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엘로(Elo) 레이팅'이라는 랭킹 포인트 시스템이 있습니다. 헝가리 출신인 엘뢰(Élő) 아르파드 전 미국 마케트대 물리학과 교수(1903~1992·사진)가 만들어 엘로 레이팅입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LOL·League of Legends)'나 '월드 오브 탱크(WoT·World of Tanks)' 같은 컴퓨터 게임을 해보셨다면 이미 이 레이팅 시스템을 경험해 보신 겁니다. 게임 안에서 사용자 실력을 측정할 때 쓰는 도구가 바로 엘로 레이팅이거든요.


그래도 이 시스템을 제일 많이 쓰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체스. 원래 이 시스템 자체가 체스 선수 랭킹을 정하려고 세상에 나온 겁니다. 미국체스연맹에서 일하던 케니스 하크니스(1896~1972)가 1950년 만든 공식을 1960년에 엘뢰 교수가 손본 것. 이 시스템은 1980년부터 국제체스연맹(FIDE)에서 공식 랭킹 산정 시스템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엘로 레이팅 작동 원리는 간단합니다. 먼저 기본적으로 1500점을 갖고 시작합니다. 그 다음 자기보다 점수(레이팅)가 높은 사람에게 이기면 점수를 많이 얻고, 지면 조금 잃습니다. 거꾸로 레이팅이 낮은 사람에게 이기면 조금 얻고, 지면 많이 잃죠. 레이팅 차이가 클수록 점수 변화가 큽니다.


예를 들어 한국 여자 축구 대표팀(랭킹 18위·1833점)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친선 경기에서 미국(1위·2180점)을 3-0으로 꺾었다면 레이팅은 1864점으로 31점 오릅니다. 반면 같은 점수차로 져도 1829점으로 4점밖에 깎이지 않습니다. 반면 서울에서 가나(50위·1475점)를 1-0으로 꺾으면 2점이 오르는 데 그치지만 지면 33점이 떨어집니다. 여자 축구팀을 예로 든 건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여자 랭킹만 엘로 레이팅을 토대로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 축구팀 사례에서 두 가지 사실을 더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경기 장소가 중요하다는 것. 홈 어드밴티지를 적용하는 겁니다. 축구 엘로 레이팅 공식에서는 안방 팀에 100점을 더 준 다음 계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점수차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 당연히 크게 이기면 많이 오르고 적게 이기면 조금 오릅니다. 패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이를 프로야구에는 적용할 수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공식을 따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 유명한 네이트 실버(37)가 이미 메이저리그 버전을 만들었거든요. 그가 운영하는 파이브서티에이트닷컴에서도 메이저리그 엘로 레이팅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속도(velocity)에 해당하는 K만 4.5로 손봤습니다. 엘로 레이팅에서 속도는 한 경기 결과가 전체 레이팅에 얼마나 변화를 주는지 결정합니다. 당연히 이 숫자가 크면 레이팅이 많이 변하고 적으면 적게 변하죠. 실버는 팀당 162 경기를 치르는 메이저리그용 공식에서는 4를 썼습니다. 프로야구는 144경기니까 4.5 정도가 적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자, 그럼 2015 프로야구 10개 구단 엘로 레이팅 그래프를 한번 살펴 보실까요?


kt "꼴찌지만 잘 싸웠다."


11연패를 당하며 창단 첫 시즌 개막을 맞았던 막내 구단 kt. 그러다 댄블랙(27)을 영입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kt는 6월 1일 이후 성적만 따지면 42승 1무 49패(승률 .462)로 아주 떨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롯데 최종 성적하고 똑같은 승률이었으니 말입니다. 8월(그래프에서 세 번째로 올라가는 부분)에는 14승 11패로 월간 승률 .560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LG "더 낮은 곳을 향한 2015"


올 시즌 LG는 팀 슬로건으로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약하다! 더 낮높은 곳을 향한 2015!"를 내세웠습니다. 두 시즌 연속 '가을야구'를 경험했으니 올해도 그 이상을 기대했을 터. 하지만 결과는 '늪야구'였습니다. 단 한번도 올라가지 못하고 시즌을 치를수록 더 안 좋아지기만 했습니다. 'kt 보약'을 챙겨먹지 못한 게 그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LG는 kt하고 8승 8패를 기록했는데요, 상대전적에서 kt를 앞서지 못한 팀은 LG가 유일합니다.



롯데 시네마


물론 이 그래프는 시즌 전체를 보여주는 내용이지만 얼핏 한 경기 WP 그래프를 보는 듯도 합니다. 뒷심 부족을 보여준다고 할까나요? 롯데는 허약한 불펜 탓에 앞서던 경기를 내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닝 중간에 올라온 투수가 첫 타자를 상대로 OPS(추루율+장타력) 1.805를 내주는 팀이니 위기를 돌파할 재간이 없던 거죠. 시즌 흐름도 비슷했습니다. 과연 새로 지휘봉을 잡게 된 조원우 감독은 이 고질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KIA '리빌딩한 듯, 리빌딩 안 한, 리빌딩 같은'


시즌 초반에 잘 나가다 한 번 고꾸라졌지만 그래도 버텼습니다. 그러다 7월 들어 방문 9연전(그래프에서 72번 이후)에서 비로 밀린 한 경기를 제외하고 1승 7패에 그치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8월 들어 비상하는 듯했지만 체력적 한계를 드러내며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새로 팀을 맡은 김기태 감독은 젊은 선수를 적극적으로 기용했지만 신인왕 후보조차 한 명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신인 선수가 곧바로 성과를 내길 바라는 건 무리. 올해 뿌린 씨앗이 어떤 열매를 거두느냐에 내년 시즌 성패가 달렸다고 봅니다.



