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1952 헬싱키, 1956 멜버른 올림픽 근대5종 남자 개인전 금메달리스트 라스 할(왼쪽).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

라스 할(1927~1991·스웨덴)은 올림픽 근대5종 역사에서 있어 가장 기념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은 1952 헬싱키 대회 때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올림픽 근대5종 챔피언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올림픽 근대5종 챔피언이 전부 군인이었던 겁니다.

 

할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1956 멜버른 대회 때는 올림픽 근대5종 역사상 처음으로 2연패 기록까지 남겼습니다.

 

1912 스톡홀름 근대5종 우승자 예스타 릴리에회크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있는 당시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

근대5종이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건 1912 스톡홀름 대회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올림픽 개최국은 자국 선수 메달 획득이 유력한 종목을 정식 종목에 넣고 싶어 하게 마련.

 

근대5종 첫 금메달을 차지한 건 개최곡 스톡홀름 스웨덴 육군 장교였던 예스타 릴리에회크(1884~1974)였습니다.

 

이후 1948 런던 대회 챔피언 윌리엄 그루트(1914~2012)까지 올림픽 근대5종 금메달리스트 7명 가운데 6명이 스웨덴 장교였습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그러니까 나치 선전 무대였던 1936 베를린 대회가 유일한 예외 케이스.

 

이 때는 독일 공군 장교 고트하르트 핸드릭(1908~1978)이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나중에 미 육군 대장이 되는 조지 패튼(1885~1945)은 1912 스톡홀름 올림픽 때는 미국 근대5종 대표였습니다. 미 육군 제공

1948 런던 대회 때까지 올림픽 근대5종 메달리스트가 전부 현역 군인이었던 건 참가 선수 전원이 현역 군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근대5종은 원래 군인 조금 더 정확하게는 기병(cavalry)을 위한 스포츠였던 겁니다.

 

근대 올림픽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1863~1937) 남작은 고대 그리스 시절 군인들이 무예를 겨루던 (고대) 5종 경기를 부활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올림픽 개최국 스웨덴은 기병대로 유명한 나라.

 

그래서 기병 훈련 프로그램에 있던 펜싱(에페), 수영(200m 자유형), 승마(장애물), 사격, 크리스컨트리 달리기를 한 데 묶어 근대5종이 탄생하게 됐습니다.

 

(참고로 2009년부터는 사격과 크리스컨트리를 따로 따로 치르지 않고 '레이저 런'이라는 종목으로 묶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 출전한 스웨덴 대표 구스타프 레벤하우프트(1884~1935)가 애마 '메두사'를 타고 장애물 경기를 소화하는 장면. 레벤하우프트는 이 대회 근대5종과 승마에 모두 참가했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

사실 올림픽에는 기병용 종목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네, 승마입니다.

 

승마 역시 근대5종과 마찬가지로 1912 스톡홀름 대회 때부터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됐습니다.

 

그리고 역시 근대5종과 마찬가지로 1948 런던 대회 때까지는 현역 기병만 군마(軍馬)를 타고 참가하는 종목이었습니다.

 

1912년에는 근대5종 선수도 승마 선수처럼 평소에 자기가 타던 말을 타고 경기에 참가했습니다.

 

이 두 종목에서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었던 쿠베르탱 남작은 "근대5종 경기는 말을 길들이는 능력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음 올림픽이었던 1920 안트베르펀 대회 때부터 근대5종 선수는 말을 '랜덤으로' 배정받게 됐습니다.

 

현재 근대5종 선수는 경기 시작 20분 전에 자신이 타게 될 말과 첫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2020 도쿄(東京) 올림픽 홈페이지 캡처

이러면 당연히 말이 '로또'가 됩니다.

 

심지어 2020 도쿄(東京) 올림픽 종목 소개 페이지도 '상식 퀴즈'라면서 이 내용을 소개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올림픽 때마다 말이 논란이었던 겁니다.

 

2004 아테네 대회 때는 한국 대표로 출전했던 한도령(45)은 말이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번 도쿄 대회 때는 2006년생 거세마 '세인트 보이'가 논란 중심에 섰습니다.

 

장애물 앞에서 멈춰 서고 마는 세인트 보이. 도쿄=로이터 뉴스1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 4위를 차지했던 독일 대표 아니카 슐로이(31)는 '펜싱 + 수영' 중간 순위에서 올림픽 기록을 세우면서 메달 전망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6일(이하 현지시간)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승마 경기 때 세인트 보이를 배정받은 게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첫 점프 때 장애물을 뛰어 넘는 데 실패한 세인트 보이는 끝까지 말을 듣지 않은 채 경기장을 이리저리 배회하기만 했습니다.

 

슐로이는 승마에서 실격 처분을 받으면서 결국 최하위(31위)로 대회를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세인트 보이가 말을 듣지 않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니카 슐로이. 도쿄=타스

더 큰 문제는 이 과정에서 킴 라이너스(49) 코치가 세인트 보이를 주먹으로 때렸다는 겁니다.

 

TV 중계 화면을 분석해 폭행 사실을 파악한 국제근대5종연맹(UIPM)은 라이스너 코치에게 이번 올림픽 기간 출장 정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근대5종 경기에 쓰는 말은 분명 살아 있는 생명인데다 누군가의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니까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게 당연한 일.

 

그래도 말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이를 바로잡을 방법이 없다면 선수는 그냥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세인트 보이를 타고 승마 경기에 참가 중인 굴나즈 구바이둘리나. 도쿄=타스

게다가 세인트 보이가 경기를 망친 선수가 슐로이 한 명이 아닙니다.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 대표 굴나즈 구바이둘리나(29)도 '뽑기 실패'로 세인트 보이를 만나 경기를 끝까지 치르지 못하는 바람에 실격 처분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에 UIPM은 실무단을 구성해 승무 종목 전반에 대한 검토 작업에 들어가겠다고 12일 발표했습니다.

 

클라우스 쇼만(75) UIPM 회장은 "승마는 쿠베르탱 남작이 남겨준 근대5종 경기의 필수적인 요소"라면서 "승마 경기를 더 안전하게 츠를 수 있도록 모든 이해당사자와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UIPM은 내년부터 근대5종 모든 경기를 90분 안에 마무리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손질한다는 계획입니다.

 

이에 따라 승마 경기도 장애물 높이를 낮추고 점프 횟수도 줄이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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