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꽃' 남자마라톤에서 세계최고기록을 세웠지만 금메달리스트는 침통하기만 했다. 국가(國歌)가 울려 퍼질 때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같은 나라에서 온 동메달리스트도 마찬가지였다.
모국의 한 신문사는 메달 획득을 보도하면서 유니폼 앞자락에 또렷했던 국기(國旗)를 지운 사진을 내보냈다.
이 금메달리스트는 베를린 올리픽 우승 기념 서명판에 한글로 또렷하게 '손긔졍'이라고 적었다.
상록수를 쓴 심훈은 축시(祝詩)를 통해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 외치고 싶다. 이래도, 이래도, 너희는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하고 절규했다.
하지만 조선 청년 손기정은 약했다. 일제는 곧바로 손기정을 불러다 선전 음반을 만들었다.
이 음반은 "저는 손기정입니다. 우리들은 진정한 책임을 지고 8월9일 오후 스따뜨에 나섰습니다"는 말로 시작한다.
손기정은 담담한 목소리로 베를린 올림픽을 회고한다. 출발 이후 줄곧 1위를 달리던 아르헨티나 선수를 제치는 장면도 묘사한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나라 일장기가 나를 응원하였습니다. 큰 기를 휘두르며 '6㎞ 남았다'고 외쳐…", "시상대에 우리나라 국가가 엄숙하게…"
이후 손기정은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낸다. 그 순간 누가 "크게 읽어" 하고 소리친다.
손기정은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 승리…"라고 말을 이어야했다.
우리나라 국가는 기미가요(君が代)였고, 우리나라 국민도 일본인이었다.
손기정이 금메달을 따기 8일 전 1936년 8월 1일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
한 남자가 다짜고짜 뛰어와 "내가 여러분을 위해 조선 응원가를 만들었다. 함께 부르자"면서 악보를 나눠줬다.
조선 선수 7명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을 목놓아 불렀다. 손기정은 작곡가 안익태를 제외하고 최초로 애국가를 부른 일곱 명 중 한 명이었다.
1935년 제8회 메이지 신궁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뒤 인솔 교사에 달려가 "선생님 왜 우리나라에는 국가가 없습니까? 어째서 기미가요가 조선의 국가입니까?"하면서 흐느꼈던 청년 손기정은 그제야 제 나라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훗날 손기정은 "기미가요 때문에 고개를 숙였던 게 아니다"면서 "독일 군악대가 연주하는 기미가요보다 운동장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 애국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고 고백했다.
개그우먼 조혜련이 기미가요를 따라 밝게 웃으며 박수까지 쳐 도마 위에 올랐다.
비난이 대다수지만 일부 네티즌들은 "그저 다른 나라 국가에 맞춰 노래를 부른 것뿐"이라며 "언제까지 과거에 갇혀 있을 것이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니, 그 노래는 그냥 남의 나라 국가가 아니라 기미가요다. 일왕이 천 년 만 년 세상을 지배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기미가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황국신민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미명 아래 하루에 한번씩 불렀던 그 노래.
일본 최고 여가수 아무로 나미에(安室奈美恵)는 일왕 생일 축하연에서 기미가요 제창을 거절했다. "오키나와 출신으로 도저히 부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일본 우익들은 "중학교도 졸업 못한 여자"라고 비난했지만 아무로 나미에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혜련 소속사인 TN엔터테인먼트는 "기미가요인 줄 몰랐다"고 변명한다.
노래가 처음 나왔을 때는 몰랐을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편집 과정에서 자신이 박수 치는 한 장면만이라도 빼달라고 하는 게 옳은 일이었다. 그것이 역사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