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사실 지난해엔 브룸바가 MVP 못 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브룸바가 타지 않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일본행이 결정된 마당에 그에게 안기는 MVP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MVP는 앞으로 잘하라고 주는 상이 아니라 이미 잘했다고 주는 상입니다. 정규리그, 그리고 한국 시리즈 우승 팀의 4번 타자. 무지막지한 기록. 그래도 그가 타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배영수가 됐든 누가 됐든 브룸바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부럽습니다. 팀이 최하위에 떨어졌다고, 어떻게 우리가 이럴 수 있냐고, 분노하고 절규하면서도 대안과 새로운 희망을 모색하는 기아 팬들. 객관적인 실력은 둘째 치고 언제나 헌신적인 선수 사랑을 보여주는 LG 팬들. 롯데 팬들이야, 일본엔 추운 가을날 다리 위에서 다이빙하는 한신팬, MLB엔 요란하다 못해 미치광이들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레드삭스 네이션, 한국엔 머리에 된장 바르기도 주저하지 않는 자이언츠 팬. 이렇게 느껴질 정도니 말이 필요 없습니다. 대전 구장에 한번이라도 가보신 분이라면, 한화 팬들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분들의 언어를 통해 느끼셨을 겁니다. SK요? 짠물 야구의 부흥이라며, 그리고 너무도 훌륭한 프런트진의 멋진 프로젝트 아래, 정말 예전 인천 야구의 열기가 돌아온 것만 같았습니다. 두산이요? 제가 어떤 말씀을 드려도 부족할 걸요? 삼성이야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파울볼이라는 공간이, 특정 팀 팬들의 모임이 아니지만, 순수하게 특정팀 팬만을 대상으로 한 글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코멘트수나 추천수를 가만히 쳐다볼 때가 있습니다. 솔직히, 프린트까지 해서 꼼꼼히 읽고 나서도, 왜 이 글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열광했을까 궁금할 때도 있습니다. 그 글이 이상한 글이라서가 아닙니다. 훌륭하고 멋지고 너무도 감동적인 글이라는 것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제가 응원하는 팀에 대한 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구팬이지만, 어쩔 수 없이 적입니다. 서로에 대한 예의를 최대한 지킨대도, 결국 그들의 승리가 우리의 패배가 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스포츠입니다. 응원팀의 승리에, 우승에, 신기록에 환호하고 행복해 할 때, 다른 한 편에서는 가슴 졸이고, 슬퍼하고, 탄식하고,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게 야구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것 압니다. 그렇게 이번 시즌 현대는 패배자였습니다.

네, 지난 10년간 최강팀은 바로 우리, 현대 유니콘스였습니다. 우승도 가장 많이 한 팀이고, 이번 시즌에 많이 승률을 까먹어서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최고 승률 팀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팬들을 즐겁게 했던 팀이고, 가장 다른 팀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얼마나 많은 팬들이 열광했을까요? 얼마나 많은 팬들이 환호했을까요? 그리고 지금, 얼마나 많은 팬들이 아파하고 속상해 하고 있을까요? 수는 적지만, 가장 믿음직한 팬들이 바로 우리 아닙니까? 이렇게 자위하는 인터넷상의 공간들. 현대 팬 여러분, 야구를 잘할 때나 못할 때나, 더러 어디 가서 난 현대를 응원하노라고 밝히는 게 머뭇거려보신 적은 없습니까? 한때는 돈으로 야구한다는 소리 때문에, 한때는 인천을 버렸다는 이유로, 그리고 한때는 또 왠지 모를 민망함으로.

우리 팀 용병 스카우트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좋은 용병들을 잘 뽑아 오는지 신기할 지경입니다. 현대에 어떤 선수가 오기로 했다. 그럼 이런 저런 웹 사이트를 뒤져서 기록을 찾아봅니다. 아, 정말 알토란 같은 선수를 용케도 찾아냈구나, 싶습니다. 물론 대박만 났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행착오를 거친 후, 이제는 확실히 노-하우가 쌓인 듯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 용병들 얼마나 영웅으로 만들어줬나요? 하다못해 피어리 문구, 브룸바 분식 한번 본 적 없습니다. 주점 '캘러웨이'는 어떨까요? 수원은 축구의 도시라구요? 예전에 농구장은 그럼 왜 그렇게 붐볐을까요? 그건 또 수원이 삼성의 도시라서 그렇다구요? 그런 도시에 지금 남은 삼성 계열사가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이 팀 응원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외롭습니다. 지난번에 야구 게시판에서 현대 팬들끼리 모처럼 달렸던 적이 있습니다. 아, 여러분 모두 굶주리셨군요. 그리고는 신이 나서 대화방으로 옮겨갔습니다. 하지만 그 방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현대는 전국에 팬이 퍼져 있어서 뭉치기가 어렵다고. 남양주에도 갈매기는 날고 있습니다. 전라도 한 구석에서 부지런히 롯데를 응원하는 소녀와 대화방에서 채팅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롯데 팬들이 응집력이 떨어진다고 말씀드리면, 아마 모두들 비웃으실 걸요? 기아가 잠실에서 경기하면 홈구장 같을 때가 한 두 번이었나요? 삼성이야 말해서 무엇합니까. 군산 구장까지 찾아가신 두산 팬은 어떻게 설명하죠? 짠물야구 사이트를 보시고도 SK팬 여러분께 열정이 없다고 하실 겁니까? 모든 팀을 일일이 언급해야 하기엔 너무도 초라해지는 것 같은 생각입니다.

