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프로배구 최고 인기팀 현대캐피탈이 챔피언 결정전에서 승리하면서 2018~2019 도드람 V리그 남자부 일정이 모두 끝이 났습니다.


현대캐피탈(2위)은 챔프전에서 정규리그 우승팀 대한항공에 3전 전승을 거두면서 통산 네 번째 우승에 성공했습니다.


거꾸로 다섯 시즌 만에 통합 우승 타이틀을 획득하려던 대한항공은 '정규리그 우승팀의 저주'를 깨지 못하고 분루(憤淚)를 삼켜야 했습니다.


이번 챔프전 기간 간단한 장난감을 한 번 만들어 봤습니다. '야구처럼 배구도 '승리 기댓값(WP·Win Probability)'을 따져 그래프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하고 알아본 것. 맞습니다.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이 1차전 5세트 6-9 상황에서 작전 타임을 불러 "기적은 일어난다"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WP는 이 블로그에는 2005년에도 이미 등장했던 개념이지만 낯선 분들이 적지 않을 터. 2013년 한국시리즈 때 썼던 기사에서 인용하자면 WP는 이런 겁니다.

 

(야구에서) 기 싸움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을까. 이러한 의문에 처음 답을 찾아 나선 건 크리스토퍼 세아라는 미국 야구 통계학자였다. 그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열린 메이저리그 경기 3만2767경기를 분석해 이닝, 아웃카운트, 점수 차에 따라 각 팀의 승리 확률을 계산했다.


그 뒤 여러 학자가 통계적인 보정을 거쳐 언제 어느 때나 팀의 승리 확률을 알아낼 수 있는 승리 기댓값(WP·Winning Probability)을 정리했다. WP는 플레이 하나 하나마다 변한다. 이 때문에 1회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 한 팀의 WP를 죽 이어 그래프로 그리면 경기 흐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그래픽 참조).



배구에서 WP를 계산하는 과정도 다를 게 없습니다. 일단 (장난감이니까 규모가 너무 크지 않게) 2016~2017 시즌부터 세 시즌 동안 남자부 정규리그 378 경기 데이터를 가지고 세트별, 세트 스코어별, 점수별 경기 승리 확률을 따지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역시 표본 숫자가 적은 게 문제가 됐습니다. 상황이 너무 적어서 너무 일찍 승률 0% 또는 100%가 나오는 일이 있었던 것. 장난감이라는 구실에 충실하도록 이런 상황은 그대로 두기로 했는데 이전에 같은 상황이 없던 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점수별 세트 승리 확률을 가지고 정규화(normalization)을 거쳐 WP를 추산했습니다.

 

 

1차전: 기적은 일어났다

이렇게 정리한 'V리그 WP 0.1'을 가지고 3-2로 현대캐피탈이 승리한 1차전을 그래프로 그렸더니 이런 그림이 나왔습니다.



최 감독이 명언(?)을 남긴 5세트 6-9 상황에서 현대캐피탈 WP는 .235였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상황이 맞이한 팀 가운데서 23.5%(17번 가운데 4번)만 결국 승리를 가져갔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때가 WP가 제일 낮았던 순간은 아닙니다. 5-7 상황이 WP .130으로 이 세트 최저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대한항공 외국인 선수 가스파리니(35·슬로베니아)가 6-7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현대캐피탈 WP는 .344로 올랐습니다.

 

6-9 상황이 중요했던 건 그 다음 상황 차이 때문. 현대캐피탈이 한 점을 뽑아서 7-9가 되어도 현대캐피탈 WP는 .240으로 0.005 오르는 데 그칩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거꾸로 대한항공이 6-10으로 앞서 가게 되면 현대캐피탈 WP는 제로(0)로 떨어집니다. 적어도 최근 세 시즌 동안 이런 상황이 나온 7번 가운데 이 점수에서 역전한 팀은 없었습니다.



