겁니다. 바로 저 순간으로 다시 데리고 가 달라고 말입니다. 그 계단 아래서 느꼈던 두근거림을 딱 한 번만 더 느낄 수 있다면….

중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야구장에 갈 때 저는 혼자 갔습니다. 대학생이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으로 청소년 표를 사고, 성인 표를 살 때 어쩐지 야구와 둘이만 오롯이 마주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무슨 통과의례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아니, 어쩌면 시간을 그대로 붙잡아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상상하고 싶었으니까요.


"오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

대학 2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일본 도쿄외국어대에서 한 살 많은 나가오 가즈후미 형이 건너왔습니다.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이였지만 야구 이야기를 하다 밤을 새기도 여러 차례였습니다. 형은 고등학교 때 고시엔(甲子園) 본선에 진출했던 얘기를 곧잘 들려줬죠.

형하고 시간이 날 때면 캐치볼도 자주하고 야구장에 같이 가기도 했습니다. 2000년 두산이 LG를 꺾었던 플레이오프 경기 기억나시나요? 두산이 3승 2패로 맞은 5차전, 경기 시작 전 잠실구장에는 ABBA 'Winnter Takes It All'이 비장하게 울렸습니다.

LG 김용수가 9회초 2사까지 4-3 리드를 지켜냈지만 장문석이 안경현에게 동점 홈런을 내주며 4-4 동점이 됐습니다. 경기는 결국 두산 승리로 끝났고 LG 팬이던 선배형하고 '끝까지 김용수를 마운드에 뒀어야 했다'며 또 한 번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상상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제 응원팀 현대 유니콘스는 이미 한국 시리즈에 진출한 상태였으니까요.

가즈후미 형이 또 좋았던 건 한국에 있는 기간만큼은 정말 한국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는 겁니다. 음식도 전혀 가리지 않았죠. 이맘 때였을 거예요. 보신탕을 먹어 보고 싶다고 했던 건. 그리고 맛있게 먹었던 건. 그런데 이 형이 도저히 못 먹는 게 있었습니다. 번데기였죠.

그런데 가즈후미 형이 결국 번데기를 먹게 된 날을 기억합니다. 2000년 7월 11일이었습니다. 그 날 현대 유니콘스가 두산 베어즈를 6-2로 꺾고 한국 시리즈를 차지했죠. 둘이 같이 경기를 보고 나오는데 형이 먼저 그러더군요. "오늘이라면 번데기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소감은 "생각보다 맛있다." 그런데 두 번째 번데기를 건넸을 때는 '배부르다'며 손사래를 치더군요.

제가 응원하는 일본 프로야구 팀은 한신 타이거즈입니다. 사실 이 팀에서 어떤 선수가 뛰었는지도 잘 몰라요. 그래도 2003년 유니콘스가 또 한 번 한국시리즈 타이틀을 차지했을 때 한신 타이거즈도 우승하길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내 응원팀 우승에 번데기를 삼킨 가즈후미 형 응원팀이니까요.


다르다 ≠ 틀리다

제가 야구에서 배운 또 한 가지는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요령'입니다. 야구팬들은 본질적으로 비교에 집착합니다. 많은 부분 이 비교도 상상에서 출발하죠. 최동원이 선동열처럼 보호받았더라면? 장종훈이 타고투저 시대에 뛰었다면 이승엽보다 홈런을 더 많이 쳤다? 정답은 없습니다. 해도 해도 끝이 안 나죠.

어떤 이들은 상대가 정말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며 화를 냅니다. 논리적으로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근거를 대는 이들도 적지 않죠. 그런데 그게 '그 사람의 야구'입니다. 누구도 침범할 권리가 없는 그 사람 영역이죠. 네,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 타자는 김경기입니다. 약체 팀에서 뛰어서 저평가 받았을 뿐이죠.

굳이 '배려'라는 낱말까지는 쓸 필요는 없어도 '수긍'은 가능하다는 것. 내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해도 그 사람이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굳이 야구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로 그럴 수 있다는 것. 저는 이것을 야구를 통해 배웠습니다.

지난 주에 한 축구 해설가가 TV 프로그램에서 "축구는 스포츠고 야구는 게임"이라고 말해 논란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사실 축구 vs 야구 구도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죠. 저는 축구에 무관심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저 말에 크게 발끈하지는 않았습니다. 제 아무리 못난이라도 자기 눈에 예쁜 게 사랑이니까요. 제 눈에는 야구가 더할 나위 없이 예쁘니까요.

제가 니시오카 츠요시가 썼다는 야구론을 좋아하는 건 그런 까닭이죠. ('썼다는'이라고 표현한 건 아무리 검색을 해도 원문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야구는 경기장에서 땀 흘리는 스포츠가 아니라 경기 전에 땀 흘리는 스포츠야.

평범한 2루 땅볼을 완벽하게 처리하려고 땅볼을 몇 천 몇 만 번 잡으면서 땀 흘리고, 외야플라이를 잡을 때 주자 진루를 막으려고 수도 없이 하늘로 뜬 하얀 공을 쳐다보지. 타자가 140km가 넘는 볼을 아무렇지도 않게 치는 건 어릴 때부터 계속 공을 봤기 때문이야.

야구라는 건 힘들어. 안 보이는 곳에서 열심히 해야 하니까. 프로야구 선수들이 TV에도 나오고 옷도 멋지게 입고, 경기 때도 별로 힘들지 않은 것 같으니까 야구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런데 사실 1군 무대에서 꾸준히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려면 엄청난 연습이 필요한 거지.

야구는 보이는 것과는 달라. 축구나 농구만큼 힘들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야구는 결코 놀면서 할 수 있는 스포츠는 분명히 아니야. 땀을 흘리는 것에만 가치를 부여한다면 세계 최소 스포츠는 철인3종 경기가 될 테니까.

그런데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이제 야구를 제대로 봐. 절대 야구가 쉽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줄 거야.

경기 전에 땀 흘리는 스포츠, 정말 멋진 표현 아닌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지만 그래도 이 블로그로 옮기고 나서 100번째 글에 무얼 쓸까 조금 고민했습니다. 이게 그 결론입니다. 얼마 전 제가 마음을 줬던 여자 분께서 "야구가 왜 좋아요?" 하고 물었던 것에 대한 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구가 가르쳐 준 것들이 정말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야구야,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 아니, 다른 이유는 말하지 않을래. 다른 분들도 너무 많이 말씀하셨을 테니까. 그냥, 내가 평생을 살면서 무언갈 이렇게 미치도록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사람이 되게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네게 너무너무 고마워. 그리고 또 고마워. 덕분에 참 많은 것들을 알게 되어서. 꿈을 위해 흘리는 땀의 소중함, 내가 아닌 더 크고 넓은 무엇인가를 위해 내 모든 걸 바치는 헌신, 때로 미칠 듯이 빠져드는 열정, 그리고 수학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내가 그 복잡한 수식과 씨름하게 해준 것도. 그러니까 내가 정말 하기 싫은 일도 너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게끔 내게 큰 사랑과 감동을 주어서 말이야. 정말 너무 고마워. - from "야구야 고마워, 여러분 고맙습니다."

아니, 아직도 야구가 왜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이유를 대라면 더 댈 수도 있지만 사랑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거니까요. 그냥 야구가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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