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흐름의 경기라고 한다. 그리고 승부처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소위 '해결사‘는 팬들을 열광시킨다. 그럼 언제가 승부처였고, 누가 해결사였는지 가시적(可視的)으로 확인할 수는 없을까? 말하자면 야구 경기의 흐름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느냐 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 고민하던 야구 통계학자들이 하나의 도구를 고안해 냈다. 바로 WP(Win Probability), 우리말로 하자면 '기대 승률'이다.
기대 승률이라는 건 어렵거나, 이상한 수식에 의해 산출되는 지표가 아니다. WP는 기본적으로 누적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계산된 확률값이다. 시작은 이랬다. 크리스토퍼 쉐이(Christopher Shea)라는 야구 통계학자가 1979년부터 1990년까지 모든 메이저리그 경기를 이닝, 아웃 카운트, 점수차, 주자 상황 등을 토대로 분석한 후, 최종적으로 승리로 연결된 확률을 계산했다. 이것이 WP의 근간이 됐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위 기간 동안 치러진 32,767 경기에서 원정팀이 승리한 경우는 모두 15,845번이다. 승률은 48.4%, 따라서 1회초가 시작될 때 원정팀의 WP는 .484가 된다. 여기서 착안 해, 구장별 특성 및 투고타저 또는 그 반대 등의 경향에 따라 수정, 보완을 거친 결과물이 나오게 되었다. 이 수치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WP라 부르는 기대 승률이다.
그럼 이를 토대로 한번, 야구팬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WBC의 명장면들이 경기 전체의 흐름에서 과연 어느 정도 중요도를 갖고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언급하고 싶은 건 이진영 선수의 호수비다. 특히 도쿄돔에서 벌어진 한일전에서의 다이빙 캐치는 미국 현지 언론에서도 주목할 만큼 멋졌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WP로 볼 때 이 수비가 전체 승부에 끼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미 경기에서 두 점 차로 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비를 통해 점수를 막아냈다고 해도 이미 두 점을 지고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약 그 공을 그대로 빠뜨렸을 때를 고려해 보면, 그 수비가 얼마나 멋진 수비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2점차로 지고 있던 4회말 일본의 공격 2아웃 만루, 일본팀의 WP는 .781, 이미 승리에 78.1% 가까워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봉중근 선수가 던진 공을 받아친 니시오카 선수의 타구는 힘차게 우익수쪽으로 날아갔다. 모두가 싹쓸이 안타가 될 것임을 예감했던 그 순간, 이진영 선수는 믿기 어려운 다이빙을 선보이며 그대로 공을 잡아내고 말았다. 홈팀 일본 관중들마저 박수를 아끼지 않은 멋진 수비였다. 일본팀의 WP 역시 .730으로 약 .051 정도 떨어졌다.
하지만 이 수비가 의미를 갖는 건, 두 점의 점수차를 유지시켰다는 것 이상이다. 즉, 다섯 점 차이로 벌어질 뻔한 경기의 흐름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다. 만약 이 타구가 그대로 실점과 연결됐다면 다섯 점차에 주자는 최소 2루, 일본의 WP는 무려 .922로 치솟는다. 그만큼 승부를 뒤집기 힘든 상황으로 전개됐을 것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이진영 선수의 수비는 WP .141, 비율로 따지자면 승부의 30% 가까이를 책임진 멋진 수비라 볼 만하다.
이진영 선수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한 차례 더 멋진 승부를 펼쳐 보였다. 장소만 미국의 애너하임으로 옮겨 치러진 같은 일본전에서의 일이다. 사토자키 선수의 안타를 잡아 포수 조인성 선수에게 정확한 송구, 선취점을 막아냈다. 단기전에서 선취점이 갖는 의미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대표팀 또한 멕시코․미국 등과 치른 2라운드 경기에서 이승엽 선수의 선제 홈런으로 경기를 쉽게 풀어간 바 있다. 역으로, 우리가 일본에게 선취점을 헌납했더라면 그만큼 경기를 풀어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 이 수비는 경기 승패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차지했을까?
경기가 열린 에인절스 스타디움은 최근 5년간 평균 4.7점이 발생한 구장이다. 이는 아메리칸리그 전체 평균인 5.0보다 다소 떨어지는 기록이다. 토쿄돔이 타자 지향적인 구장인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이 구장에서의 선취점은 토쿄돔보다도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만큼 추격점을 뽑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WP는 이런 구장의 특성 역시 고려해서 산출된다. 2회말 2사 2루, 홈팀의 WP는 .534로 그리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선취점을 허용해 끌려가게 되면 .369로 WP가 떨어지게 된다. 이진영 선수의 수비는 바로 이런 부담에서 팀을 구해준 것이다.