2차전: 난감한 진행

역시 현대캐피탈이 3-2로 승리한 2차전 그래프를 그릴 때는 위에서 말씀드린 난감한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먼저 그림부터 보시겠습니다.



현대캐피탈은 세트 스코어 2-0으로 앞선 3세트 때 2-9로 뒤졌는데 두 세트를 먼저 딴 팀이 3세트에서 이렇게 뒤진 적도, 세트 스코어와 무관하게 어떤 세트에서든 2-9로 뒤진 팀이 나온 적도 없었습니다. 13-25로 세트가 끝나기까지 거의 대부분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릴없이 이 부분은 WP .770으로 통일했습니다. 77%는 1, 2세트를 따낸 팀이 3세트를 내주고 4세트를 맞이할 때 승률입니다. 이 숫자는 어떻게든 그래프를 그려야 하기에 찾은 숫자일 뿐 해당 상황에서 실제 WP를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연구를 해야 할 듯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날 경기를 지켜보다가 '2차전은 물론 챔프전 전체도 현대캐피탈 쪽으로 기울었구나'하고 느꼈던 장면이 있습니다. 현대캐피탈 세터 이승원(26)이 대한항공 정지석(24)의 스파이크를 가로 막았던 8-5 상황이었습니다. 심판진이 처음에 아웃을 선언하자 이승원은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아래 GIF).


 

이때는 이미 현대캐피탈 쪽으로 분위기가 거의 기운 상황(WP .947). 만약 9-5가 되면 (표본 부족 때문이지만) WP가 1.000을 찍지만 아웃 판정으로 8-6이 되면 WP는 .833으로 내려갑니다. 비디오 판독 결과 블로킹이 맞았고 결국 현대캐피탈이 기세를 몰아 2연승을 기록하게 됐습니다.

 

 

3차전: 정상적인 승부 마침표

현대캐피탈이 3-1로 승리한 3차전은 가장 정상적인(?) 그래프가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그래프부터 보시겠습니다.

 


현대캐피탈은 1세트를 먼저 따낸 다음 2세트를 내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3세트 승부가 중요하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 최 감독은 다소 지친 기색이 보이던 문성민(33) 대신 허수봉(21)을 이날 처음 투입하면서 분위기 전환에 나섰습니다.

 

3세트 초반 5-7로 뒤지면서 WP .292까지 떨어졌던 현대캐피탈. 이 순간 가스파리니 서브 범실로 6-7이 되면서 WP는 .418로 올랐고, 곧이어 허수봉의 서브 이후 10번째 플레이 때 전광인(28)이 오픈 공격에 성공하면서 7-7 동점으로 WP는 .537이 됐습니다.

 

이어 신영석(33)이 가스파리니의 공격을 가로 막고, 허수봉이 서브 득점을 올려 9-7로 앞서 가면서 현대캐피탈은 WP는 .687까지 올랐습니다. 이후 때로 쫓기면서도 점점 점수차를 벌려갔고, WP도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로 상승세를 이어갔습니다.

 

단, 3세트를 마무리할 때는 WP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같은 상황에서 시작해 결국 더 큰 점수 차이로 이긴 팀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3세트가 어떤 점수로 끝이 났든 종목 특성상 4세트는 모두 세트 스코어 2-1 상황에서 0-0으로 시작한다는 것도 WP가 내려오는 이유입니다. 이 부분 역시 보완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놀이를 마치면서…

이 정도면 아주 정교하지는 않아도 제법 쓸 만한 도구라는 생각이 드시지 않나요?

 

일단 제일 쉬운 보완책은 표본을 늘리는 것. 3차전이 제일 그럴 듯한 모양이 나온 건 예외적인 상황이 별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프로배구 전체 15시즌만 정리해도 조금 더 근사한 모양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러면 자잘한 보정 과정도 좀 더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언젠가 될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되면 작업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밖에 의견 있으시면 언제든 알려주셔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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