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불꽃 남자' 현대캐피탈 박주형(오른쪽).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지금 배구 IQ로 따지면 멘사 수준이에요.


8일 프로배구 남자부 천안 경기를 중계하던 윤성호 SBS스포츠 아나운서는 현대캐피탈 박주형(33)이 득점에 성공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주형은 2단 공격 상황에서 KB손해보험 박진우(30)가 단독 블로킹을 시도하자 아예 그의 손에 대고 공을 네트 옆으로 쳐내 버렸습니다.


상대 블로킹을 이용해 득점을 올린 박주형. SBS스포츠 중계화면 캡처


배구에서 블로킹은 원래 공격을 가로 막는 벽이지만 이렇게 잘만 이용하면 득점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박주형이 이렇게 '쳐내기 공격'에 성공하는 모습이 그렇게 자주 나오지는 않습니다.


박주형은 10일 현재까지 공격(스파이크)으로 총 136점을 올렸는데 그 가운데 39.7%인 54점이 '쳐내기 득점'이었습니다.


이는 이번 시즌 공격을 100개 이상 시도한 남자부 선수 가운데 26위에 해당하는 성적입니다.


이 부문 1위 삼성화재 박철우(35)는 전체 공격 득점 316점 가운데 60.8%(192점)가 코트 바닥에 떨어지기 전 상대 블로커 손에 먼저 닿았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상위 10명 가운데 KB손해보험이 4명으로 제일 많고 이어서 △삼성화재 3명 △한국전력 2명 △대한항공 1명 순서로 총 4개 팀에서만 톱10을 배출했다는 점입니다.


우리카드, 현대캐피탈, OK저축은행 등 3개 팀 선수는 이 명단에 이름이 없습니다.


이건 왜 이럴까요?


쳐내기 득점에 성공하려면 상대 블로커가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격수 성향만큼 '세터'도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 팀' 세터가 '블로킹을 벗기는' 재주가 있으면 상대 블로커를 마주할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고 자연스레 쳐내기 득점 비율도 내려갑니다.


실제로 팀에서 세트(토스)가 제일 많은 두 선수 그러니까 주전과 백업 세터가 공을 띄울 때 상대 평균 블로커 숫자와 쳐내기 득점 비율이 순위를 비교해 보면 1, 2위만 차이가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상대 블로커 숫자는 삼성화재 1.84명 vs 한국전력 1.81명, 쳐내기 득점 비율은 삼성화재 46.4% vs 한국전력 46.6%로 큰 차이가 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참고로 두 기록 모두 가장 낮은 현대캐피탈 기록은 평균 블로커 숫자 1.62명, 쳐내기 득점 비율 35%입니다.


아, 우리카드는 주전 세터 노재욱(28) 다음으로 세트가 많은 선수가 리베로 이상욱(25)이라 노재욱 기록만 따졌습니다. 노재욱이 2165번 공격수에게 공을 띄우는 동안 이상욱은 147번이 전부였습니다.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왼쪽)과 세터 황동일.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그렇다고 상대 블로커 숫자를 줄여주는 것만으로 어떤 세터는 좋고 어떤 세터는 나쁘다고 판정하기는 이릅니다.


현대캐피탈 세터 이승원(27), 황동일(34)이 상대 블로커와 '가위바위보'를 하는 데 제일 능하다고 말하기는 2% 부족한 게 사실.


대한항공 한선수(35)가 공을 띄울 때 상대 블로커 숫자가 1.63명으로 이 둘 기록을 합친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도 이 둘과 비교하면 한선수는 '레벨'이 다른 세터라는 데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겁니다.


세터에게는 득점 발판을 마련해 주는 게 제일 큰 임무고, 블로킹을 벗기는 것도 그 임무를 향한 과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까요.


이렇게 세터와 공격수 사이에 호흡이 맞지 않아도 상대 블로커가 1명이었으니 통계에는 1명으로 잡힙니다. KBSN 중계화면 캡처


실제로 공격 시도 횟수와 비교할 때 블로킹을 가장 적은 비율로 당하는 팀은 현대캐피탈(7.9%)이 아니라 우리카드(7.7%)입니다.


위에서 보신 것처럼 우리카드 주전 세터 노재욱은 이번 시즌 그렇게 상대 블로킹을 잘 연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노재욱 세트 때  상대 블로커는 평균 1.74명으로 각 팀 주전과 첫번째 백업 세터 12명 가운데 다섯 번째로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카드 공격수가 상대 블로킹을 피할 수 있던 이유는 뭘까요?


주전 세터 노재욱(3번)과 공격을 준비 중인 우리카드 선수들.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이번에는 '어택 커버'가 정답입니다.


'블로킹 커버'라고도 부르는 어택 커버는 상대 블로킹에 걸린 공이 우리 코트에 떨어지기 전에 '건져 내는' 플레이를 뜻합니다.


만약 이 공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면 상대팀에 1점을 내주게 되지만 건져 내면 우리 팀이 다시 공격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택 커버에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 차이를 느껴보세요. KBSN 중계화면 캡처


우리카드는 이날 현재 어택 커버 성공률 44.1%로 남자부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이는 남자부 평균 기록 40.1%보다 10% 정도 높은 기록입니다. 


배구에서 1~4세트는 일반적으로 25점을 먼저 따내는 팀이 이기고 25점의 10%면 2.5점입니다. 우리카드는 어택 커버 하나만으로도 상대 팀을 22.5점에 묶어 둘 수 있는 셈입니다.



우리카드 나경복(26·레프트)은 "우리 팀 (신영철) 감독님께서 어택 커버 위치 선정을 정말 잘해주신다. 말씀하신 대로 자리를 잡고 있다 보면 정말 공이 그리로 와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10연승 기간에는 이 기록이 48.2%까지 올랐었습니다.


어택 커버는 그저 실점을 막아내는 것뿐 아니라 팀 동료에게 '여기서 받아줄 테니 마음 놓고 때리라'는 신호를 보내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연승 중인 팀이라면 이 기록이 올라가는 게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대한항공에 1-3으로 패하면서 11연승 도전에 실패한 9일 경기 때는 이 기록이 뒤졌겠죠?


네, 이날 우리카드도 어택 커버 성공률 41.4%로 나쁘지 않은 모습을 선보였지만 대한항공은 47.6%로 더 높았습니다.


9일 경기 1세트 30-30 듀스 상황에서 우리카드가 어택 커버에 실패하는 장면. 황경민이 쉬운 플레이를 놓쳤다는 뜻이 아니라 승부에 영향이 큰 장면이었다는 뜻입니다. SBS스포츠 중계화면 캡처


이렇게 오늘도 각 팀 선수들은 상대 블로킹을 앞에 두고 쳐내고, 열고, 다시 받아내려 안간힘을 쓰면서 정신 없이 코트 위로 몸을 내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 더 내게 토스를 올려줘."('하이큐!!' 히나타 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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