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론 블롬버그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다. 아니, 안심하시라. 이 전직 메이저리거 이름을 모른다고 크게 잘못된 일 같은 건 없으니 말이다. 메이저리그 통산 타율 .293, 52홈런, 224타점을 올린 선수 이름까지 줄줄 외우고 있으라는 건 태평양 건너에 사는 야구팬에게는 조금 잔혹한 요구일 터.

그래도 모르면 병이고 알면 약이다. 배리 본즈는 762 홈런을 치고도 미 프로야구(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블롬버그가 썼던 방망이(사진)는 명예의 전당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확히는 블롬버그가 1973년 4월 6일 펜웨이파크 첫 타석에서 썼던 방망이다. 이 방망이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파울도 원래 스트라이크가 아니었다.

40년 전 오늘 메이저리그 24개 모든 팀 구단주들이 시카고에 모였다. 찰리 O. 핀리 오클랜드 구단주는 나머지 23개 팀 구단주들을 설득하기 바빴다. 내셔널리그(NL) 소속 12개 팀 구단주들은 못 마땅한 표정을 숨지기 않았다. 아메리칸리그(AL) 팀 구단주들은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분위기. 이날 오클랜드 구단주는 "야구는 9명이 하는 종목"이라는 절대 명제에 도전했다. 그는 투수를 대신해 타격만 하는 지명대타(DPH·Designated Pinch-Hitter)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야구는 1903년 이후 가장 큰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1903년부터 2스트라이크 이전에 나온 파울볼을 스트라이크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안경 낀 변호사' 보위 쿤 커미셔너는 반대 목소리가 거센 NL은 제쳐두고 AL 구단주들만 표결 참여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구단주들도 이에 동의했다. 투표 결과는 8-4로 가결. 당초 이날 표결 결과는 3년 동안만 DPH 제도를 시범 실시할 예정이었지만 4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지명타자(DH·Designated Hitter) 제도를 규정한 야구규칙 6.10 - 각 팀은 경기마다 투수를 대신하여 타격할 타자를 지명할 수 있다 – 은 유효하다. 아니, 이제는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리그가 오히려 소수가 됐다.

누가 처음 지명타자라는 아이디어를 꺼냈는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20세기 초반 이미 지명타자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있던 건 확실하다. 1906년 코니 맥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이 팀이 나중에 캔자스시티를 거쳐 오클랜드에 안착한다.) 감독도 투수를 대신해 타격하는 선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별로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1929년에는 스프링캠프 때 내셔널리그에서 지명타자 제도를 실험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한때 불장난이었을 뿐 제대로 된 제도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1970년대 초반 다시 이 아이디어가 고개를 든 건 1960년대 후반부터 지독한 투고타저가 이어진 때문이었다. 특히 AL이 심했다. 1968년 AL 타율 1위를 차지한 칼 야스트렘스키(보스턴 레드삭스)의 기록은 .301밖에 안 됐다. 리그 평균 타율이 .230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마운드 높이를 15인치(38.1㎝)에서 10인치(25.4㎝)로 낮추는 것과 동시에 타격만 하는 선수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위에 등장한 블롬버그는 지명타자 포지션으로 공식 경기에 나선 첫 번째 선수였다. (결과는 볼넷이었으니 저 방망이가 어떤 결과를 냈던 건 아니다.)

지명타자 제도는 곧바로 효과를 나타냈다. 1972년 0.239이던 리그 평균 타율은 0.259로 2푼 올랐다. 반면 NL은 .248에서 .254로 큰 변화가 없었다. 지명타자 도입 이후 40년간 경기당 평균 득점도 AL 4.65점, NL 4.34점으로 AL쪽이 높다. 어떤 의미로든 지명타자 제도가 야구를 좀더 공격적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투수들도 타격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면서 투수력도 같이 향상됐다는 주장도 있다.)

To DH or Not To DH

사실 지명타자 제도 찬반 논란은 1973년 이날부터 오늘까지 계속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찬성이나 반대로 의견이 기울었다면 이 제도가 세상에 아예 없거나, 아니면 모든 리그에서 이 제도를 도입했을 것이기 때문. 미국 4대 프로 스포츠 중에서 양대 리그 혹은 콘퍼런스가 서로 다른 규칙을 쓰는 건 메이저리그가 유일하다.

지명타자 제도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공격력 향상 이외에도 부상이나 노쇠화 등으로 수비 능력을 잃어버린 이들이 선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한다. 최근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한 랜스 버크만은 지명타자 제도가 없었다면 아마 은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터. 게리 셰필드도 NL에서 뛸 때는 지명타자 제도에 부정적 견해를 드러냈지만 결국 AL에서 지명타자로 커리어를 마감했다.

거꾸로 지명타자에 반대하는 이들은 지명타자 제도가 반쪽짜리 선수들을 양산한다고 비판한다. 유독 투수와 지명타자만 어느 한 쪽에 치우쳐야 할 이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는 목소리다. 투수 타석에 어떤 대타를 기용하고 이어서 어떤 투수를 마운드에 올려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야구 재미의 일부분이라는 의견도 있다. 감독 씹는 맛이 하나 사라지는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올해 유독 지명타자가 논란이 된 건 비단 제도 도입 40주년 때문만은 아니다. 올해부터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NL에서 AL로 옮긴다. 즉, 양 리그가 모두 홀수팀(15개 팀)으로 구성되는 것. 이에 따라 인터리그 경기가 예년보다 확대 편성된다. NL팀도 로스터에 지명타자를 넣어야 할 경우가 늘어나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NL팀이 불리할 공산이 크다.

왜 그럴까? AL에서 지명타자로 나서는 선수는 원래 팀에서 아홉 손가락 안에 드는 타자다. 반면 NL은 팀내 최고 타자를 지명타자로 쓴다고 해도 원래 주전이 아니었던 선수를 로스터에 넣어야 한다. AL팀은 타자 9명을 기본으로 로스터를 짜는 반면 NL은 8명인 것. 인터리그 제도가 시작된 이후 상대전적에서 AL팀이 2081승 1883패(승률 .525)로 앞서 있다는 게 그 방증이다. 홈구장에 따라 지명타자 제도를 쓰거나 쓰지 않은 1986년 이후 월드시리즈 성적 역시 AL이 14승 11패(승률 .560)로 앞서 있다. (그 전까지는 격년제였다.)

NL은 앞으로 언젠가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하게 될까? 역시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리그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답은 'Yes'일 확률이 높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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