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도원야구장 앞길에서라도 우연히 만난다면 무심코 "미안하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그래서 "누구신가?" 하는 황당한 표정이 돌아오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사인을 한 장 부탁하게 될 것 같은 내 마음의 에이스 최창호. 그래서 가끔 오랜만에 메이저리그로 복귀한 박찬호가 다시 된통 얻어맞다 내려갔다거나 하는 씁쓸한 복귀 소식 뒤끝에 이유 없이 종종 떠오르는 그 이름. 뜬금없지만, 고백하건대 사실 나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팀 돌핀스의 유민 중 한 사람이다. -p.159

언젠가부터 야구를 좋아한다는 말은 좀 촌스러운 표현이 됐다.

야구 응원팀을 묻는 설문조사는 '응원팀 없음'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미국에서도 '야구는 20세기의 스포츠'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어쩌면 나는 그 촌스러움을 부정하고 싶어서 '숫자의 추억'에 빠지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잘 모르는 이상한 숫자를 가지고, 어떻게 읽는지도 잘 모르는 그래프를 그린 다음 "그건 당신이 무식해서 모르는 거야. 봐, 이렇게 '세련된 방식'으로 야구를 즐길 수 있다고!" 이렇게 헛된 외침을 허공에 지르고 싶었던 모양.

하지만 나는 김은식 씨가 지극히 '촌스럽게' 써내려간 문장 앞에 곧잘 우두커니 멈추어 서고는 했다.

내가 온갖 숫자를 들먹이며 '추억을 팔자'고 외칠 때 묵묵히 '추억을 살고 있는' 김은식 씨의 문장은 그렇게 내 눈물을 찔끔 짜고는 했다.

그렇다. 김은식 씨의 글은 언제나 "인간에 대한 예의"로 가득 차 있다.

'가루가 될 때까지 까여도' 좋을 플레이를 따뜻하게 감싸는 배려, 누군가의 진정성을 받아들이는 '솔직한' 포장.

그래서 나는 김은식 씨를 "야구 인문학자"라고 칭한다.

야구를 가지고 삶을 아파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그래서 '야구 글'을 가지고 "정말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김은식 씨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미 읽은 적이 있는 글들, 그리고 미처 접하지 못했던 글들이 모여 있는 이번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역시나 미안함에 시달렸다. 어쩐지 '베이스볼 보이'의 의무를 떠넘긴 것만 같은 막연한 미안함.

김은식 씨 글이 이렇게 '잘 읽히는 것'은 사실 나처럼 의무를 포기한 이들의 미안한 때문은 아닐까.

노장을 영웅으로 만들 권리를 찾아 목소리를 높이고, 야구가 너무도 고맙던 그 시절을 잊어가는 듯한 미안함.

그렇게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어린 날의 역사와 도리를 잊어가는 많은 '베이스볼 보이'.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고 내 휴대전화에 '야구인'으로 저장된 이들과 함께 동이 틀 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맞다. 내 마음 한 켠에서는 아직도 가끔 1996년 한국 시리즈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정명원의 포효가 들리고, 1992년 김홍집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흘렸던 서러운 울음이 사무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야구라는 소실점 하나로 모였던 그 때가 사무치게 그립다. 영원히 '베이스볼 보이'로 살 줄 알았던 그 때의 내게 정말 너무도 미안하다. 내가 숫자로 함부로 평하는 선수들에게도.

때로 사람들은 야구 선수 또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는다. 그래서 세상 사람 모두가 알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면 '선수도 아니라는' 철없는 생각도 가끔 한다. 그들 중 누구도 세계 최고의 샐러리맨, 세계 최고의 학생이거나 세계 최고의 주부로서 번듯한 기록하나 세워놓지 못했음에도, 저마다 글로 풀자면 책 몇 권을 써도 부족한 감동과 희열과 분노를 품은 귀한 삶들이라는 사실을 가끔 잊는다. -p.208~p.209

김은식 씨, 언제 '홈런 슈퍼' 앞에서 소주 한 잔 하시죠?

