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섬주생강남(死萸暹走生江南)'.
죽은 한유섬(32·개명 전 한동민)이 산 유강남(29)을 홀렸습니다.
그 덕에 '추추 트레인' 추신수(39)는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끝내기 산보(散步)'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방문 팀 LG와 안방 팀 SSG가 맞대결을 벌인 21일 인천 문학구장.
4-5로 뒤진 채 9회말 공격을 시작한 SSG는 1사 만루에서 박성한(23)이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내면서 5-5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다음 타자 이재원(33)은 땅볼을 쳤고 LG 3루수 문보경(21)이 이 공을 잡아 일단 3루를 밟았습니다.
SSG 2루 주자 한유섬을 잡아내면서 2아웃 상황이 된 것.
이런 상황에서 3루수는 1루로 던져 타자 주자를 잡아내는 게 일반적이지만 문보경을 홈을 선택했습니다.
런다운에 걸린 SSG 3루 주자 추신수를 잡아내면 그대로 이닝을 끝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제는 LG 포수 유강남이 3루 커버를 들어온 유격수 손호영(27)에게 공을 던는 대신 뒤만 졸졸 쫓다가 결국 3루에서 추신수를 살려주고 말았다는 것.
공교롭게도 이때 한유섬이 자신이 아웃 당한 사실을 몰랐는지 3루를 밟고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자 두 명이 동시에 베이스 하나를 밟고 있을 때는 야구 규칙 5.06(a)(2)에 따라 앞선 주자에게 점유권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추신수가 앞선 주자에 해당하니까 만약 한유섬이 살아 있는 주자였다면 2루로 돌아가야 아웃을 피할 수 있던 겁니다.
단, 한유섬은 이미 아웃을 당한 상태라 여기서는 2루로 돌아가는 게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유강남이 쫓아오자 한유섬 갑자기 2루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LG 수비 쪽 관심에서 멀어진 사이 추신수는 다시 홈을 향해 뛰었습니다.
유강남이 추신수를 발견한 건 추신수가 홈을 향해 10걸음도 걷기 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충분히 런다운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유강남은 홈이 아니라 3루 옆에 있던 손호영에게 공을 던집니다.
그 사이 추신수가 여유 있게 걸어 홈 플레이트를 밟으면서 그대로 경기가 끝났습니다.
이 경기 공식 기록은 '끝내기 실책'입니다.
이 장면에서 그 누구도 공을 잘못 던지거나 떨어뜨린 적이 없는데 실책으로 기록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런 실책이 가장 흔한 건 사실이지만 야구 규칙 9.12에 따르면 실책은 "수비행위가 공격팀을 유리하게 만든 경우 해당 야수에게 부과되는 통계"입니다.
그리고 야구 규칙 9.12(a)(C)는 분명 이런 상황에서도 실책을 기록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9.12(a)(C) 야수가 땅볼을 잡거나 송구를 받아 주자를 포스 아웃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으나 주자 또는 베이스에 태그 하지 못하여 주자를 살려 주었을 때 그 야수에게 실책을 기록한다.
[주] 포스 플레이에 의해 아웃이 되는 경우뿐 아니라 태그 아웃이 되는 경우도 야수가 주자에게 태그하면 충분히 아웃시킬 수 있었으나 태그하지 못하여 주자를 살려 주었을 때도 그 야수에게 실책을 기록한다.
그러면 이 실책은 LG 선수 가운데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가장 잘못한 선수로 유강남을 꼽으시는 분이 많으실 것 같지만 실제 기록은 유격수 실책입니다.
추신수가 득점하는 순간 공을 들고 있던 게 LG 유격수 손호영이었기 때문입니다.
손호영이 홈으로 공을 던졌더라면 아웃시키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고 기록원이 판단한 겁니다.
손호영은 억울할 수도 있지만 야구 규칙은 "주자의 진루는 반드시 그 원인이 규명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미 아웃을 당한 한유섬이 LG 수비를 방해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아웃된 주자의 방해행위'를 다룬 야구 규칙 6.01(a)(5)를 읽어 보면 한유섬이 수비 방해를 저지른 게 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6.01(a)(5) 아웃이 선고된 직후의 타자 또는 주자가 다른 주자에 대한 야수의 플레이를 저지하거나 방해하였을 경우 그 주자는 동료선수가 상대 수비를 방해한 것에 의하여 아웃이 된다. (5.09(a)(13) 참조)
이 조항에서 참조하라는 5.09(a)(13)은 이런 내용입니다.
5.09(a)(13) 야수가 플레이를 완수하기 위하여 송구를 받으려고 하거나 송구하려는 것을 전위주자가 고의로 방해하였다고 심판원이 인정하였을 경우 (아웃이다.)
[원주] 이 규칙은 공격팀 선수의 용납할 수 없는 비신사적 행위에 대한 벌칙으로 정한 것으로서, 주자가 베이스에 닿으려는 게 아니라 더블 플레이의 피벗맨을 방해하려고 명백히 베이스 라인으로부터 떨어져서 달렸을 때와 같은 경우에 적용되는 것이다. 이 규칙 적용은 심판원의 판단에 따른다(피벗맨은 4-6-3일 때는 유격수, 6-4-3일 때는 2루수에 해당한다).
[주] 전위주자의 방해행위에 대한 조치는 이 항에 규정되어 있지 않으나, 5.09⒝⑶과 같이 방해행위를 저지른 주자를 아웃시키는 것은 물론 타자까지 아웃시키는 규정이므로 난폭한 행위를 막기 위한 조항이다. 이미 아웃된 주자의 방해행위에 대하여는 6.01⒜⑸에 규정되어 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하는 표현은 '심판원의 판단에 따른다' 그리고 '난폭한 행위를 막기 위한 조항' 두 가지입니다.
6.01(a)(5)에 [예]가 붙어 있는 게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 무사 만루, 타자가 유격수 앞 땅볼을 쳐서 3루 주자가 홈에서 포스 아웃되었다. 이때 포수가 다시 3루로 송구하여 더블 플레이를 하려는 것을 포스 아웃된 3루 주자가 떠밀어서 방해하였다. → 그 주자와 3루로 향하던 주자는 아웃이 되며 타자에게 1루가 주어지므로 1루 주자는 2루로 가는 것이 허용된다.
한유섬이 이렇게 난폭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같은 조항 [원주]를 이 상황에 적용하는 게 맞을 겁니다.
[원주] 타자 또는 주자가 아웃된 후 계속 뛰더라도 그 행위만으로는 야수를 혼란시키거나 방해하거나 가로막았다고 보지 않는다.
방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말씀드리는 것처럼 야구 규칙에 수비 방해가 존재하는 건 기본적으로 '부당 이득 환수'가 목적입니다.
따라서 공격 팀에서 부당 이득을 취한 게 아니라 수비 팀에서 본헤드 플레이를 저질렀다고 심판이 판단한다면 수비 방해를 선언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근거로 쓰라고 이 [원주]가 야구 규칙에 존재하고 있을 겁니다.
야구 규칙을 '각 잡고' 읽어 보신 분은 누구나 아실 것처럼 야구 규칙은 조항 그 자체보다 [원주]가 더욱 중요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중계를 보면 양 팀 선수, 캐스터, 해설위원 모두 이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느낌인데 심판진이 그래도 '정신 줄'을 잡고 있어서 참 다행인 결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