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쿠데타는 없었습니다. 제 아무리 혈기 왕성한 왕자라고 해도 건강한 황제를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클레이 코트의 황제' 라파엘 나달(32·스페인·세계랭킹 1위)이 도미니크 팀(25·오스트리아·4위)를 물리치고 개인 통산 11번째 머스킷티어컵을 차지했습니다.
나달은 10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인근 롤랑 가로스 경기장에서 열린 2018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팀에 3-0(6-4, 6-3, 6-2) 완승을 거뒀습니다.
이로써 나달은 프랑스 오픈 결승전에서 11전 전승을 기록하게 됐습니다.
나달 이전에 단일 메이저 대회에서 11번 우승한 건 호주 오픈 최다 우승자 마거릿 코트(76·호주·여)뿐입니다. (코트는 프로 선수가 참가할 수 있게 된 1968년 이후 '오픈 시대'만 따지면 이 대회에서 4번 우승했습니다.)
선수 | 대회 | 우승 연도 |
마거릿 코트 | 호주 오픈 | 1960~1966, 1969~1971, 1973 |
라파엘 나달 | 프랑스 오픈 | 2005~2008, 2010~2014, 2017, 2018 |
올해 클레이 코트 시즌에서 나달이 남긴 성적은 24승 1패. 마드리드 오픈 8강에서 0-2(5-7, 3-6)로 딱 한 번 패했을 때 상대가 바로 팀이었습니다. 이 경기 전까지 나달은 50세트 연속 무패 행진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 경기가 중요한 건 세컨드 서브 때문입니다. 이날 나달은 세컨드 서브 포인트 가운데 34.4%(21개 중 11개)를 차지하는 데 그쳤습니다. 클레이 코트 시즌 전체 기록은 61.5%입니다.
노파심에 설명드리면 세컨드 서브는 문자 그대로 두 번째로 넣는 서브를 뜻합니다.
테니스에서 서브권을 쥔 선수(서버)는 서브 기회를 두 번 얻습니다.
서버는 코트를 절반으로 나눠 점수가 날 때마다 왼쪽과 오른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서브를 넣습니다. 이때 서브는 반드시 대각선 쪽 서비스 코트 안에 떨어져야 하는 게 규칙입니다.
나달이 화면 기준으로 왼쪽에서 서브를 넣었기 때문에 이 GIF에서처럼 네트 너머 오른쪽 서브 코트에 떨어져야 반칙이 아닙니다. JTBC3 중계 화면 캡처
서브 기회가 두 번이라는 건 첫 번째 서브 때 이 규칙을 어겼다고 곧바로 점수를 내주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연달아 두 번 규칙을 지키지 못하면 '더블 폴트'라는 반칙을 저지르게 되고 상대 선수(팀)에게 점수를 내주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 서브는 안정적으로 넣는 걸 선택하는 선수가 많기 때문에 첫 서브보다 두 번째 서브가 위력이 떨어지는 게 보통입니다.
남자프로테니스(ATP) 홈페이지에 따르면 최근 52주(1년) 동안 퍼스트 서브 포인트 획득률(첫번째 서브에 성공했을 때 선수가 득점에 성공한 비율)이 가장 높은 건 이보 카를로비치(39·크로아티아·92위)로 83.8%입니다.
세컨드 서브 때는 로저 페더러(37·스위스·2위)가 60.6%로 1위니까 위력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달은 유독 세컨드 서브에 강합니다.
나달이 같은 기간 퍼스트 서브 때 점수를 따낸 비율은 73.7%로 35위지만 세컨트 서브 때는 60.2%로 2위입니다.
클레이 코트 위로 범위를 좁혀 보면 퍼스트 서브는 72.5%로 27위, 세컨드 서브는 (앞서 보신 것처럼) 61.5%로 1위입니다.
2~4위 선수가 고만고만한 것 성적을 낸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나달이 '튑니다'.
▌최근 52주간 클레이 코트 서브 게임 성적
이름 | 나이 | 국적 | 두 번째 서브 포인트 획득률 |
라파엘 나달 | 32 | 스페인 | 61.5% |
스탄 바브링카 | 33 | 스위스 | 59.8% |
닉 키리오스 | 23 | 호주 | 59.7% |
밀로시 라오니치 | 28 | 캐나다 | 59.4% |
존 이스너 | 33 | 미국 | 59.2% |
이건 오히려 나달이 '서브가 약하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세컨드 서브에 강하다고 해도 다른 선수들이 파워를 끝까지 끌어올려 서브를 넣는 퍼스트 서브에 별 강점이 없다는 건 분명하니까요.