한화, 촌놈 마라톤


이 레이팅이 1500점 근처라는 건 기대 승률도 .500를 왔다 갔다 한다는 뜻입니다. 한화는 90경기를 치를 때까지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한화 팬들은 짜릿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승률을 유지하려고 시즌 초반부터 불펜을 혹사시킨 게 결국 시즌 후반 발목을 잡고 말았습니다. 김성근 감독이 프로야구를 떠나 있던 사이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고집을 부렸던 거죠. 그 결과 한화는 올 시즌에도 고비용 저효율 스타일 운영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3년 연속 자유계약선수(FA) 시장에서 큰 손이 된 한화, 과연 내년 시즌은?



SK, 그래도 가을야구 DNA


세 시즌 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했습니다. 그래프에서 114번 이후를 놓고 보면 대단한 상승세를 기록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판에 걸린 점수를 내가 가져오느냐 남에게 넘겨주느냐에 따라 레이팅이 변하는 방식. 결국 '네가 가라 5강' 모드에서 SK가 끝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 SK가 진짜 강팀이었다는 증거는 못 됩니다. 114번은 8월 28일 수원에서 LG에 4-0으로 승리한 날이었습니다. 이날 이후 SK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16승 15패로 승리가 딱 한번 더 많았습니다. "내일은 있다"는 김용희 감독의 철학이 내년에는 어떻게 나타날지가 관건. (아, SK부터 정규시즌 144경기 말고 포스트 시즌도 반영하고 있습니다.)



넥센, 문제는 찾았는데 해법은?


일단 염경엽 감독을 칭찬해 주고 싶은 건 폭탄(선발진)을 잘 관리하며 시즌 끝까지 버텼다는 것. 그래도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건 넥센 팬들에게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즌 종료 후 박병호(29)하고 이별하는 게 이미 기정사실이었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밴헤켄(36)마저 떠났으니 내년에는 선발진에서 더욱 답을 찾기가 어려울 터. 불펜에서도 한현희(22)가 팔꿈치인대접합(토미존)수술을 받기로 했습니다. 결국 염 감독이 '팀 히어로즈'를 완성할 수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내년 성적이 요동칠 전망. 



NC "거침없이 가자, 정규시즌!"


NC는 올해 팀 슬로건처럼 정규시즌에는 정말 거침 없이 달렸습니다. NC는 올 시즌 피타고라스 승률 1위(.623) 팀이고, 정규시즌이 끝났을 때 엘로 레이팅도 1577로 가장 높았습니다. 시즌 중반에 위기가 찾아왔지만 8월에 반등하는 저력을 보여주면서 신생팀 꼬리표를 확실히 떼어 낸 시즌. 여기에 내년에는 FA로 삼성에서 박석민(30)이 건너 옵니다. 내년에는 김경문 감독이 단기전 전략을 어떻게 세우는지에 따라 최종 순위가 달라질 공산이 큽니다.



삼성 "큰 거 한 판에…"


정규시즌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예년보다 전력이 떨어졌다는 걸 눈치채기 쉽지 않았던 한 해였습니다. 삼성 팬들이 위기라고 말하는 순간이 다른 팀 팬에게는 일상다반사일 때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주축 투수 3명이 해외 원정 도박 혐의를 받으면서 휘청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에게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뒤에는 완전히 넉다운. 오프시즌 때는 FA 자격은 얻은 박석민이 팀을 떠났습니다. '제일기획 시대'를 맞아 지출 규모도 줄어들 확률이 높습니다. 류중일 감독에게 '이 왕조는 물려받은 게 아니다'는 사실을 증명하라는 과제가 떨어졌습니다.



두산 "Now we are here."


정규시즌이 끝날 때만 해도 두산은 엘로 레이팅 1490으로 SK(1505)에도 뒤진 5위였습니다. 이 레이팅은 그 당시 실력을 보여줍니다. 한 시즌 성과를 보여주는 팀 순위하고 다른 점입니다. 9월 초반 부진했지만 넥센은 한술 더 뜬 덕에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직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도약대가 된 걸까요. 포스트시즌까지 모두 끝난 뒤에는 엘로 레이팅 1553으로 NC(1555)에 이어 2위가 됐습니다. 젊은 선수들이 큰 경기를 치렀기에, 그리고 이겼기에 내년에 못할 거라고 보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입니다.


어떻습니까. 프로야구 한 시즌을 정리하기에도 엘로 레이팅이 꽤 쓸 만한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혹시 내년에도 이 그래프를 그리게 된다면 올해 이 점수를 바탕으로 레이팅을 구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팀 상황을 좀더 정확하게 반영하는 건 물론 올해 제가 이야기했던 것들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도 확인해 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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