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현역 시절 '매직핸드'로 통했던 김승현 현 SPOTV 해설위원. 애슬릿미디어 제공


프로가 된다는 건, 정말 사랑하는 일을, 정말 하기 싫은 날에도, 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 '닥터 J' 줄리어스 어빙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황당함의 연속입니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도 입밖으로 내뱉는 건 다른 문제니까요.


김승현(41) SPOTV 해설위원은 29일 올라온 팟캐스트 '우지원 김승현의 농구농구'에 출연해 "팬과 선수 모두의 잘못"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길래 김 위원이 팬과 선수 모두 잘못했다고 평한 걸까요?


23일 프로농구(KBL) 전주 경기에서 안방팀 KCC는 KGC에 64-90으로 패했습니다. 문제 장면이 나온 건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라커룸을 향하던 도중이었습니다.


한 어린이 팬이 관중석 끝에서 KCC 선수들 하이파이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라건아 등 일부 선수를 제외하고는 전부 이 팬을 외면했습니다. 한 크리에이터가 이 장면을 편집해 유튜브에 올리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에 대해 김 위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NBA 많이 봐서 안다. 모든 NBA 선수들이 다 하이파이브 해주는 거 아니다. 팬과 선수 모두의 잘못이다. 어린 관객이 뭘 알겠나. 그 어린 관객에게는 이기고 지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선수들이 좋아서 하이파이브 하기 위해 기다린 것. 그 경기처럼 30정 점도 차이나는 경기는 선수들의 의욕이 상실되고 화가 난 상태다. 그 정도 경기라면 그 아이의 부모가 하이파이브를 못하게 잡았어야 한다.


먼저 미국프로농구(NBA)에서 하지 않으면 한국에서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건 무슨 창의적인 논리인가요? 


'그 어린 관객에게는 이기고 지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는 논리도 황당합니다. 말 자체는 맞습니다. 하지만 '단지 선수들이 좋아서 그렇게 크게 졌는데도 하이파이브하려고 기다린 것'이죠. 이렇게 대패한 상황에서 팬은 선수들 곁을 지켰는데 선수들은 무슨 권리로 팬을 외면하나요?


'부모가 잡았어야 했다'는 말은 진짜 못 들은 걸로 하고 싶을 정도. 그렇다면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난 데다 소아암까지 앓고 있던 이 꼬마를 아이스하키 링크에 데리고 간 아래 부모는 얼마나 잘못한 건가요?



4년 전 동영상 주인공인 이 꼬마 이름은 리암 피츠제럴드이고 암을 이겨낸 지금은 스포츠 방송인을 꿈꾸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이 하이파이브(정확하게는 피스트 범프·fist bump)는 분명 이 아이 투병 생활에 도움이 됐습니다. 심리적으로도 물론 그랬겠지만 이 동영상이 인기를 끌면서 여기저기서 기부가 쏟아져 치료비를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이파이브는 이렇게 한 아이 운명도 바꿀 수 있습니다.


2001년 배우 김하늘 씨(왼쪽)와 화보 촬영 중인 김승현 SPOTV 해설위원. 동아일보DB


김 위원은 계속해 "진정한 팬이라면 코트에서 열심히 뛰는 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사적인 모습까지 바라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말 자체는 맞습니다. 저도 12년 전에 이미 똑같은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코트에서 라커룸으로 가는 통로는 '사생활 공간'이 아닙니다. 그 통로는 코트 위와 마찬가지로 '프로' 스포츠 선수가 연봉을 받으려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공간입니다.


아이제아 토마스가 2015년 4월 26일(현지시간) 플레이오프 1라운드 탈락을 확정한 뒤 어린이팬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모습. 동아일보DB


많은 프로 스포츠 선수가 김 위원처럼 착각하는데 여러분은 '경기력' 때문에 그 많은 연봉을 받는 게 아닙니다.


경기력이 연봉 기준이라면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선수가 한국 여자프로농구(WKBL) 선수보다 연봉이 적은 건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 경기력이 연봉 기준이라면 자기 종목 세계선수권대회를 휩쓰는 소위 '비인기 종목' 선수가 국제농구연맹(FIBA) 랭킹 30위 농구 선수들보다 몸값이 더 높아야겠죠?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뛰던 2012~2013 시즌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패한 뒤 안방 팬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있는 케빈 듀랜트. 동아일보DB


여러분은 '쇼 비즈니스' 종사자입니다. 여러분이 뛰는 모습을 보고 웃고 울고 화내는 팬들 마음 덕분에 여러분이 그만큼 연봉을 받아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비인기 종목 선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연봉이 많은 겁니다. 경기력은 그저 마음을 움직이는 수단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렇게 여러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도 꼭 여러분이 잘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솔직히 농구는 선배들 잘 둔 덕분이잖아요?


여러분이 스포츠 뉴스에서 자기 종목을 다루는 걸 당연하게 생각할 때 어떤 협회(연맹) 직원은 그 화면 밑에 흘러가는 자막 한 줄 넣어달라고 여기저기 사정하기 바쁩니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프로농구 경기장 좌석이 비는 건 신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동아일보DB


해설위원도 마찬가지. 관중석에 앉아서 혼자 뭐라고 떠들든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해설위원 역시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대가로 돈을 받는 직업입니다. 


김 위원은 어쩌면 그저 후배들을 감싸고 싶었을 뿐인지 모릅니다. 단, 정말 김 위원 생각대로 선수들이 움직인다면 나중에는 정말 팬들 반응 같은 건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될 겁니다. 어차피 팬이 하나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묻습니다. 한국 프로농구는 지금보다 팬이 더 많이 필요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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