그리고 세컨드 서브에 강하다는 건 사실 서브 그 자체가 아니라 서브 이후 플레이에 강하다는 뜻입니다.
세컨드 서브 때는 파워보다 정교함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나달이 약점을 '희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말입니다.
실제로 올해 나달이 클레이 코트에서 기록한 경기당 서브 에이스는 평균 1.4개(뒤에서 세 번째)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부문 1위 존 이스너(33·미국·10위)는 클레이 코트 위에서 경기당 평균 21.8 포인트를 서브 하나로 얻어냅니다.
그런데도 나달이 20포인트 차이를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는 건 클레이 코트에서는 어차피 서브 에이스가 잘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레 서브에만 강점을 보이는 선수는 클레이 코트에서 장점이 별로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거꾸로 나달처럼 서브가 약한 선수는 약점이 성적을 갉아 먹는 정도가 줄어들고 말입니다.
그러면 리턴 게임에서는 어떨까요?
상대 서브 강도가 떨어진다는 건 리턴 게임에 약한 선수도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현역 선수 가운데 리턴 게임 최강자라고 할 수 있는 나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나달은 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달은 최근 1년 동안 클레이 코트 위에서 상대가 퍼스트 서브에 성공했을 때도 이 중 40.8%를 자기 포인트로 연결했습니다.
1년 전체 기록(35.3%)보다 클레이 코트에서 리턴 기록이 15.6% 좋습니다.
물론 클레이 코트에서 이렇게 상대 첫 서브에 영향을 받지 않는 선수는 없습니다.
▌최근 52주간 클레이 코트 리턴 게임 성적
이름 | 나이 | 국적 | 첫 서브 리턴 포인트 획득률 |
라파엘 나달 | 32 | 스페인 | 40.8% |
다미르 드줌허르 | 36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39.2% |
정현 | 22 | 한국 | 38.6% |
다비드 페레르 | 36 | 스페인 | 37.7% |
노바크 조코비치 | 31 | 세르비아 | 37.1% |
나달이 클레이 코트에서 리턴 게임 승률을 더욱 끌어올린 첫 번째 비결로는 리턴 위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아래 동영상을 보시면 나달은 클레이 코트 위에서는 베이스라인에서 한참 떨어져 상대 서브를 받아내는 연습을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클레이코트 위에서는 공이 높고 느리게 튀어 오르기 때문에 이렇게 뒤에서 서브를 받으면 '큰 스윙'으로 반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이런 전술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나달은 코트 전체를 커버할 수 있을 만큼 발이 빠르기에 이런 전략을 선택할 수 있는 것. 이와 함께 체력도 받쳐줘야 합니다.
키(185㎝)가 상대적으로 작은 것도 나달이 리턴 게임에 강한 이유입니다.
네, 테니스에서는 랭킹이 높은수록 키가 큰 것도 사실이고, 키가 작으면 리턴 게임에 유리한 것도 사실입니다.
종목을 막론하고 신체 사이즈가 작고 많이 뛰는 선수가 힘까지 쥐어 짜내야 하면 이런 저런 부상에 시달리는 게 필연적입니다.
나달 역시 기본적으로 무릎과 발목에 부상을 달고 사는 수준입니다.
이런 선수가 30대 중반을 향해 간다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
박용국 NH농협 테니스팀 감독은 "나달은 지난해부터 네트 플레이 횟수를 늘렸고 전진 공격도 많이 한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적인 면을 고려했을 것"이라며 "나달이 페더러처럼 올어라운드 선수로 진화하고 있다"고 평했습니다.
▌나달 vs 페더러 코트별 통산 성적
바닥 | 나달 | 페더러 |
클레이 | 92.0%(415승 36패) | 75.9%(214승68패) |
잔디 | 77.2%(61승 18패) | 87.2%(164승24패) |
하드 | 77.0%(425승 127패) | 83.3%(725승145패) |
이번 프랑스 오픈이 나달에게는 개인 통산 17번째 메이저 대회 타이틀이었습니다.
나달은 지금까지 프랑스 오픈 이외에도 US 오픈에서 세 번, 윔블던에서 두 번, 호주 오픈에서 한 번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래도 페더러를 따라가려면 여전히 3개가 남아 있는 상황.
과연 나달은 이 서브 에이스 전성 시대에 역행하는 방식으로 페더러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