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야구팬도 승리투수를 짐작하는 게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7일 대전 경기 승리투수는 kt 조무근(23)이었지만 이 경기를 중계한 SPOTV 해설진은 김재윤(25)을 불러다가 "데뷔 첫 승을 축하한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김재윤 본인이 "(조)무근이가 승리투수인 줄 알았다"고 인터뷰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승리투수와 패전투수를 결정하는 방식을 담고 있는 야구 규칙 10.19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10.19 (c) 선발투수가 앞의(a), (b)항 규정에 의하여 승리투수가 되지 못하고 2명 이상의 구원투수가 출전하였을 경우 다음을 기준으로 승리투수를 결정한다.
(1) 선발투수가 던지고 있는 동안 승리 팀이 리드를 잡고 그 리드가 경기 끝까지 이어졌을 경우 승리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투구를 하였다고 기록원이 판단한 1명의 구원투수에게 승리투수를 기록한다.
(2) 경기 도중 동점이 되면 투수의 승패 결정에 관한 한 경기는 새로 시작되는 것으로 취급한다.
(3) 상대팀이 일단 리드를 잡으면 그때까지 투구한 모든 투수는 승리투수의 결정에서 제외된다. 단, 상대 팀에 리드를 내준 투수가 계속 던져 자기 팀이 리드를 되찾고 그 리드가 최후까지 유지되었을 경우 그 투수에게 승리투수의 기록이 주어진다.
(4) 구원투수가 던지고 있는 동안 리드를 잡고 그 리드가 경기 끝까지 유지되었을 경우 그 구원투수에게 승리투수를 기록한다.
[예외] 구원투수가 잠시 동안 비효과적인 투구를 하고 그 뒤에 나온 구원투수가 리드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인 투구를 하였을 경우 나중의 구원투수에게 승리투수를 기록한다.
그러니 SPOTV 중계진이 이 경기에서 1이닝을 던진 조무근보다 2이닝을 던진 김재윤이 더 효과적인 투구를 했다고 판단했다면 김재윤이 승리투수였다고 착각해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겁니다.
거꾸로 패전투수를 결정하는 건 상대적으로 쉬운 일입니다. 야구 규칙에도 달랑 한 문단뿐입니다.
10.19 (e) 투수가 자기 팀이 스코어상 뒤진 상태에서 교체되거나 교체된 뒤 자기 실점 때문에 팀이 리드를 내주고 난 뒤 한 번도 동점을 만들거나 역전시키지 못했을 경우 투구횟수의 장단에 상관없이 그 투수를 패전투수로 기록한다.
이 때문에 야구 좀 보신 분이라면 그 경기 패전투수가 누군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패전투수를 결정하는 데 30분이 넘게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런 일이 벌어진 건 15년 전 오늘(9일) 인천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에서는 LG하고 SK가 맞붙었습니다. 헷갈리는 상황이 나온 건 5회초. SK 선발 강희석(41)은 5-4로 앞서던 5회초에 주자 2명을 남겨두고 물러 났습니다. 이 두 명이 모두 득점하면 (그 뒤 SK가 경기를 뒤집지 못하면) 일단 강희석이 패전투수가 되는 상황이었죠.
강병철 감독이 올린 두 번째 투수는 '까치' 김정수(53). 김정수는 첫 상대 타자였던 김재현(40)에게 안타를 내줘 주자 만루 위기를 맞았습니다. 다음 타자 이병규(9번·41)는 투수 앞 땅볼로 1-2-3 병살타. 강희석이 내보낸 이종열(42)하고 타자 주자 이병규가 죽었습니다.
이제 2사 2, 3루에 SK가 계속 5-4로 앞선 상황. 강 감독은 김정수를 내리고 유현승(44)을 마운드에 올렸습니다. 외국인 타자 쿡슨(46)과 상대한 유현승은 2볼로 볼카운트가 몰리자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갔고 공이 가운데로 몰렸습니다. 쿡슨은 시원하게 연타석 3점 홈런을 때려냈고 LG가 7-5 리드를 잡았습니다.
두 팀은 이후에도 득점을 올렸지만 리드가 바뀐 적은 없었고 경기는 결국 13-8 LG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면 5회에 공을 던진 SK 투수 중에서 패전투수가 나와야 하는 상황. 여러분 공식기록원이라면 누구에게 패전투수를 기록하시겠습니까.
일단 위에서 본 야구 규칙 조항에 따라 5-6이 되는 순간 득점에 성공한 주자를 책임져야 하는 투수가 패전투수가 되어야 할 겁니다. 이 점수를 올린 주자는 김재현이었고, 김재현은 내보낸 건 김정수였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김정수를 패전투수로 기록하면 그만인 상황.
하지만 SK 구단기록원 생각은 달랐습니다. 김정수는 주자를 내보내기는 했지만 병살타를 유도해 강희석이 책임져야 할 주자 한 명을 지웠기 때문에 김정수에게 패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죠. 이 경기 기록을 맡은 김태선 공식기록원은 나머지 구장에 있는 기록원들에게 전화로 물어봤지만 역시 의견이 반반으로 나뉜 상황. 이렇게 30분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러면 제일 난리가 나는 건 기자들입니다. 야구 기자들은 경기가 끝나면 보통 5분 안에 기사와 전적표를 보내야 합니다. 결국 공식기록원은 규정대로 김정수를 패전투수로 기록했습니다. '효과적인 투구'를 선보이기도 패전투수가 되어야 했던 김정수로서는 분명히 억울한 상황이었겠지만 규정은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김정수가 아니라 강희석이 패전투수가 됩니다. 2000 시즌이 끝난 뒤 구단 기록원과 공식 기록원이 한 자리에 모이는 합동 세미나에서 규정을 손질했기 때문입니다. 2000년까지는 구원 투수가 병살타를 유도해도 앞선 투수가 남긴 주자 - 이 경우에는 이종열 - 부터 지우는 방식이었지만 구원 투수에게 유리하게 바뀐 겁니다.
야구 규칙 10.18(g)(3) 투수 갑이 A를 4구로 내보내고 을로 교체되었다. A는 B의 단타로 3루까지 달린 후 C의 유격수 앞 땅볼 때 본루에서 아웃되었다. 1사 1·2루. D는 플라이 아웃, E가 단타를 쳐 B가 득점했다. ☞ 투수 갑의 실점
이 경우 야구팬들 통념대로라면 B가 올린 득점은 투수 을의 자책점이 되어야 하지만 새 규정에 따라 A가 내준 점수가 되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기록을 소급 적용해 김정수에게 기록했던 패전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그제 쓴 것처럼 역시나 야구 규칙이야 말로 야구가 진화한 결과물입니다.
※지난 번처럼 이번에도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기록지까지 받아서 발제했지만 지면에 잡히지 않아 블로그 포스트로 대신합니다. 슬슬 KBO 홍보팀에 미안해 지네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