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3일 세상을 떠난 '미스터' 나가시마 시게오. 아사히(朝日) 신문 제공

그저 '미스터 요미우리(讀賣)'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미스터 프로야구'도 그를 담기엔 작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미스터' 세 글자로 불렀습니다.

 

'미스터'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 전 요미우리 감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미우리 구단은 나가시마 종신 명예 감독이 폐렴으로 3일 오전 6시 39분 도쿄(東京)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고 알렸습니다. 향년 89세.

 

데뷔전에서 고쿠테쓰(國鐵) 에이스 가네다 마사이치(金田正一·김경홍·1933~2019)에게 4연타석 삼진을 당한 나가시마 시게오 전 감독. 아사히(朝日) 신문 제공

1958년 요미우리에 입단한 나가시마 전 감독은 이해 130경기에 모두 출전해 타율 0.305에 29홈런(1위), 92타점(1위)을 기록하면서 센트럴리그(CL) 신인상을 차지했습니다.

 

나가시마 전 감독은 그해 8월 6일 히로시마(廣島)를 상대로 개인 첫 4번 타자 출전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요미우리 제24대 4번 타자가 된 나가시마 전 감독은 1974년 은퇴할 때까지 1460경기에 4번 타자로 선발 출전했습니다.

 

요미우리 역사상 가와카미 데쓰하루(川上哲治·1920~2013) 딱 한 명만 이보다 선발 4번 타자 출전 경기(1658경기) 숫자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통산 868홈런(1위)을 친 오 사다하루(王貞治·왕정치·85) 소프트뱅크 구단 회장보다도 나가시마 전 감독이 4번 타자 선발 출전 기록이 더 많습니다.

 

이승엽은 요미우리 제70대 4번 타자

오 회장은 입단 4년 차였던 1962년 개막전이 되어서야 요미우리 제28대 4번 타자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이후 오 회장과 나가시마 전 감독이 번갈아 4번 타자 자리를 맡으면서 두 선수 이름 머리글자를 딴 'ON포(砲)'가 불을 뿜기 시작합니다.

 

나가시마 전 감독과 오 회장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309/.419/.599에 651홈런, 1839타점을 합작했습니다.

 

그리고 4번 타자에서 사령탑으로 변신한 가와카미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던 이 기간 요미우리는 9년 연속 니혼이치(日本一·일본시리즈 우승) 기록을 남겼습니다.

 

1974년 주니치(中日)에 밀려 10회 연속 우승에 실패한 뒤 나가시마 전 감독은 17년 프로 선수 생활을 마감합니다.

 

은퇴 기념식에서 팬들에게 인사하는 나가시마 전 감독. 아사히(朝日) 신문 제공

요미우리는 그해 10월 14일 당시 안방 고라쿠엔(後樂園) 구장에서 나가시마 전 감독 은퇴 기념식을 진행했습니다.

 

나가시마 전 감독은 이 자리에서 "저는 오늘 은퇴를 하지만 저희 거인군은 영원히 불멸입니다(私は今日引退をいたしますがわが巨人軍は永久に不滅です)"라고 말했습니다.

 

나가시마 전 감독은 프로 무대에 데뷔한 1958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17년 동안 단 한 번도 CL 3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또 데뷔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CL 3루수 부문 올스타 득표 1위를 기록했습니다.

 

이와 함께 일본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는 네 번(역대 1위), 정규시즌 MVP로는 다섯 번(2위) 뽑혔습니다.

 

선수 은퇴 이듬해 요미우리 사령탑을 맡은 나가시마 전 감독. 아사히(朝日) 신문 제공

요미우리는 1975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가와카미 감독을 전무로 승진시키면서 나가시마 전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습니다.

 

나가시마 전 감독은 은퇴 시점에 이미 플레잉 코치로 뛰고 있었지만 '실전'은 달랐습니다.

 

요미우리는 그해 47승 7무 76패(승률 .382)에 그치면서 팀 역사상 처음으로 최하위까지 추락합니다.

 

1976년, 1977년 연이어 CL 우승에 성공하면서 비판 여론을 돌리는 데 성공했지만 일본시리즈에서는 2년 연속으로 퍼시픽리그(PL) 챔피언 한큐(阪急·현 오릭스)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나가시마 전 감독은 끝내 니혼이치 타이틀을 얻지 못한 채 1980년을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습니다.

 

니우라 히사오와 나가시마 전 감독. 아사히(朝日) 신문 제공

나가시마 전 감독 재임 기간 요미우리 마운드에는 '나가시마의 양아들'이라는 소리를 듣던 왼손 투수 니우라 히사오(新浦壽夫·74)가 있었습니다.

