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한일전 경기 도중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한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 아시아배구연맹(AVC) 홈페이지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습니다.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이 24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20회 아시아여자배구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일본에 1-3(25-22, 23-25, 24-26, 26-28)으로 역전패했습니다.
한국 대표팀 주장 김연경(31·에즈자즈바시으)은 경기 후 "일본의 전술을 파악하면 또 다시 다른 패턴으로 나와 대비가 잘 안 됐다. 일본은 경기력이 좋았고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면서 "오늘 경기는 조금 충격적이기는 하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은 국제배구연맹(FIVB) 랭킹 9위, 일본은 6위이기 때문에 이 결과가 아주 이상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김연경이 '충격적'이라고 표현한 건 이번 일본 대표팀이 성인(senior) 레벨 그러니까 A 대표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20회 아시아선수권에서 안방 팀 한국을 물리친 일본 대표팀. AVC 홈페이지
다음달 14일부터 29일까지 일본 5개 도시에서 2019 FIVB 여자 월드컵이 열립니다. 일본은 이 월드컵에 집중하는 차원에서 아시아선수권에는 20세 이하 대표팀을 중심으로 2진 선수를 내보냈습니다.
실제로 아시아선수권 일본 대표 14명은 평균 19.5세로 한국(27.1세)보다 7.6세 어렸습니다. 이날 경기 양 팀 스타팅 멤버만 보면 일본은 19세, 한국은 28.7세로 차이(9.7세)가 더 벌어집니다. 일본 대표팀에서는 1997년생 오사나이 미와코(長內美和子·22·히타치)가 제일 맏언니였는데 한국에서 이보다 나이가 어린 건 박은진(20·KGC인삼공사), 이주아(19·흥국생명) 두 명뿐이었습니다.
나이만 차이가 나는 게 아닙니다. 리베로(수비 전문 선수) 두 명을 제외한 일본 대표 선수 12명은 평균 177.3㎝로 한국(182.8㎝)보다 5.5㎝ 작았습니다. 역시 스타팅 멤버만 따지면 일본 176.3㎝, 한국 184.8㎝로 차이(8.5㎝)가 더 컸습니다.
양효진(190㎝), 이재영(178㎝)을 상대로 공격 중인 이시카와 마유(171㎝). AVC 홈페이지
이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김연경과 이시카와 마유(石川眞佑·19·도레이). 두 선수는 이 경기에서 나란히 30점을 올렸는데 1988년생인 김연경은 키 192㎝고, 2000년생 이시카와는 171㎝입니다. 참고로 한국 대표팀 리베로 오지영(31)이 170㎝입니다.
이시카와만 잘한 게 아닙니다. 이날 일본 대표팀에서는 히라야마 시온(平山詩嫣·19·히사미츠제약)이 14점, 소가 하루나(曾我啓菜·18·NEC)가 13점, 오사나이가 11점, 야마다 니치카(山田二千華·19·NEC)가 10점을 올리면서 총 5명이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습니다. 세터 세키 나나미(關菜菜巳·20·도레이)를 제외한 주전 전원이 10점 이상을 올린 겁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김연경과 20점을 올린 이재영(23·흥국생명)을 제외하면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린 선수가 없습니다. 이재영은 "어린 일본 선수들의 패기를 많이 느꼈다"면서 "일본은 기본기가 워낙 좋고 빠른 플레이를 잘한다. 우리도 배워야 할 점"이라고 말했습니다.
FIVB 20세 이하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후 기뻐하는 일본 대표팀. FIVB 홈페이지
사실 이번 일본 대표팀이 보통 팀은 아닙니다. 일본은 지난달 열린 2019 FIVB 20세 이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8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일본 대표팀은 평균 173.8㎝로 이번 대표팀(177.3㎝)보다 더 작았습니다.
배구에서 키가 크면 유리한 게 사실이지만 동양인이 키를 늘리는 데는 유전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프로배구 원년(2005년) 여자부 등록 선수는 평균 176.6㎝였고 현재 현역 선수 평균은 176.8㎝로 14년 동안 0.2㎝ 늘어나는 데 그쳤습니다. 대신 이재영이 이야기한 것처럼 '기본기'라는 무기를 잃었습니다.
기본기가 탄탄하면 굳이 키가 크지 않아도 심지어 세계 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걸 일본 대표팀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시카와는 배구 선수로는 단신인 171㎝밖에 되지 않지만 20세 이하 세계선수권 최우수선수(MVP) 타이틀을 차지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키가 작으면 블로킹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건 사실이지만 - 이날도 블로킹에서는 한국이 9-1로 앞섰습니다 - 꼭 키가 커야만 블로킹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일본 대표팀은 로봇을 활용해 실제 상대팀 움직임을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키 192㎝인 김연경이 자기보다 작은 일본 블로커 라인을 상대로 공격 성공률 35.7%를 기록하는 동안 키 171㎝인 이시카와가 자기보다 큰 상대를 맞아 총 공격 시도 가운데 40.5%를 한국 코트에 꽂아 넣은 게 우연이 아닌 겁니다.
일본 대표팀 아이하라 노보루(相原昇) 감독은 "승리는 전혀 상상도 못한 결과"라면서 "다른 나라 선수들보다 우리 선수들은 키가 작지만 기술과 수비가 좋다. 그래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계속해 "이시카와는 뒤에서 넘어오거나 반대편에서 힘들게 오는 공도 잘 처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스파이크 센스가 좋은 선수"라고 말했습니다.
'서브 리시브 타령'이 아니라 이런 게 바로 기본기입니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한국 대표팀 감독도 "일본의 2단 공격 성공률이 높았다. 이에 대한 우리 블로킹, 수비가 생각만큼 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은 다음달 16일 요코하마(橫濱)에서 열리는 월드컵 경기에서 일본 A 대표팀을 상대합니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결과를 마주하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