물론, WP의 변화는 수비를 통해서만 발생하는 건 아니다. 공격도 가능하다. 점수를 막는 게 가능하면 점수를 내는 것의 계산도 당연히 가능한 것이다. 공격력 가운데서 WP 변화를 가장 급격하게 일으키는 건 단연 홈런이다. 홈런은 곧 점수다. 따라서 WP 변화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실제 경기 승패는 결국 점수차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번 WBC에서 가장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홈런 두 개를 꼽으라면 역시 도코돔에서 터진 이승엽의 역전 2점 홈런과 미국의 추격을 뿌리친 최희섭의 석 점 홈런일 것이다. 이승엽의 홈런으로 우리는 일본을 꺾고 조 1위로 본선 무대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했고, 최희섭의 홈런은 세계 최강이라 자랑하던 미국을 격침시켰다. 한번 두 홈런이 승리를 거두는 데 어느 정도의 공헌을 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도쿄로 가보자.
비록 5회 공격에서 한 점을 추가하며 바짝 일본을 뒤쫓았지만 일본 불펜진을 감안할 때 경기를 뒤집는 건 그리 쉬워보이지가 않았다. 두 번의 공격 기회밖에 남아 있지 않던 8회초, 선두 타자 이병규가 삼진으로 물러나며 희망의 등불이 사라져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주장 이종점의 방망이에서 안타가 터졌다. 초구를 노린 결과였다. WP는 .216에서 .274로 소폭 상승했다. 그러나 아직도 승리는 그리 가까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타자는 아시아의 '홈런왕' 이승엽, 일본 투수 이시이도 긴장했는지 연거푸 볼이 두 개 들어왔다. 3구는 스트라이크, 4구째 다시 볼이 선언되며 1스트라이크 3볼로 이승엽은 자신에게 유리한 카운트로 승부를 이끌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이시이의 변화구가 밋밋하게 들어왔다. 실투였다. 이를 놓치지 않은 이승엽의 방망이, 공은 우중간을 가로질러 그대로 펜스 위에 떨어졌다. 두 말할 필요 없는 감동의 홈런이었다. WP 역시 이를 증명한다. 홈런이 터진 후의 WP는 .698, 무려 .424의 차이가 발생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날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승부처였다.
최희섭의 홈런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점수가 적게 나는 에인절스 스타디움에서 3대 1로 앞서고 있는 홈 팀의 공격 상황은 사실 꽤 높은 WP 확보한 상태다. 주자가 2루에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는 두 팀 간의 전력차가 엇비슷한 빅 리그에서의 통계일 뿐이다. 세계 최강을 상대로 경기를 펼치고 있다면 심리적 압박감은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두 점은 충분히 따라잡힐 수 있는 점수, 미국 투수진 또한 추가 실점을 억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1회초에 돈트레 윌리스로부터 홈런을 뽑아낸 이승엽을 고의사구로 거르고 김태균과 상대할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 이때 김인식 감독이 뽑아든 승부수는 최희섭, 사실 그는 극도의 타격 부진으로 선발 로스터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초구는 볼, 그러나 2구는 스트라이크였다. 볼카운트 1-1의 팽팽한 상황, 최희섭의 방망이가 힘차게 스윙을 시작했다. 방망이에 윗둥에 맞은 타구는 아주 높게 치솟았다. 그리고는 우측 펜스를 살짝 넘기며 그대로 쓰리런. 기술보다는 힘으로 만들어낸 홈런이었다. 2점이던 점수차는 다섯 점으로 벌어졌다. 미국의 추격 의지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우리 대표팀의 WP는 .936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말 불가능해 보였던 승리가 눈앞에 성큼 다가온 것이다. 경기 전체에 미치는 효과는 이승엽의 홈런에 미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승부에 쐐기를 박는 효과라면 최희섭의 이 한방이 더 주효했다. 세계 최강 미국의 콧대를 꺾는 홈런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투수력 또한 WP를 통해 측정 가능하다. 애너하임에서 벌어진 두 번째 한일전, 9회말에 선두 타자로 나선 니시오카 선수는 구대성 선수를 공략해 솔로포를 터뜨리며 경기는 2대 1, 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다음 타자를 땅볼로 처리하며 한숨 돌리려는 찰나에 터진 마쓰나카 선수의 안타. 결국 구대성 선수는 오승환 선수에게 마운드를 넘겨야 했다. 9회말이 시작될 때 90%가 넘어가던 기대 승률이 78.5%로 떨어진 다음이었다. 하지만 오승환 선수는 보란 듯이 연속 헛스윙 삼진 두 개룰 잡아 냈다. 그 어떤 수비진의 도움도 없이 오승환 선수의 혼자 힘으로 아웃 카운트 두 개를 잡아낸 것이다. WP 변화는 .215, 오승환 선수가 부족했던 21.5%의 승리 기대치를 채우고 100%를 확정지은 것이다.
