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역시 롯데는 롯데답고, LG 역시 LG다웠습니다. 프로야구 두 팀이 27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팬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경기를 남겼습니다. 이날 경기가 그저 7년 만에 처음 무박 2일 동안 치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또 이튿날도 연장 12회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이 경기는 이 경기 자체로 엘꼴라시코가 무엇인지 완벽하게 보여줬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엘꼴라시코를 접한 초짜 야구팬이 있다면 아마 이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혀 몽유병 환자처럼 사직을 찾게 될 겁니다. 역시 세상에는 롯데와 LG가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엘꼴라시코는 프로야구팬들이 LG-롯데 라이벌전에 붙여준 별명. 이럴 때 자주 하듯이 제가 썼던 기사 내용을 가져와 보면:


'엘'은 LG를 뜻하고 '꼴"은 롯데가 4년 연속 최하위에 그쳤던 2000년대 초반 '꼴데'라고 놀림 받던 데서 유래했다. '라시코'는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가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가 맞붙는 '엘 클라시코(El Clásico)'에서 따왔다.


(네, 제가 무려 신문 기사에 엘꼴라시코라는 표현을 쓰는 남자입니다. 이 기사에만 그렇게 쓴 것도 아닙니다. 이 기사에도 엘꼴라시코가 등장합니다.)


롯데는 2001년부터 그 유명한 '888-8577'을 찍었습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최종 순위가 저랬다는 뜻입니다. 롯데가 '꼴떼'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 과정입니다. 이제 이 부산 연고 프로야구 팀을 롯데라고 부르는 건 점잔빼는 기자들뿐입니다. 저는 조만간 구단 고위 관계자를 통해 공식적으로 롯데 그룹에 사명 전체를 꼴데로 바꿀 것을 건의할 예정입니다.


사실 롯데에 저 영광스러운 별명을 붙여준 것부터 LG였습니다. 그러니까 엘꼴라시코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롯데는 꼴데가 되지 않았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LG가 있기에 꼴데가 있고, 꼴데가 있기에 엘꼴라시코가 있습니다. 


롯데는 2001년 10월 2, 3일 LG에 연달아 패하면서 59승 4무 70패(승률 .457)로 최하위를 확정했습니다. 7위 SK가 60승 2무 71패(승률 .458)이었으니까 LG가 롯데에 한번만 져줬더라면 꼴데는 탄생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엘꼴라시코라는 표현이 세상에 등장하기 전부터 두 팀 사이에 양보란 없었습니다. (2001년 이전에 롯데가 마지막으로 최하위·7위를 기록했던 건 1989년. 이때까지는 아직 LG라는 프로야구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엘꼴라시코라는 표현이 생기기 전부터 존재했던 그 엘꼴라시코 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곳은 명색이 세이버메트릭스를 지향하는 블로그니까 역시 세이버메트릭스로 알아보겠습니다. 도구로 쓸 건 승리 기댓값(WP·Win Probability)이라는 녀석입니다. 또 한번 제가 쓴 기사 인용:


크리스토퍼 세아라는 미국 야구 통계학자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열린 메이저리그 경기 3만2767경기를 분석해 이닝, 아웃카운트, 점수 차에 따라 각 팀의 승리 확률을 계산했다. 그 뒤 여러 학자가 통계적인 보정을 거쳐 언제 어느 때나 팀의 승리 확률을 알아낼 수 있는 WP를 정리했다. WP는 플레이 하나 하나마다 변한다. 이 때문에 1회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 한 팀의 WP를 죽 이어 그래프로 그리면 경기 흐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그래픽 참조).


실제로 그린 비(非)엘꼴라시코 경기 WP 그래프는 이 포스트이 포스트 등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직접 WP 그래프를 그렸다는 것부터 평범한 경기는 아니었다는 뜻이기는 하지만 엘꼴라시코에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역대 엘꼴라시코 명승부를 통해 엘꼴라시코 정신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Are You Ready?


먼저 엘꼴라시코 시발점이라고 불리는 2005년 5월 26일 잠실 경기 그래프부터 보겠습니다.



이때는 아직 안경현 현 SBS스포츠 해설위원이 현역이던 시절이지만 그가 자주 이야기하는 진리는 그대로였습니다. "야구는 오래 이기고 있을 필요 없어요. 마지막에만 이기면 됩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잠실 라이벌 LG가 롯데와 엘꼴라시코를 치르는 걸 지켜보면서 저 진리를 새삼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이 경기에서 4회말이 끝났을 때 롯데는 0-8로 뒤져 있었지만 5회초 공격 한번에 8-8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7회가 끝났을 때는 다시 8-11로 뒤진 롯데였지만 8회 1점을 뽑으면서 9회 4점으로 쾅! 이 경기에서 역전 2점 홈런을 친 건 최준석(34)이었습니다. 역시 엘꼴라시코 마약은 못 끊습니다. 두산으로 건너 갔던 최준석(34)이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자마자 괜히 다시 롯데로 돌아온 게 아닙니다.


