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지 못하면 잘릴 것이다. 이긴다면 잘릴 날을 좀 더 미룬 것뿐."
메이저리그 네 개 팀에서 감독을 지낸 리오 더로셔(1905~1991)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로셔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는 표현 중에 제일 유명한 건 사실 "사람 좋은 꼴찌"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로셔는 감독은 어차피 잘릴 운명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네, 감독을 자르는 건 어디까지 구단 (높으신 분) 마음입니다.
그래도 프로배구 여자부 IBK기업은행에서 사람 좋기로 소문 난 서남원(54) 감독을 자르기로 한 건 좀 황당합니다.
IBK기업은행은 '공식 입장문'을 통해 "팀 내 불화, 성적 부진 등 최근 사태의 책임을 물어 서 감독과 윤재섭 단장을 경질하기로 했다"고 21일 발표했습니다.
일단 이번 시즌 V리그 9경기에서 1승밖에 따지 못했으니 성적 부진인 건 확실합니다.
그런데 부임 후 한 시즌도 지나지 않은 감독을 잘라야 할 정도로 팀 내 불화가 심각했다면 상대 쪽도 이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게 맞지 않나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불화(不和)는 '서로 화합하지 못함. 또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함'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서로'입니다.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해석하자면 IBK기업은행 발표는 서 감독과 (내년 1월이 정년인) 윤 단장이 서로 화합하지 못했다는 뜻이 됩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실제로 불화를 일으킨 장본인은 주전 세터이자 팀 주장인 조송화(28)입니다.
적어도 조송화가 무단으로 팀 숙소를 떠나면서 '팀 내 불화'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IBK기업은행은 그냥 이날 "이에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발표했을 뿐입니다.
서 감독과 조송화가 사이가 나빴다는 건 TV 중계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서 감독은 12일 대전 방문 경기에서 1세트 시작과 함께 0-3으로 끌려가자 작전 타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조송화에게 "웬만하면 (오버핸드로) 토스해. 왜 자꾸 언더 (패스) 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조송화는 감독을 쳐다 보지도 않은 채 "실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조송화는 이 작전 타임 바로 직전에 언더 패스로 외국인 선수 라셈(24·미국)에게 공을 띄운 상태였습니다.
물론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아 숙소를 떠난 선수가 조송화가 처음은 아닙니다.
그런데 두 번을, 그것도 연달아, 팀을 떠나는 건 확실히 보기 드문 케이스입니다.
일단 조송화는 '배구를 그만두겠다'고 밝히고 있는데 IBK기업은행에서는 '돌아오라'며 설득을 하고 있는 상황.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연히 보통 직장인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조송화는 지난 시즌에도 IBK기업은행 내분설 중심에 섰던 인물입니다.
지난 시즌 IBK기업은행 주전급 선수들이 김우재(55) 감독을 비토했던 건 공공연한 비밀.
조송화는 심지어 '나? or 감독?' 모드였다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에 IBK기업은행은 '시즌 끝나고 감독 자를 테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선수들을 설득했습니다.
'우리 팀에서는 선수가 감독보다 한 수 위'이라는 걸 구단에서 몸소 증명해 보인 겁니다.
사실 IBK기업은행은 새 감독 선임 과정에서도 잡음을 일으켰습니다.
이미 다른 팀을 맡고 있던 A 감독이 '원래 구단과 재계약하기로 했다'는 뜻을 밝혔는데도 '얼굴이나 보자'면서 면접을 진행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 팀에서 IBK기업은행을 강아지, 송아지라고 부른 게 당연한 일.
이에 A 감독이 자기 대신 추천한 인물이 바로 서 감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IBK기업은행에서 서 감독을 서둘러 경질한 건 서 감독 본인뿐 아니라 이 A 감독에게도 '빅 엿'을 선물하는 행위였던 겁니다.
사정이 이러니 IBK기업은행이 역시 팀을 떠났다가 돌아온 김사니(40) 코치를 감싸는 모습을 곱게 봐주기가 힘듭니다.
IBK기업은행은 "(김 코치) 사의를 반려하고 팀의 정상화를 위해 힘써달라고 당부했다"고 밝혔습니다.
사실상 감독 대행을 맡기겠다는 뜻으로 풀이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감독 대행을 맡을 사람도 없습니다. 시즌 개막 전 서 감독과 함께 IBK기업은행에 부임했던 조완기 수석코치는 김 코치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팀을 떠난 상태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시즌이 끝나고 김 감독을 잘랐을 때 그냥 김 코치에게 지휘봉을 맡기면 됐을 텐데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을까요?
세상에 내분이 없는 팀은 없습니다. 심지어 세계 정상을 호령하는 한국 양궁 대표팀도 한 때 심각한 팀워크 위기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요컨대 내분 없는 팀이 성공하는 게 아니라 내분을 잘 관리하는 팀이 성공하게 마련입니다.
김성근(79) 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감독 고문은 이를 "아마추어는 한 팀이 되어서 이기지만 프로는 이기면서 한 팀이 된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IBK기업은행은 너무 서둘러서 그리고 너무 자주 한 쪽 손만 들어줬습니다. 정작 책임져야 할 손은 비겁하게 외면한 채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