이렇게 텅빈 구장에서 사흘이 멀다하고 홈런을 날려준 선수가 있습니다. 가장 많은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였고, 쳤다 하면 장타였습니다. 타율이 한창 떨어지고 있을 때에도 홈런만큼은 계속 꾸준히 쳐줬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홈런. LG 팬들은 최다 안타, 최고 타율을 기록한 이병규 선수가 MVP라고 주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이건 맞고, 틀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팀 최고의 선수를, 그것도 리그 최고 수준과 견줘도 뒤질 게 없는 솜씨를 보인 선수를 MVP라고 밀어주는 게 뭐가 잘못된 일입니까. 롯데 팬들에게는 손민한 선수가 마찬가지입니다. 삼성팬 여러분, 솔직히 오승환이 MVP 타야 된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솔직히 서튼이 못탈 거라는 것 압니다. 하지만 올해는 정말 속상했습니다. 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브룸바가 낫다고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 막강 스카우트진, 훨씬 무서운 방망이를 가진 용병을 뽑아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취약한 내야 구멍을 채우기 위해, 방망이를 좀 포기하더라도 퀸란 같은 선수를 뽑아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렇게 친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미국 프로 선수들이 그러하듯, 꼬마 아이들을 위해 유아원도 방문하고, 출국에 앞서 일일이 코칭 스탭은 물론, 구단의 전직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남기는 용병이 얼마나 될까요? MVP 후보에 올랐다는 전화를 받고, 후보에 오른 것만이라도 영광이다, 고 말하는 홈런왕이 어느 리그에 또 있을까요?

기록도 아니고, 실력도 아닙니다. 여러 가지 정황상 절대 탈 수 없다는 것 압니다. 그래서 밀어주고 싶고, 더더욱 지지해 주고 싶습니다. 이번 시즌 최고의 선수는 서튼이었습니다. 돈만 벌고 떠나도 그만일, 정말 그네들이 하찮게 여기고 싶으면 얼마든 그래도 좋을 나라의 리그, 그 리그 선수들도 하지 않는 사소한 일들을 솔선수범한 선수입니다. 제 견문이 좁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선수들 어디 나이트 잘 간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누가 어느 천사원에 정기적으로 기부한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러면서 TV에 나와 프로야구 많이 사랑해 달라는 소리가 나옵니까? FA 몇 십억에 월급쟁이들 억장이 무너지는데, 계약금 비공개로 하자는 소리가 나옵니까? 그리고도 프로야구 많이 사랑해 달라는 소리가 나옵니까?

이 선수는 실력도 최고였지만, 친절함도 최고였습니다. 자기 주변을 살필 줄 알았고,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을 도울 줄 알았습니다. MVP가 프로야구에서 최고의 상품 가치를 지닌 선수에게 준는 거라는 어느 분의 말씀, 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있는, 미래의 시장을, 미약하지만 혼자 나서 개척한 선수의 가치는 누가 알아줘야 합니까? 먼 훗날, 그때 서튼 아저씨가 저희 유치원 찾았을 때 야구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고 말하는 선수가 나오지 말라는 법 있나요? 시장의 음지에서, 늘 양지를 지향하는 구단 직원들께 그리 일일이 감사하는 건 시장의 토대를 다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작업인가요?

이번 시즌 최고의 선수는 서튼이었습니다. 누가 MVP를 타더라도 제 마음 속에 이 생각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RCAA, RSAA 같은 기록을 동원해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다른 선수들은 게임이 안 됩니다. 기록이 다는 아니지만 손민한, 오승환 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시즌 최고의 선수는 서튼입니다. 아니, 서튼이어야 합니다. 타지 못할 걸 알기에, 더더욱 그를 밀어주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이번 시즌 최고의 선수는 서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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