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이라면 복식 우승 기념 촬영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사진입니다. 프랑스 오픈 테니스 대회 여자 단식 우승 트로피인 '수잔 렝클렌 컵'을 들고 있는 옐레나 오스타펜코(20·라트비아·세계랭킹 47위·오른쪽)하고 준우승자 시모나 할레프(26·루마니아·4위)가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까요. 적어도 21세기 들어 메이저 테니스 대회 여자 단식 결승전에서 맞대결 선수가 똑같은 옷을 입고 경기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두 선수가 똑같은 옷을 입고 경기에 나선 건 나란히 아디다스에서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차림은 이번 프랑스 오픈을 겨냥아디다스에서 4월 공개한 디자인입니다. 그렇다고 아디다스에서 올해 클레이 코트 시즌을 맞아 내놓은 테니스 드레스 디자인이 이것 하나뿐인 건 아닙니다. 


이 대회 '디펜딩 챔피언' 가르비녜 무구루사(24·스페인·7위) 역시 아디다스에서 후원을 받고 있는데 그는 이렇게 흑백 계열을 선택했습니다. (무구루사가 가슴에 있는 아디다스 로고를 가린 건 우연인가 노린 건가.) 역시 '아디다스 팀'인 캐럴라인 보즈니아키(27·덴마크·12위)은 빨강 계열을 선택했습니다. 


할레프나 오스타펜코 둘 중 아무나 이런 디자인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둘 모두 앙겔리크 케르버(29·독일·2위)가 '표지 모델'인 녹색 계열을 골랐고, 하필 두 선수가 나란히 결승에 올라가게 된 겁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할레프는 케르버와 함께 녹색 계열 '공동 커버걸' 정도 됩니다. 애초부터 '케르버-할레프 2017 아디다스 롤랑 가로'가 디자인 이름이거든요. 굳이 한 명이 다른 걸 골라야 오스타펜코가 고르는 게 맞았을 겁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께 설명하자면 롤랑 가로·Roland Garros는 프랑스 오픈이 열리는 경기장 이름이자 이 대회 공식 명칭입니다. 가로는 원래 제1차 세계대전 때 이름을 날린 프랑스 비행기 조종사로 이름입니다.) 


저 디자인 이름에서 알 수 있는 사실 한 가지는 테니스 선수들이 대회 내내 똑같은 옷차림으로 뛴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선수 사진을 볼 때 입고 있는 옷이 무엇인지 알면 어떤 대회 사진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선수들이 대회 내내 똑같은 유니폼을 입는 이유는 뭘까요? 매일 다른 옷을 입고 경기장에 나오면 안 되는 걸까요?


테니스 메이저 대회에서는 여섯 번만 이기면 단식 챔피언이 됩니다. 그러니 이번처럼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사태를 대비해 '얼터너티브 유니폼'을 만드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입니다. 용품 제조 업체에서 대회 때마다 새 디자인을 내놓는 건 선수들 보고 입으라는 뜻도 있지만 일반 소비자에게 팔려고 이 선수들을 '모델'로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스폰서 쪽에서만 똑같은 옷을 계속 입으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유니폼을 갈아 입기 싫어하는 선수들도 적지 않습니다. 징크스 때문이죠. 2013년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테니스 선수들은 대회 때마다 똑같은 호텔 똑같은 방에서 자고, 똑같은 샤워 부스에서만 몸을 씻기도 합니다. 서브를 넣을 때마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선수도 있습니다.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도 이 정도인데 경기복은 말할 것도 업습니다.  


규정도 문제가 없습니다. 흑백 TV 시청자를 배려해 서로 대비가 분명한 유니폼을 입고 뛰도록 규정하고 있는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과 달리 테니스에는 그런 규정이 아예 없습니다. 윔블던은 아예 모든 선수가 흰 옷만 뛰도록 못 박고 있는데 다른 대회에 맞대결을 벌이는 선수는 서로 색깔이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고 '드레스 코드'를 만드는 것도 2% 이상한 일일 테고 말입니다. 


그래도 랭킹이 높은, 그래서 토너먼트 때 오래 살아 남을 선수들은 주요 대회 때마다 자 시그니처(signature) 디자인을 선물 받기 때문에 메이저 대회 결승전에서 똑같은 옷차림을 한 선수를 보기는 힘든 게 사실입니다.


대신 아직 많은 선수가 남아 있는 토너먼트 초반에는 이런 일이 생길 확률이 올라 갑니다. 올해 호주 오픈 3라운드 때 티메아 바신즈키(28·스위스·31위·사진 왼쪽)하고 다리아 가브릴로바(23·호주·24위)가 신발까지 똑같은 차림으로 경기를 치른 적이 있습니다. 2014년 프랑스 오픈 때는 현재 남자 랭킹 1위 앤디 머리(30·영국)도 같은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선수들이 좀더 개성적인 유니폼을 입고 코트에 나서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광경을 보기가 더욱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세리나 윌리엄스(36·미국·4위) 마리야 샤라포바(30·러시아·178위) 같은 선수들이 나이키와 계약을 맺으면서 다른 선수들도 '기성품'을 널리 입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청반바지에 형광 티셔츠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나와 문자 그대로 '야생마'처럼 코트를 휘젓고 다니던 앤드리 애거시(47·미국) 같은 선수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선수들에게 돈을 벌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법.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36·스위스·5위)는 지난해 상금으로 600만 달러(약 67억5000 원), 광고 수입으로는 10배 가까운 5800만 달러(약 652억5000만 원)를 벌었습니다. 또 시그니처 디자인이 나오지 않을 만큼 실력이 없다고 최첨단 소재로 만든 운동복을 입지 말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어찌됐든 '신상'은 '신상'이니까요.


그래도 선수들 개성이 사라지는 것뿐 아니라 TV 시청자에게도 예의가 아닌 건 사실. 굳이 바꿔야 한다면 적어도 (윔블던을 제외하고) 메이저 대회 결승전 정도는 두 선수가 같은 차림을 하고 코트에 나설 수 없다는 내용을 규정에 포함시키면 어떨까요? 위에서는 윔블던이 있어 안 된다고 했지만 결승전 마지막 세트에 타이브레이커를 적용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니 정 대안을 찾을 수 없다면 이런 방식이 아주 틀린 접근법은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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