물론 이렇게 좋은 순간만 있었던 건 아니다. 준결승전에서 전병두 선수가 마쓰나카 선수에게 2루타를 얻어맞던 순간 .500이던 우리 대표팀의 WP는 .381로 떨어졌다. 우리 코칭 스탭은 김병현 선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첫타자 타무라는 삼진, WP는 .453로 안정세를 되찾았다. 여기서 왕정치 감독은 대타 후쿠도메를 내세운다. 그리고는 쓰라린 투런 홈런을 터뜨린다. 우리 팀의 WP는 .169로 급격히 떨어진다. 결국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5실점으로 7회초 수비를 끝냈을 때 우리 팀의 WP는 .027, 즉 승리 기대치가 2.7%밖에 남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초대 WBC 챔피언을 꿈꾸던 우리의 희망도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WP는 마법 공식이 아니다. 그리고 점쟁이의 예언도 아니다. 그저 역사적인 통계에 근거한 확률값일 뿐이다. 하지만 경기가 어떤 국면에 접어들었는지를 일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게 사실이다. 말하자면 플레이 하나 하나의 결과가 갖는 의미를 연결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야구는 많은 과정이 모여서 결과를 이룬다. 이 결과들을 모아 각각의 플레이가 승패에 미친 영향력을 알려주는 도구가 바로 WP다.
선수들이 먼저 결과를 생각하면서 경기에 임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과정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내가 안타를 못 치면 어떻게 될까를 고민하지 말고 지금 안타를 치고, 홈런을 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투수도 마찬가지다. 지금 안타를 맞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안타를 맞지 않을까 궁리를 하라는 것이다. 선수들이 과정에 최선을 다하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WP가 일러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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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돔에서 치러진 한/일전의 경기 전체 WP 그래프는 이런 모양이다.
기대 승률이라는 건 어렵거나, 이상한 수식에 의해 산출되는 지표가 아니다. WP는 기본적으로 누적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계산된 확률값이다. 시작은 이랬다. 크리스토퍼 쉐이(Christopher Shea)라는 야구 통계학자가 1979년부터 1990년까지 모든 메이저리그 경기를 이닝, 아웃 카운트, 점수차, 주자 상황 등을 토대로 분석한 후, 최종적으로 승리로 연결된 확률을 계산했다. 이것이 WP의 근간이 됐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위 기간 동안 치러진 32,767 경기에서 원정팀이 승리한 경우는 모두 15,845번이다. 승률은 48.4%, 따라서 1회초가 시작될 때 원정팀의 WP는 .484가 된다. 여기서 착안 해, 구장별 특성 및 투고타저 또는 그 반대 등의 경향에 따라 수정, 보완을 거친 결과물이 나오게 되었다. 이 수치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WP라 부르는 기대 승률이다.
그럼 이를 토대로 한번, 야구팬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WBC의 명장면들이 경기 전체의 흐름에서 과연 어느 정도 중요도를 갖고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언급하고 싶은 건 이진영 선수의 호수비다. 특히 도쿄돔에서 벌어진 한일전에서의 다이빙 캐치는 미국 현지 언론에서도 주목할 만큼 멋졌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WP로 볼 때 이 수비가 전체 승부에 끼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미 경기에서 두 점 차로 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비를 통해 점수를 막아냈다고 해도 이미 두 점을 지고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약 그 공을 그대로 빠뜨렸을 때를 고려해 보면, 그 수비가 얼마나 멋진 수비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2점차로 지고 있던 4회말 일본의 공격 2아웃 만루, 일본팀의 WP는 .781, 이미 승리에 78.1% 가까워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봉중근 선수가 던진 공을 받아친 니시오카 선수의 타구는 힘차게 우익수쪽으로 날아갔다. 모두가 싹쓸이 안타가 될 것임을 예감했던 그 순간, 이진영 선수는 믿기 어려운 다이빙을 선보이며 그대로 공을 잡아내고 말았다. 홈팀 일본 관중들마저 박수를 아끼지 않은 멋진 수비였다. 일본팀의 WP 역시 .730으로 약 .051 정도 떨어졌다.
