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me, baseball is forever entwined with memories of my father. He wasn't home a lot. He was a bomber pilot in the USAF, and was usually off on missions, and when he was home he was never the most approachable person. When there was a ballgame on, though, there was always a spot open next to him in his chair, and for the entire game I would listen as he expounded on the virtues of mastering small ball, the essential strategies of good baserunning, and the constant fallibility of the umpires.
야구는 항상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미 공군 폭격기 조종사였던 아버지는 각종 작전에 참가하느라 자주 집을 떠나 있었다. 어쩌다 집에 들려도 결코 다정다감한 양반은 못 됐던 아버지였지만 야구가 시작되면 사정이 달랐다. 그때는 아버지 옆에 나란히 앉아 아버지 목소리를 들으며 함께 야구를 봤다. 아버지는 스몰볼을 사랑했고 사소한 주루 플레이가 경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도 말씀하시곤 했다. 물론 심판 원망도 끊이지 않았다.
He wasn't a good father. In fact by all standards he was a pretty horrible one. This brilliant, charismatic, handsome, talented man had a side people rarely saw, one where he battled the twin demons of bi-polar disorder and alcoholism. This was the side reserved for his family, and much heartache was the result. Still, despite this, baseball was for me a lighted pathway in which I could briefly connect.
우리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사실 모든 면에서 나쁜 아버지 쪽에 가까웠다. 아버지는 겉보기에 재치가 번뜩이고, 카리스마 넘치고, 잘생기고, 재능있는 남자였지만 남들이 잘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양극성 기분 장애와 알코올 중독. 집안 유전이었는데 이 때문에 심장 발작이 늘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는 내가 아버지와 연결될 수 있는 밝고 따뜻한 통로였다.
That pathway became dimmer over time, and there came a time in my teens that I had had enough of fighting the dark, and I walked away. I guess the reason I pursued psychology was to somehow try and make sense of the things I had seen, and understand the heavy load of pain I carried around like an old suitcase.
시간이 흐르면서 이 통로는 점점 어두워져 갔다. 내가 사춘기가 됐을 때 통로는 어둠으로 가득찼다. 나는 통로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그때 봤던 것들을 이해해 보려고 심리학을 전공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낡은 여행 가방처럼 늘 나를 따라다니는 이 아픔의 무게를 이해하고 싶었다.
I traveled pretty far. Some might even say I ran. I never really escaped, though. And whenever I entered a ballpark, whenever the subject of baseball surfaced, so did my memories of my dad. My love of one thing was deeply tied to my hate of another.
그 이후 나는 아버지로부터 꽤 멀리 떠나 왔다. 어떤 이들은 내가 달아난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결코 도망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야구장에 갈 때마다 야구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렸다. 내 야구 사랑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깊게 연결돼 있었다.
Ten years ago I received a phone call. My dad had a spinal cord tumor, c-5. That means it was high in his neck. They were going to operate, but didn't hold out a lot of hope. I flew home.
10년 전 전화 한통을 받았다. 아버지 척추에 문제가 생겼다고 알리는 전화였다. 수술은 하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라는 내용, 나는 집으로 향했다.
He survived the surgery, but this great intimidating magnificent man was now paralysed from the neck down. To be honest I thought he would never be able to cope with the loss.
그때 아버지는 목 아래 몸 전체가 마비됐다. 그 당당하고 무섭던 양반이 침대에 누워 살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아버지가 시련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He surprised me though. I had forgotten what a stubborn old codger he was, and he held on despite prophesies to the contrary. There was a problem, though, after a few months there was no nursing service on earth that would care for the man no matter what money was offered. So, I took a leave of absense to care for him.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아버지는 나를 놀래켰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얼마나 고집센 양반이었는지 잊고 지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문제였다. 도무지 간병인을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돈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였다. 결국 내가 휴직하고 아버지 병 간호를 맡는 수밖에 없었다.
It was really hard. He ranted and cursed at me. He was so angry. I just walled it all off, turned a deaf ear, and did what needed to be done. I changed his diapers, massaged his legs, bathed him and dressed him. And I thought he hated me for it.
