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NBA를 알게 되면서 제일 처음 응원했던 선수는 매직 존슨이었다. 그리고는 찰스 바클리를 거쳐, 스카티 피펜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사실 나는 몹시 변덕이 심한 팬이었다.


하지만 단 하룻밤에 모든 걸 바꿔버린 선수가 있었다. 아니 그날 밤만 해도 사실 나는 알지 못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한 선수만을 계속 응원하게 될 줄은 말이다.


'90년대 초반 방송 3사 가운데서 유일하게 SBS에서만 NBA 관련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자연스레 한창도 해설위원의 이름이 떠오를 수밖에 없던 오후 11시의 기다림. 당시 NBA 팬이라면 누구나 기다리던 그 시간.


덕분에 목요일 아침은 언제나 지난 밤 지켜본 NBA 이야기로 시작했고, 해가 기울 때까지 친구 녀석들과 NBA 선수들 플레이를 흉내 내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곤 했다. 초등학교의 낮은 림 아래서 그렇게 우리는 조던이 되고, 피펜이 되고, 바클리가 됐다.


하지만 그날 매치업은 사실 조금 실망스러웠다. 물론 피닉스는 찰스 바클리가 뛰는 팀이었다. 하지만 상대팀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비인기팀 골든스테이트. 1주일에 단 한 경기밖에 보지 못한다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팀이었다.


나는 너무도 쉽게 피닉스의 승리를 점쳤지만 경기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바클리가 막혔다. 바클리가 밀렸다. 바클리가 뚫렸다. 이제 갓 프로에 데뷔한 애송이가 찰스 바클리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눈울 비비며 그 녀석 플레이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도대체 저 자식은 뭐야?" 잠자리에 들어서도 나는 계속 그의 이름만 되뇌이고 있었다. 크리스 웨버, 크리스 웨버. "아, 저 녀석이 바로 웨버였구나. 그 웨버가 바로 저 놈이었구나."



다음날 저녁 나는 돼지 저금통을 털어 한 스포츠 매장을 향했다. 그리고는 그렇게 사고 싶던 에어 조던 시리즈 대신 크리스 웨버 시그니쳐 슈즈를 마련했다. 발꿈치 위에 뚜렷하게 그의 등번호가 새겨진 탭이 붙어 있는 신발이었다.


"도대체 저런 녀석의 시그니쳐 슈즈는 왜 나오는 거야?" 하고 투덜거렸던 내 옛 모습은 이미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후였다. 이제 내게 웨버는 단순히 어이없는 타임아웃으로 경기를 마친 웃긴 녀석이 아니었다. 웨버는 이미 내 심장이 뛰게 만드는 원동력 그 자체였다.



그날부터 나는 NBA팬이라기보다 크리스 웨버 팬이 되어 갔다. 웨버는 케빈 맥헤일만큼 믿음직스러웠고, 칼 말론처럼 집요하고 꾸준했다. 게다가 그는 누구보다 골밑을 잘 지키는 수비수이기도 했다.


그렇게 웨버는 역사상 최고 파워 포워드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웨버에게 '93-'94 시즌 신인왕이 돌아간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저 골밑에만 머물러 있기에 웨버는 너무도 다재다능했다. 웨버는 3점슛 능력을 갖춘 빅맨이었고, 속공을 이끄는 빅맨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웨버는 동료에게 패스하는 법을 알고 있는 빅맨이었다.


그러나 이 점이 결국 웨버의 발목을 잡고야 말았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웨버가 다재다능하다는 것? 아니면 그가 빅맨이라는 것?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당시 골든스테이트 감독 돈 넬슨은 이런 웨버를 견디지 못했다. 웨버는 결국 워싱턴으로 트레이드 되고야 말았다.


