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NC로 팀을 옮긴 양의지(오른쪽)가 입단식에서 같은 팀 이동욱 감독과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동아일보DB
프로 스포츠 선수는 리그에서 미리 정한 조건을 충족해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고 나면 자기 뜻에 따라 팀을 옮길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선수는 몸값을 올려주겠다는 팀으로 이적하는 게 보통이지만 그저 '자리'를 찾아 팀을 옮기는 선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 대항전이 실질적으로 프로 리그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 종목에서 뛰는 (사실상 프로) 선수는 어떨까요? 이 선수는 돈을 더 많이 주겠다는 팀(=나라)이 있거나 대표팀에 자리를 보장하겠다는 팀이 있어도 이적하면 안 되는 걸까요?
2014 소치 겨울올림픽 때 빅토르 안(안현수·34) 사례에서 보듯 한국 국민 생각은 '안 된다'에 가깝습니다. 안은 대표팀 선발전에서 올림픽 출전이 가능한 5위에 이름을 올리고도 운동하기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러시아로 떠났지만, 많은 분들이 그를 '무고한 파벌싸움 피해자'로 기억하고 싶어합니다.
안이 러시아에서만 귀화 제의를 받았던 것도 아닙니다. 워싱턴포스트(WP) 기사 내용을 담아 2017년에 썼던 기사를 인용하면:
안현수(러시아명 빅토르 안·31)는 2014 소치 올림픽 때 미국 대표로 뛸 수도 있었다.
당시 안현수가 남자 쇼트트랙에서 3관왕을 차지하자 미국 언론은 미국이 러시아와 끝까지 안현수 귀화 경쟁을 벌였지만 패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러시아의 금전적인 유혹(financial enticement)이 더 매력적이었다”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러시아는 개최국인 데다 이전까지 올림픽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했기 때문에 금 4개를 포함해 메달 19개를 딴 미국보다 안현수가 더 필요했다는 것이다.
WP는 꼭 FA 시장에서 '대어'를 놓친 상황처럼 묘사하고 있지 않나요? 사실 미국 언론에서는 이렇게 올림픽 선수 귀화 문제를 FA처럼 다룬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선수가 이러니까 지도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2018 평창 겨울올림픽 때 한국 선수를 격려하고 있는 김선태 당시 한국대표팀 총감독(오른쪽). 동아일보DB
김선태(43) 2018 평창 겨울올림픽 한국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감독은 고려대에 재학 중이던 1998 나가노(長野) 올림픽 때 남자 대표팀 다섯 번째 멤버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다만 국가대표 선발 당시에도 무릎 부상 중이었고 올림픽 때도 끝내 경기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 길로 현역에서 은퇴한 김 감독은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변신했지만 넥타이는 답답하기만 했고, 바(Bar) 사장으로 변신한 뒤에도 빙판이 그리웠습니다. 김 감독은 결국 장비 전문 코치가 되어 링크로 돌아왔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스케이트 날을 잘 깎는 전문가로 통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이 솜씨를 인정받아 한국 대표팀 상비군 코치 겸 장비 전문 코치로 일하던 그에게 2004년 중국 창춘(長春)시에서 감독직 제안이 왔습니다.
김 감독은 2004~2006년, 2010~2014년 두 차례 창춘시 쇼트트랙 감독을 지내면서 저우양(周洋·28), 량원하오(梁文豪·27), 한톈위(韓天宇·23) 같은 선수를 발굴했습니다.
이 중 제일 유명한 선수는 역시 저우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우양은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때 여자 1500m와 계주에서 금메달 2개를 목에 걸었고, 2014년 소치 대회 때도 1500m 2연패에 성공하면서 중국 여자 쇼트트랙 간판으로 활동했던 선수입니다.
김 감독의 해외 활동 경력은 중국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는 2006~2010년에는 일본 대표팀에서 코치와 감독을 지냈습니다. 2010 밴쿠버 올림픽 때 쇼트트랙 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한 후에도 일본빙상경기연맹은 "기본에 충실한 지도를 바탕으로 주니어 육성에 정평이 난" 김 감독을 유임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김 감독이 창춘으로 돌아가기로 뜻을 굳히면서 결국 그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외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던 김 감독이 귀국하게 된 건 (빅토르) 안 때문. 2014 소치 올림픽 때 안이 3관왕(500m, 1000m, 계주)을 차지하는 동안 한국 남자 대표팀은 노메달에 그쳤습니다. 그러자 대한빙상경기연맹에서 그에게 SOS 신호를 보낸 것.
한국 쇼트트랙 대표 이호석(33·왼쪽)이 소치 올림픽 남자 계주 도중 넘어지는 장면. 동아일보DB
결국 2018 평창 대회에서 한국 남자 대표팀은 임효준(23)이 한국 선수단에 첫 번째 금메달(1500m)을 선물한 걸 포함해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따내면서 부활에 성공했습니다.
김 감독은 총 감독 자격이었으니까 여자부 경기에서 딴 금메달 2개(1500m, 계주) 역시 그가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치 때 러시아, 중국에 밀려 종목 순위 3위였던 한국 대표팀을 다시 쇼트트랙 1위로 만든 김 감독은 현재…
중국 대표팀 총감독 신분입니다.
중국 신화 통신은 중국빙상경기연맹에서 그를 쇼트트랙 총감독 겸 여자부 감독으로 선임했다고 지난달(6월) 13일 보도했습니다.
첫 훈련을 진행중인 김선태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총감독. 후룬베이얼=신화 뉴시스
2022년 겨울올림픽은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립니다. 그러니 2018년 한국에서 김 감독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중국 역시 김 감독이 필요했습니다.
오랜 중국 생활로 중국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김 감독은 이날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후룬베이얼(呼倫貝爾)시에서 공개 훈련을 진행하면서 신화통신 기자와 만나 "평창에서는 운이 좋아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며 "현재 (중국 대표팀은) 모든 것이 좋다.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중국(33개)은 한국(48개)에 이어 올림픽 쇼트트랙에서 두 번째로 메달을 많이 딴 나라. 게다가 선임 소식 발표 후 중국 대형 인터넷 포털에 '金善台'(김선태)가 인기 검색어에 등장할 정도로 반응도 뜨거웠습니다. (솔직히 평창 때 한국 쇼트트랙 감독 이름 모르셨죠?) 그렇다면 김 감독이 이 자리를 사양했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미국 CNN 방송에 따르면 평창 올림픽 전체 출전 선수 2922명 가운데 178명(6.1%)이 태어난 나라와 자신이 대표로 출전한 나라가 달랐습니다. 여름올림픽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선수가 이러니까 지도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2). 심지어 그 나라 국적을 딸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어쩐지 하필 중국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감독이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이 찜찜한 건 저 역시 "대표팀은 육체를 가진 국가"(사이먼 쿠퍼 '축구 전쟁의 역사')라는 선언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