 

니우라는 1976년부터 1979년까지 202경기에 등판해 4년 연속으로 두 자릿수 승리와 두 자릿수 세이브를 기록했습니다.

 

1977, 1978년에는 2년 연속으로 CL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하면서 = 규정 이닝을 채우면서 세이브왕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몸이 망가져 팀 내 입지가 좁아진 니우라에게 나가시마 전 감독은 한국행을 권합니다.

 

재일교포 집안에서 태어나는 니우라는 그렇게 김일융이라는 이름으로 삼성 유니폼을 입고 한국 프로야구에서 3년간 활약하게 됩니다.

 

1994년 센트럴리그 우승 후 헹가를 받고 있는 나가시마 전 감독. 아사히(朝日) 신문 제공

나가시마 전 감독은 이후 다른 구단에서 감독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요미우리 감독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고 있었던 것.

 

요미우리는 선수는 물론이고 지도자로 다른 팀 유니폼을 입은 적이 있는 인물은 감독으로 선임하지 않는 순혈주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가시마 전 감독은 결국 1993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제13대 사령탑으로 팀에 복귀하게 됩니다.

 

그리고 복귀 이듬해(1994년) 일본시리즈에서 세이부(西武)를 꺾고 니혼이치에 오릅니다.

 

2000년 일본시리즈에서 맞대결을 벌인 오 사다하루 당시 다이에 감독과 나가시마 전 감독. 아사히(朝日) 신문 제공

나가시마 전 감독이 요미우리를 다시 일본시리즈 무대로 이끄는 데는 6년이 걸렸습니다.

 

2000년 일본시리즈 맞대결 상대는 오 회장이 지휘봉을 잡고 있던 다이에(현 소프트뱅크)였습니다.

 

요미우리는 당시 1, 2차전을 연달아 패했지만 이후 4연승을 거두면서 니혼이치에 올랐습니다.

 

나가시마 전 감독은 2001년 '올해를 마지막으로 물러나겠다'고 밝혔고 그해 9월 28일 결국 현역에서 물러나면서 종신 명예 감독이 됐습니다.

 

나가시마 전 감독은 퇴임 기자회견에서 '야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야구라는 스포츠는 인생 그 자체입니다(野球というスポーツは人生そのものです)"라고 답했습니다.

 

일본 대표팀 사령탑 시절 나가시마 전 감독. 아사히(朝日) 신문 제공

나가시마 전 감독은 이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야구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합니다.

 

프로야구 출신 인물이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은 건 나가시마 전 감독이 처음이었습니다.

 

일본은 삿포로(札幌)에서 열린 2003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아테네행 티켓을 따냅니다.

 

문제는 나가시마 전 감독이 2004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것.

 

결국 올림픽 때는 나카하타 기요시(中畑淸·71) 수석코치가 나가시마 전 감독을 대신해 팀을 이끌게 됐습니다.

 

2020 도쿄 올림픽 개회식 때 성화 봉송을 맡은 나가시마 전 감독. 아사히(朝日) 신문 제공

그렇다고 나가시마 전 감독이 올림픽과 끝내 인연을 맺지 못한 건 아닙니다.

 

나가시마 전 감독은 (실제로는 2021년에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개회식에 오 회장 그리고 마쓰이 히데키(宋井秀喜·51)와 함께 성화 봉송 주자로 참가했습니다.

 

나가시마 전 감독은 요미우리가 LA 다저스와 프리시즌 게임을 치른 올해 3월 15일에도 도쿄돔을 찾았습니다.

 

나가시마 전 감독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5월 이후에는 건강 악화로 중환자실 생활을 이어가다 결국 숨을 거뒀습니다.

 

헛스윙을 하면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힘차게 방망이를 휘두른 나가시마 전 감독. 아사히(朝日) 신문 제공

일본 프로야구는 교진(巨人·요미우리)과 안티 교진으로 나뉜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가시마 전 감독이야말로 교진의 표상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7년까지 요미우리가 안방으로 쓰던 고라쿠엔 구장 3번 출입구 이름은 '나가시마 게이트'였습니다.

 

현재 안방 도쿄돔도 1998년부터 3루 측 출입구를 나가시마 게이트라고 부릅니다.

 

야마구치 도시카즈(山口壽一·68) 요미우리 신문 대표이사는 "나가시마 전 감독은 불타는 남자의 승부욕과 태양 같은 눈부심이 있던 인물"이라고 평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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