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우선 나는 축구로부터 무관심할 자유를 갈구하고 있는 야구팬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여기서 축구란 개별 종목으로서 11명이 그라운드에 상대방 골대를 향해 공을 차는 스포츠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 사용하는 축구는 일방적인 폭력으로서의 문화적 코드 나아가 획일적인 강요를 지칭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와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는 상대를 얼마나 자주 또 많이 할퀴는가.

말하자면 스포츠라는 단순한 '놀이'는 우리 사회 실상에 대해 퍽 많은 점을 보여준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이다. 엘리트 체육, 특정 종목 그러니까 축구에만 편중된 예상 집행과 <우생순>. 우리 사회 문화적 단면은 그렇게 스포츠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2000년 쓰러진 임수혁은 삼성 기름 유출 사고를, 이천 화재 참사를 닮았다. 조금만 더 안전에 신경 썼더라면…. 그 무엇보다 생명이 소중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밑바탕에 깔고 시작했더라면….

하지만 이미 8년째 병상에 누워 있는 임수혁은 말이 없다. 여전히 스포츠 현장 응급 구조 역시 여전히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문제가 생기면 늘 그때뿐인 것 역시 그대로다.

이제 사람들은 임수혁을 잊어 버렸다. 아니, 차라리 그는 잊혀지는 것이 나았다. 이런 식으로 기억될 바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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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임수혁이 이들에게 무엇 잘못을 했는가? 한국 스포츠의 초라한 인프라 아래, 무엇보다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는 당연한 가치조차 훼손당한 채 그렇게 8년째 홈플레이트를 밟지 못한 그에게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인가? 어떤 이유로 이들은 이렇게 존재하지도 않는 원한을 열심히 쏟아내고 있는가?

임수혁이 이들에게 저주받아야 할 핵심적 원인은 무엇인가?

임수혁은 다만 열심히 뛰었을 뿐이다. 자신의 냉정을 다해 사인을 내고, 자신의 열정을 다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의 짜릿한 감동 역시 임수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하지만 임수혁은 말없이 누워 있다. 우리 스포츠 인프라의 초라한 방증으로, 안전 불감증의 슬픈 상징으로, 부산 야구의 슬픈 깃발로…

이천 화재 유가족들 울음에 가슴이 복받쳤다면, 까맣게 썩어 버린 태안 앞바다를 보고 가슴이 아팠다면, 차가운 임수혁의 병상 역시 그만큼 아파야 한다. 단 4분이 갈라놓은 그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애도하며, 현실에 분노해야 한다. 그게 상.식.적.이다.

단지 자기가 좋아하지 않은 종목 선수라고 해서 이렇게 원색적인 표현을 사용할 이유 따위 아무 곳에도 없다. 왜 축구를 일방적 폭력의 비유로 사용하는지 그래도 모르겠는가?

할퀴지 마라. 제발 부탁이다. 할퀴지 마라. 그대들이 누군가의 골을 간절히 바라는 그 순간, 누군가는 그보다 훨씬 더 애타고 간절한 마음으로 임수혁의 홈인을 기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서, 어서, 홈으로 들어오라, 임수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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