하지만 이 수비가 의미를 갖는 건, 두 점의 점수차를 유지시켰다는 것 이상이다. 즉, 다섯 점 차이로 벌어질 뻔한 경기의 흐름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다. 만약 이 타구가 그대로 실점과 연결됐다면 다섯 점차에 주자는 최소 2루, 일본의 WP는 무려 .922로 치솟는다. 그만큼 승부를 뒤집기 힘든 상황으로 전개됐을 것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이진영 선수의 수비는 WP .141, 비율로 따지자면 승부의 30% 가까이를 책임진 멋진 수비라 볼 만하다.
이진영 선수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한 차례 더 멋진 승부를 펼쳐 보였다. 장소만 미국의 애너하임으로 옮겨 치러진 같은 일본전에서의 일이다. 사토자키 선수의 안타를 잡아 포수 조인성 선수에게 정확한 송구, 선취점을 막아냈다. 단기전에서 선취점이 갖는 의미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대표팀 또한 멕시코․미국 등과 치른 2라운드 경기에서 이승엽 선수의 선제 홈런으로 경기를 쉽게 풀어간 바 있다. 역으로, 우리가 일본에게 선취점을 헌납했더라면 그만큼 경기를 풀어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 이 수비는 경기 승패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차지했을까?
경기가 열린 에인절스 스타디움은 최근 5년간 평균 4.7점이 발생한 구장이다. 이는 아메리칸리그 전체 평균인 5.0보다 다소 떨어지는 기록이다. 토쿄돔이 타자 지향적인 구장인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이 구장에서의 선취점은 토쿄돔보다도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만큼 추격점을 뽑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WP는 이런 구장의 특성 역시 고려해서 산출된다. 2회말 2사 2루, 홈팀의 WP는 .534로 그리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선취점을 허용해 끌려가게 되면 .369로 WP가 떨어지게 된다. 이진영 선수의 수비는 바로 이런 부담에서 팀을 구해준 것이다.
물론, WP의 변화는 수비를 통해서만 발생하는 건 아니다. 공격도 가능하다. 점수를 막는 게 가능하면 점수를 내는 것의 계산도 당연히 가능한 것이다. 공격력 가운데서 WP 변화를 가장 급격하게 일으키는 건 단연 홈런이다. 홈런은 곧 점수다. 따라서 WP 변화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실제 경기 승패는 결국 점수차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번 WBC에서 가장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홈런 두 개를 꼽으라면 역시 도코돔에서 터진 이승엽의 역전 2점 홈런과 미국의 추격을 뿌리친 최희섭의 석 점 홈런일 것이다. 이승엽의 홈런으로 우리는 일본을 꺾고 조 1위로 본선 무대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했고, 최희섭의 홈런은 세계 최강이라 자랑하던 미국을 격침시켰다. 한번 두 홈런이 승리를 거두는 데 어느 정도의 공헌을 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도쿄로 가보자.
비록 5회 공격에서 한 점을 추가하며 바짝 일본을 뒤쫓았지만 일본 불펜진을 감안할 때 경기를 뒤집는 건 그리 쉬워보이지가 않았다. 두 번의 공격 기회밖에 남아 있지 않던 8회초, 선두 타자 이병규가 삼진으로 물러나며 희망의 등불이 사라져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주장 이종점의 방망이에서 안타가 터졌다. 초구를 노린 결과였다. WP는 .216에서 .274로 소폭 상승했다. 그러나 아직도 승리는 그리 가까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타자는 아시아의 '홈런왕' 이승엽, 일본 투수 이시이도 긴장했는지 연거푸 볼이 두 개 들어왔다. 3구는 스트라이크, 4구째 다시 볼이 선언되며 1스트라이크 3볼로 이승엽은 자신에게 유리한 카운트로 승부를 이끌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이시이의 변화구가 밋밋하게 들어왔다. 실투였다. 이를 놓치지 않은 이승엽의 방망이, 공은 우중간을 가로질러 그대로 펜스 위에 떨어졌다. 두 말할 필요 없는 감동의 홈런이었다. WP 역시 이를 증명한다. 홈런이 터진 후의 WP는 .698, 무려 .424의 차이가 발생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날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승부처였다.