병간호는 정말 힘들었다. 아버지는 몹시 화가 난 상태로 폭언과 욕설을 일삼았다. 난 귀를 막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했을 뿐이다. 계속 귀저기를 갈고 다리를 주물렀다. 아버지를 씻기고 새 옷을 입히는 것 역시 내 몫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The only peace I got was when a ballgame was on. I would turn it on the telly and a look of happiness would come onto his face, and again after all these years, I found a small lighted path through which I could safely meet my dad.
야구 경기를 시청할 때만 평화가 찾아왔다. 야구 경기를 틀어 놓으면 아버지 얼굴에 행복감이 번지는 것 같았다. 몇 년간 이 생활을 반복하면서 다시 아버지와 연결되는 통로를 찾을 수 있었다.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는 통로 말이다.
One day, after a few months of his ranting and raving, I turned on the game. We settled down to watch the Braves do their magic. Then I happened to look at my dad and see something I never thought I would see: tears. I asked him was he in pain, he said no. After a while he asked me a question.
또 한 바탕 야단법석을 치른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TV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대역전극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심결에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전혀 뜻밖의 것을 봤다. 눈물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어디가 불편하시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버지가 물었다.
'How can you even be here?' he asked. 'Of all my children you are the one who should hate me the most, so why are you here?'
"왜 네가 온 거냐? 형제들 가운데 네가 가장 나를 싫어했잖아. 그런데 왜 네가?"
Then he said the one thing I thought I would never hear, and that he was incapable of even feeling: 'I am so sorry. I am just so sorry for what I did.'
곧 아버지는 평생 아버지께 듣지 못할 것 같은 말씀을 했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잘못했구나." 사실 나는 아버지가 이런 감정을 느낄 줄 모르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Here was the man who had dominated and oppressed and frightened me so much of my life, as helpless as a baby, crying. And I realised that I no longer needed to carry that old suitcase any more. All it was doing was tiring me out, and it belonged to a life I didn't lead anymore.
압도적일 만큼 무서웠던 사내, 내 인생 긴 시간 동안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던 남자가 어린 아이처럼 가엾이 울며 누워 있었다. 그 순간 이제는 더 이상 낡은 여행 가방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태 내 태도는 나 스스로를 소모시키는 선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낡은 여행 가방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I assured him that I loved him, and that I knew he did the best he could with what he had to work with. He looked so relieved. Then, we went back to the game.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다. 그 말씀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안도하신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야구 경기로 시선을 돌렸다.
Its hard to believe such a small moment could have such a huge impact. I felt so free. I never realised that all that stuff I was carrying around wasn't doing anything but hurting me. I slept better, I felt happier, and bit by bit I put the past to rest.
이 순간이 우리 부자에게 너무 큰 영향을 끼쳤다. 여태껏 나를 짓누르던 체증이 모두 가라앉은 것 같았다. 나는 참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도 더 편하게 잘 수 있었고, 좀더 행복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씩 조심씩 나는 과거를 놓아줄 수 있었다.
A lot of people carry baggage from childhood. I hear it all the time, from all kinds of people in all walks of life. There is almost a fear of letting go of the hurts, as if holding on tightly is a talisman against pain in the future. Our minds tell us this doesn't make sense, but our hearts think differently. Holding on to my pain didn't protect me, though. In fact it just blinded me to the warning signs of new pains up ahead. I stumbled into a lot of it because I was so concerned with lugging around the old.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들린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살이에서 보호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머리로는 잘못됐다 걸 알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게 나를 보호해 주지는 못했다. 거꾸로 과거의 상처 때문에 당장 눈 앞에 찾아온 위험신호를 보지 못한 일이 더 많았다. 내가 상처라는 돌부리 걸려 곧잘 넘어졌던 건 과거의 상처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Today my dad and I still talk, and baseball is a much richer experience for me free from the past. In a way, baseball gave me back my dad. It also gave me back to myself. I am forever greatful.
오늘도 아버지와 나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야구는 나를 과거로부터 놓아준 아주 값진 경험이 됐다. 야구는 내게 아버지를 돌려줬다. 또 내 자신을 돌려주기도 했다. 나는 영원히 야구를 고마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