+
좋은 책을 선물해 주신 서영호 사장님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댓글, 10

  •  댓글  수정/삭제 기다림미학
    2008.06.09 03:50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어린 날의 역사와 도리를 잊어가는 많은 '베이스볼 보이'

    이 한줄의 문구가 '그건 너잖아' 라는 물음과 함께 머릿속을 맴도네요......짧은 포스트지만 잠시 멍해졌습니다....


    작년에 목동문고에 다른 책을 사러갔다가 우연히 김은식님 책을 발견하고 그대로 서점 책꽂이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단숨에 읽어내려갔던 기억이 나네요,,,이번에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이번에는 구입해서 말입니다..

    •  수정/삭제 kini
      2008.06.09 10:57 신고

      원래 퍽 긴 리뷰를 쓰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10매 짜리 기사가 잡히는 바람에 글이 팍 줄었습니다. 사실 10매라고 해봤자 A4 1장 정도밖에 안 되는데 요즘엔 긴 글 쓰는 게 참 힘이 드네요 ㅠㅠ

      예전에는 하고 싶은 말을 주저리 주저리 쓰면 됐지만 이 직업은 그렇게 썼다가는 ㄷㄷㄷ

      사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 영원한 '베이스볼 보이'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듭니다.

      그렇다고 직장 옮길 용기도 없으면서 말이죠 ㅡ,.ㅡ


      그나저나 혹시 최민규 기자님 안 뵙고 싶으십니까? The Book이 필요하시다는데 제가 전달해 드릴 시간이 없어서요 -_-;;

    •  수정/삭제 기다림미학
      2008.06.09 14:15

      음..블로그 댓글멘트로 그냥 한번 해보신 말씀이신지 아닌지 몰라서...;;
      그런데 개인적인 사정때문에 제가 시간이 들쭉날쭉 불규칙하거든요..
      다만 요즘 남부지법을 비롯해 각종은행이나 우체국 그외 금융관련하여 본의아니게 출두(?)를 빈번하게 하다보니,,,
      남부지법에 가게되거나(남부지법은 내일 가야하는..-_-;;)
      우체국에 가게되면(우체국은 아직 오라는 연락이 안왔네요;;;아마 이번주 금이나 담주 초쯤에 한번쯤은 갈듯...) 겸사해서 부쳐드릴수는 있을것 같아요...

    •  수정/삭제 kini
      2008.06.09 20:07 신고

      이 얘기는 이미 istat에서 끝 ^^;

  •  댓글  수정/삭제 김은식
    2008.06.09 23:32

    홈런슈퍼앞 소주 한 잔 ... '콜'입니다.

    그나저나 가끔 눈팅만 했던 팬이었는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분명히 회원가입 등등 해야 댓글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댓글이 써지는군요.

    미처 기대 못했던 과분한 서평 읽고 황송해하고 있습니다.
    소주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김은식.

    •  수정/삭제 kini
      2008.06.10 13:12 신고

      이거 본인이 직접 찾아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직접 오실 줄 알았으면 진지하고 차분하게 쓰는 건데 너무 단촐하게 적어 내려간 건 아닌가 부끄럽습니다.

      소주잔 기울이며 야구 이야기 신나게 나눌 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댓글  수정/삭제 닥슈나이더
    2008.06.10 13:18

    여기서도 웹 2.0을 느끼게 되는군요....

    •  수정/삭제 kini
      2008.06.10 19:20 신고

      본인이 직접 남겨주실 줄 알았으면 좀더 잘 쓸 걸 후회하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인터넷 세상입니다 ^^

  •  댓글  수정/삭제
    2008.06.25 16:51

    비밀댓글입니다

    •  수정/삭제 kini
      2008.06.27 12:36 신고

      가끔 그렇게 나온다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시스템 자체의 버그인 듯 합니다.

      술 한 잔 할 기회 꼭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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