이후 '98년 새크라멘토로 트레이드 되기 전까지 세 시즌을 워싱턴에서 보내며, 팀을 9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물론 자신 역시 '97년 최초로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리그 일류 파워포워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역시나 웨버의 최전성기는 새크라멘토 킹스 시절이었다. 트레이드 발표 직후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던 그 팀에서, 결국 웨버는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웨버의 킹스 시절, 새크라멘토 시민들은 킹스 홈구장 아코 아레나(Arco Arena)를 '웨버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무엇보다 팀 자체가 웨버의 스타일에 맞는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활발한 모션 오펜스는 웨버의 볼 소유욕을 충족시켜줄 수 있었고, 웨버의 성적 역시 덩달아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블라디 디박, 페이야 스토야코비치, 덕 크리스트, 마이크 비비. 웨버는 이들과 함께 새크라멘토를 NBA에서 가장 강력한 컨텐더로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02년 그들에게 기회가 찾아 왔다. 하지만 디박이 쳐낸 공이 로버트 오리에게 굴러가는 순간 모든 게 끝이 났다. 그렇게 새크라멘토는 결국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웨버는 팀이 아닌 자기 무릎이 무너지는 아픈 경험에 시달려야 했다. 서부 컨퍼런스 준결승전에서 댈러스를 상대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웨버는 수술대에 올랐고, '03-'04 시즌 대부분을 재활에 할애해야 했다. 하지만 57경기에 결장하고 그가 돌아왔을 때, 우리가 마주친 상대는 정말 너무도 낯선 웨버였다. 한쪽 무릎만 가지고는 예전의 운동 능력, 민첩함, 기동성 모두 유지하기가 버거웠던 것이다.


그는 끝없는 크리스 웨버 Vs. C-webb 논쟁에 시달려야 했고, 페이야 스토야코비치와의 불화도 점점 커져만 갔다. 팀은 결국 스토야코비치를 선택했고, 웨버는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 됐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꿈을 못 다 이룬 채 아이버슨의 집으로 들어갈 운명을 맞이했다.


필라델피아 이적 초기, 웨버는 건강 및 전술 적응을 이유로 다소 부진했다. 하지만 ‘05-'06시즌 20.2-9.9-3.4를 기록하며 조금씩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이번 시즌 개막전 인터뷰에서도 수술 이래 최고 컨디션이라는 말을 자주 내뱉곤 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유니폼을 입은 웨버의 모습은 딱 거기까지였다.


필라델피아 모리스 칙스 감독은 웨버의 역할을 최소한으로 제한했다. 4쿼터에 벤치를 지키는 일이 늘어나면서 덩달아 웨버의 감정 역시 나빠졌다. 부상과 결장, 그리고 불화의 결과는 결국 바이아웃이었다.


사실 필라델피아는 제2의 샤킬 오닐이라 불리는 그렉 오든을 노리고 있는 상태다. 아이버슨을 트레이드 한 것 역시 마찬가지 맥락이었다. 이런 팀에 이제 인저리 프론 베테랑의 설자리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 역시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드래프트 전체 1번픽, 신인왕, 올스타 5회, 그리고 MVP 후보로도 여러 차례 언급됐던 선수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확실히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전체 30개 NBA 팀 가운데 최대 17개 팀이 웨버 영입에 관심을 보일 만큼, 아직도 웨버는 분명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다. 이젠 NBA에서 두 번째로 많던 몸값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 더더욱 그렇다.


웨버는 바이아웃 후 인터뷰에서 챔피언십을 노릴 수 있는 팀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한 바 있다. 그 가운데 고향팀 디트로이트와 마이애미가 가장 강력한 후보로 언급되고 있는 상태다. 마이애미로 가게 되면, 드래프트 당시에 가능했던 샤크-웨버 조합을 볼 수 있다. 어느 팀이 되었든, C-Webb의 모습으로 유니폼을 벗는 크리스 웨버를 꼭 한 번 더 만나고 싶다.


찰스 바클리를 압도했던 그 날 밤 시작된 사랑이 또 하나의 찰스 바클리를 낳는 결말로 끝나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내게 크리스 웨버는, 그날 밤 바클리를 압도하던 바로 그 애송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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