요컨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가 엘꼴라시코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이겁니다.


이 그래프가 익숙하지 않으신 분께 설명드리자면 위에 있는 선 그래프는 각 상황에서 해당 팀이 승리할 수 확률을 나타냅니다. 그래프가 위쪽으로 뻗으면 이길 확률이 올라가는 거고 아래 쪽은 반대입니다. 아래 있는 막대 그래프는 '레버리지 인덱스(Leverage Index·LI)'라고 그 시점이 경기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지표를 정리한 겁니다.


엘꼴라시코 두 번째 정신은 남이 하는 건 나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디 롯데만 9회에 역전승을 거뒀겠습니까. 2006년 8월 16일 잠실 경기 WP 그래프를 보실까요?



LG는 아예 끝내기로 이겼습니다. 그것도 9회말 시작 때 4-9로 뒤져 있었는데 9회말에만 6점을 뽑아서 10-9로 경기를 뒤집었습니다. 거꾸로 잘 나간다고 절대 안심하지 마세요. 사실 롯데는 9회말 2아웃까지만 해도 9-7로 앞서 있었습니다. 문제는 만루였다는 것. 여기서 정의윤(31·현 SK)에게 끝내기 싹쓸이 안타를 맞는 게 야구고, 인생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회가 오기 전까지 참고 기다릴 필요도 있습니다.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일했다는 평가를 받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는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害)가 자기 몸에 미친다"고 했습니다. 지난해 4월 12일 잠실 경기는 바로 이 정신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 경기는 1회에 양팀이 각각 4점, 3점을 뽑으면서 '오늘도 심상치 않다'는 냄새를 풍겼던 건 사실. 그래도 '경거망동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은 양팀은 곧바로 무사장구에 돌입합니다. 6회초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롯데 4-3 LG로 평범한 경기처럼 보이게 만들었죠.


그때 참지 못한 LG가 6회말 5점을 뽑으면서 8-4로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롯데라도 멈췄으면 좋았을 텐데 7회초에 곧바로 4점을 뽑아 다시 8-8 균형을 맞추고야 말았습니다. LG는 7회말 3점을 뽑으면서 '오늘은 꼭 이기겠다'는 사인을 보냈지만 롯데는 눈치 없이 9회초에 11-11 동점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결국 롯데는 이날 정대현(39)을 제외한 모든 불펜 투수를 마운드에 올리고도 10회말 정주현(27)에게 끝내기 희생플라이를 얻어 맞으면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끝내기를 내준 투수는 다름 아닌 FA 시장에서 60억 원을 주고 사온 손승락(35). 결국 롯데는 다음날 경기에서 린드블럼(30)을 내고도 3-5로 패한 건 물론이고, 손승락은 시즌 내내…


원래 이 모든 엘꼴라시코 정신을 집약한 경기가 2010년 7월 3일 잠실에서 열렸더랬습니다. WP 그래프만 봐도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그래프는 '인생은 실전이야, x만아'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날 양 팀은 8명씩 투수 16명을 내보냈는데 제일 오래 던진 게 3이닝을 소화한 롯데 선발 이재곤(29)이었습니다. 또 전체 22이닝(11회×초말) 동안 16이닝(72.7%)에서 점수가 났으며, 1~11회로 따지면 10회에만 점수가 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 엘꼴라시코에서 더 잘못을 많이 한 건? 역시 LG였습니다. 롯데가 치고 나가려고 할 때마다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곧바로 덤볐으니까요. LG는 이튿날 역시 롯데에 패한 걸 비롯해 이후 5경기에서 1승 4패에 그쳤습니다. 엘꼴라시코에서는 역시 잘 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이 2010년 7월 3일 경기를 능가하는 엘꼴라시코는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너무도 섣부른 판단이었죠. 이제 우리 주인공 게임을 만나볼 차례. 27일 사직 경기 WP 그래프입니다.



얼핏 봐도 우리가 이야기한 모든 게 녹아 있습니다. 그래프 위에 점수를 쓰는 간단한 편집조차 엘꼴라시코 정신에 해가 될까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특히 WP와 LI가 동시에 상승하는 롯데 10회말 공격은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연장에서 5점 차이를 뒤집는 데 성공한 건 프로야구 역사상 이 경기 롯데가 처음입니다.


누군가는 엘꼴라시코를 두고 '병림픽(x신+올림픽)'이라는 인터넷 신조어를 쓰기도 합니다. 감히 말씀 드리건대 롯데와 LG 선수들이 이 경기를 통해 우리에게 남기고자 하는 정신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엘꼴라시코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실제로 천국이 아니라 시궁창 같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데도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는 천국만보여달라고 고집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부탁하건대, 제발 야구 좀 야구답게 하란 말이다, 이것들아! 


이런 글처럼 개그 톤으로 쓰고 싶었는데 실패했습니다. 역시 엘꼴라시코는 성공보다 실패에 더 가까운지도 모를 일. 쓴 게 아까워 남겨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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