최희섭의 홈런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점수가 적게 나는 에인절스 스타디움에서 3대 1로 앞서고 있는 홈 팀의 공격 상황은 사실 꽤 높은 WP 확보한 상태다. 주자가 2루에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는 두 팀 간의 전력차가 엇비슷한 빅 리그에서의 통계일 뿐이다. 세계 최강을 상대로 경기를 펼치고 있다면 심리적 압박감은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두 점은 충분히 따라잡힐 수 있는 점수, 미국 투수진 또한 추가 실점을 억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1회초에 돈트레 윌리스로부터 홈런을 뽑아낸 이승엽을 고의사구로 거르고 김태균과 상대할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 이때 김인식 감독이 뽑아든 승부수는 최희섭, 사실 그는 극도의 타격 부진으로 선발 로스터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초구는 볼, 그러나 2구는 스트라이크였다. 볼카운트 1-1의 팽팽한 상황, 최희섭의 방망이가 힘차게 스윙을 시작했다. 방망이에 윗둥에 맞은 타구는 아주 높게 치솟았다. 그리고는 우측 펜스를 살짝 넘기며 그대로 쓰리런. 기술보다는 힘으로 만들어낸 홈런이었다. 2점이던 점수차는 다섯 점으로 벌어졌다. 미국의 추격 의지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우리 대표팀의 WP는 .936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말 불가능해 보였던 승리가 눈앞에 성큼 다가온 것이다. 경기 전체에 미치는 효과는 이승엽의 홈런에 미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승부에 쐐기를 박는 효과라면 최희섭의 이 한방이 더 주효했다. 세계 최강 미국의 콧대를 꺾는 홈런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투수력 또한 WP를 통해 측정 가능하다. 애너하임에서 벌어진 두 번째 한일전, 9회말에 선두 타자로 나선 니시오카 선수는 구대성 선수를 공략해 솔로포를 터뜨리며 경기는 2대 1, 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다음 타자를 땅볼로 처리하며 한숨 돌리려는 찰나에 터진 마쓰나카 선수의 안타. 결국 구대성 선수는 오승환 선수에게 마운드를 넘겨야 했다. 9회말이 시작될 때 90%가 넘어가던 기대 승률이 78.5%로 떨어진 다음이었다. 하지만 오승환 선수는 보란 듯이 연속 헛스윙 삼진 두 개룰 잡아 냈다. 그 어떤 수비진의 도움도 없이 오승환 선수의 혼자 힘으로 아웃 카운트 두 개를 잡아낸 것이다. WP 변화는 .215, 오승환 선수가 부족했던 21.5%의 승리 기대치를 채우고 100%를 확정지은 것이다.
물론 이렇게 좋은 순간만 있었던 건 아니다. 준결승전에서 전병두 선수가 마쓰나카 선수에게 2루타를 얻어맞던 순간 .500이던 우리 대표팀의 WP는 .381로 떨어졌다. 우리 코칭 스탭은 김병현 선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첫타자 타무라는 삼진, WP는 .453로 안정세를 되찾았다. 여기서 왕정치 감독은 대타 후쿠도메를 내세운다. 그리고는 쓰라린 투런 홈런을 터뜨린다. 우리 팀의 WP는 .169로 급격히 떨어진다. 결국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5실점으로 7회초 수비를 끝냈을 때 우리 팀의 WP는 .027, 즉 승리 기대치가 2.7%밖에 남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초대 WBC 챔피언을 꿈꾸던 우리의 희망도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WP는 마법 공식이 아니다. 그리고 점쟁이의 예언도 아니다. 그저 역사적인 통계에 근거한 확률값일 뿐이다. 하지만 경기가 어떤 국면에 접어들었는지를 일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게 사실이다. 말하자면 플레이 하나 하나의 결과가 갖는 의미를 연결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야구는 많은 과정이 모여서 결과를 이룬다. 이 결과들을 모아 각각의 플레이가 승패에 미친 영향력을 알려주는 도구가 바로 WP다.
선수들이 먼저 결과를 생각하면서 경기에 임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과정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내가 안타를 못 치면 어떻게 될까를 고민하지 말고 지금 안타를 치고, 홈런을 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투수도 마찬가지다. 지금 안타를 맞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안타를 맞지 않을까 궁리를 하라는 것이다. 선수들이 과정에 최선을 다하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WP가 일러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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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돔에서 치러진 한/일전의 경기 전체 WP 그래프는 이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