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06은 박준수의 해


鷄肋 ; 없느니만 못한.

"저 아세요? 제가 누군지 알고 사인 받으세요?" 개인적으로 박준수에 대해 알고 있던 정보는 이게 다였다. 억대연봉신철인 님께서 '05년 1월 20일에 올리셨던 글에 적혔던 내용이다. 그리고 한 해 걸러 1군 무대를 밟았던 기억, '05 시즌이 끝난 후조차 여전히 그는 다음 시즌 현대 투수진 예상 기사에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 정도로 여전히 크게 부각되고 있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주머니 속에 든 송곳은 결국 주머니를 뚫고 나오게 돼 있는 법, 시즌 후반기 그의 활약은 눈이 부셨던 게 사실이다.

‘05 시즌 전까지, 모두 9 2/3이닝 7실점(방어율 6.52), 8삼진, 6볼넷, 피홈런 2. 이게 박준수 선수가 남긴 1군 기록의 전부였다. 이번 시즌 초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6월까지 그가 1군 무대에서 남긴 성적은 9 1/3이닝 12실점(자책 11, 방어율 10.61), 5삼진, 1볼넷, 피홈런 2개가 전부였다. 그리고 피홈런 두 개는 모두 만루홈런이었다. '만루홈런'의 사나이란 씁쓸한 별명을 얻은 채 그는 다시 2군 무대로 내려가야만 했다. 너무도 조용히, 거의 2군행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벌써 프로 7년차, 그렇다고 아마 시절에 초특급 유망주도 아니던 선수. 유일하게 남들에게 알려진 것이라곤 '고려대 킬러'라는 별명뿐이던 '77년生. 어쩌면 그의 선수 생명은 그렇게 끝나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좌완과 옆구리 투수는 그 희소성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지만, 무조건 좌완과 옆구리 투수라 해서 가치가 높은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없느니만 못한 옆구리 투수였다.


捲土重來 ; 흙먼지를 말아 일으키며 돌아오다.

하지만 2달 여만에 다시 1군 마운드에 섰던 8월 18일, 그는 다른 투수가 돼 있었다. 4이닝 무실점, 탈삼진 4, 볼넷 1. 피안타는 1개였고 그마저 단타였다. 한번 탄력이 붙자 거칠 것이 없었다. 32 2/3이닝 8실점(자책 7, 방어율 1.93), 삼진 38개, 볼넷 6개. 상대한 전체 타자의 30%를 삼진으로 돌려세웠고(K/9 10.47), K/BB는 6.33에 달했다. .417이나 되던 출루 허용률이 .242로 급락했다. 같은 수비진을 뒤에 두고 기록한 DER은 .657에서 .734로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만큼 박 선수의 구위 자체가 향상됐던 것이다. 없느니만 못했던 옆구리 투수는 그렇게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보물이 되어 다시 돌아왔다.

사실 전반기에도 K/BB는 5.00이었다. 그만큼 기본적인 제구는 됐다는 소리다. 하지만 순수 장타 허용률이 .195에 달했다. 공에 그만큼 힘이 없었단 뜻이다. 그러나 8월 이후엔 .093으로 상대를 꽁꽁 묶었다. 박 선수의 구위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하는 걸 알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지표가 있다. 삼진은 100% 아웃이고, 내야 플라이 역시 97%가 아웃으로 처리된다. 투수 땅볼 역시 타자가 제대로 공을 때렸다고 보기 힘들다. 6월 이전에는 전체 타자 가운데 14.6%만이 위의 기록으로 물러났다. 반면 8월 이후에는 34.4%였다. 이제는 제대로 공을 맞추기도 힘든 투수로 거듭난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 구위는 좋았는데 제구력이 잡히는 바람에 전혀 다른 투수가 됐다는 것 아니라는 얘기다. 분명 구위 자체가 달라졌다. 그렇다고 새로운 구질을 두달만에 완전히 장착해서 나타났다고 보기도 무리다. 잠깐 황두성이 던지는 게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묵직한 직구, 종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 그리고 준수한 제구력까지. 정말이지 구위가 갑자기 너무도 좋아졌다. (미리내 님께서 줄곧 주장하시는 대로) 아직 완성단계라고 부르긴 어렵지만, 간간히 섞어 던지는 싱커 역시 나쁘지 않았다. 특히 직구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무엇이 그 원인이었을까?


囊中之錐 ; 주머니 속의 송곳.

이제 이건 '숫자의 영역'에서 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부상회복 여부였다. 숫자는 부상에 약하다. 박 선수는 프로에 와서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어깨에 한번, 팔꿈치에 한번. 그 덕에 1군 무대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선보일 기회를 잡지 못했다. 전반기의 부진 역시 재활이 덜 된 상태에서 마운드에 오른 탓이었다.

하지만 원당에서 두 달여 동안 다시 몸을 만들며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옆구리 투수의 필수 무기 싱커 역시 부상을 우려해 삼가고 있는 것이며, 동계 훈련 때 몸을 충분히 만들어 내년 시즌에 본격적으로 던져 보겠다는 전언도 있었다. (유니코니 킬리범 님의 글中)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조웅천 이후 옆구리 투수에 목말라 있을 현대 팬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사실 옆구리 투수가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현대가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선수 생명이 진작에 끊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머니 속에 든 송곳은 언젠가 주머니를 뚫고 밖으로 나오게 돼 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그 끝을 더더욱 날카롭게 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부상으로 인한 시련에서 이제 만개한 만큼 ‘06 시즌에 멋진 활약을 기대해 본다. '05년이 황두성의 해였듯, '06년은 박준수의 해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박준수 선수, 정말 정말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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