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튀 정민태
정민태(39)는 먹튀다.
3년간 단 1승도 없이 9패나 기록한 투수가 13억 6770만 원이나 받았다. 1패당 1억 6000만 원에 가까운 연봉을 받았던 셈이다.
먹튀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낱말이다. 정민태는 분명 먹튀다.
하지만 정민태는 분명 그만한 연봉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던 선수였다.
요미우리에서 받은 이적료 5억 엔 때문이 아니다. 정민태가 곧 현대 유니콘스였기 때문이다.
정민태가 히어로즈를 떠나며 남긴 한 마디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현대가 사라졌을 때 내 야구 인생도 끝났다."
정말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 에이스 정민태
유니콘스를 오래 응원한 팬들에게 태평양 돌핀스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는 의미가 남다르다. 어려서 업어 키운 동생 같은 애틋함이라고 해야 할까.
정민태가 떠나며 이제 히어로즈에는 이숭용만이 그런 선수로 남게 됐다. 정민태와 이숭용은 유니콘스가 첫 번째 우승을 차지하던 1998년 한국 시리즈에서 마지막을 함께 장식했던 사이다.
정민태는 1992년 태평양 돌핀스에서 프로 데뷔식을 치렀다. 그러나 병풍에 휘말렸고 곧이어 부상이 찾아왔다. 길고 지루한 재활이 계속됐다.
정민태가 처음으로 진가를 드러낸 건 1996 시즌이었다. 이 해 정민태는 210⅓이닝을 던지며 처음으로 200이닝을 넘어 섰고, 생애 첫 두 자릿수 승수(15승)를 기록하기도 했다. 평균 자책점은 2.44.
비록 해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만, 이 시즌 현대 유니콘스는 창단 첫해 한국 시리즈에 오르는 성과를 일궈냈다.
이듬해 13승, 그 다음해 17승을 거두며 유니콘스의 에이스로 확실히 자리매김 한 정민태. 1999 시즌에는 20승을 기록하며 최동원-선동열로 이어진 리그 에이스 계보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 울보 정민태
시즌이 끝나자 정민태는 그 동안 가슴 깊숙이 품고 있던 꿈을 처음으로 구단에 이야기했다.
"일본에 가고 싶다."
반면 구단은 쉽게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 어느 팀이 리그 최고의 에이스를 함부로 포기하겠는가. 꿈을 이루지 못한 울분에 정민태는 울어야 했다.
팬들은 겨우 그깟 일에 사내가 우냐며 정민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국 2000 시즌 팀을 두 번째 챔피언으로 이끌고 나서야 구단은 OK 사인을 냈다.
이때만 해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정민태가 일본에서 그렇게 초라하게 돌아올 줄 말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보낸 2년간 정민태의 성적은 평균 자책점 6.28에 2승 1패가 전부였다. 눈물을 보인 대가 치고는 너무도 가혹한 성적표였다.
구단에서는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했다. 정민태는 메이저리그에 가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일본에서의 실패가 실력차 때문이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 국내용 정민태
팬들은 쇼하지 말라며 정민태를 비난했다.
물론 정민태의 최종 선택은 유니콘스였다.
팬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돈 몇 푼 때문에 난리를 부렸다고 했다.
하지만 2003년 정민태는 우리가 2000년에 봤던 바로 그 정민태였다. 17승 2패, 평균 자책점 3.31. 이 시즌 정민태는 선발 21연승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팬들은 국내용이라며 정민태를 비난했다.
유니콘스는 2003년도 고과를 반영해 정민태와 7억 4000만 원에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2004시즌 허리 부상에 시달리며 7승 14패에 그치고 말았다. 추락의 시작이었다.
팬들은 역시 돈만 밝힌다며 정민태를 비난했다.
재활 의지를 높게 평가한다는 감독 코멘트가 나와도 소용 없었다.
부상이 겹쳤지만 팬들은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이번에는 어디 다쳤다는 핑계냐며 팬들은 정민태를 비난하기 바빴다.
해마다 큰 폭으로 연봉이 삭감됐지만 여전히 그의 연봉은 리그 탑 클래스 수준이었다.
그러는 사이 현대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다는 게 널리 알려졌다.
# 그래도 정민태
이후 3년간 유니콘스는 정민태를 사실상 잃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부활 소식이 들리고, 그가 마운드에 오르는 날이면 그 조용한 수원 구장도 들썩거렸지만 늘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정민태가 요미우리에서 뛰던 2001, 2002년에 그랬던 것처럼 우승 트로피는 유니콘스의 것이 아니었다.
# 유니콘스 20번 정민태
이제 정민태는 영원히히어로즈유니콘스를 떠났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마운드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투수의 말로 치고는 확실히 초라하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이대로 정민태가 은퇴 선언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유니폼을 입은 정민태는 도저히 응원할 자신이 없으니 말이다.
정민태는 통산 126승 가운데 107승을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고 거뒀다.
유니콘스 유니폼은 정민태를 위해 디자인 된 옷이었다.
정민태(39)는 먹튀다.
3년간 단 1승도 없이 9패나 기록한 투수가 13억 6770만 원이나 받았다. 1패당 1억 6000만 원에 가까운 연봉을 받았던 셈이다.
먹튀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낱말이다. 정민태는 분명 먹튀다.
하지만 정민태는 분명 그만한 연봉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던 선수였다.
요미우리에서 받은 이적료 5억 엔 때문이 아니다. 정민태가 곧 현대 유니콘스였기 때문이다.
정민태가 히어로즈를 떠나며 남긴 한 마디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현대가 사라졌을 때 내 야구 인생도 끝났다."
정말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 에이스 정민태
유니콘스를 오래 응원한 팬들에게 태평양 돌핀스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는 의미가 남다르다. 어려서 업어 키운 동생 같은 애틋함이라고 해야 할까.
정민태가 떠나며 이제 히어로즈에는 이숭용만이 그런 선수로 남게 됐다. 정민태와 이숭용은 유니콘스가 첫 번째 우승을 차지하던 1998년 한국 시리즈에서 마지막을 함께 장식했던 사이다.
정민태는 1992년 태평양 돌핀스에서 프로 데뷔식을 치렀다. 그러나 병풍에 휘말렸고 곧이어 부상이 찾아왔다. 길고 지루한 재활이 계속됐다.
정민태가 처음으로 진가를 드러낸 건 1996 시즌이었다. 이 해 정민태는 210⅓이닝을 던지며 처음으로 200이닝을 넘어 섰고, 생애 첫 두 자릿수 승수(15승)를 기록하기도 했다. 평균 자책점은 2.44.
비록 해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만, 이 시즌 현대 유니콘스는 창단 첫해 한국 시리즈에 오르는 성과를 일궈냈다.
이듬해 13승, 그 다음해 17승을 거두며 유니콘스의 에이스로 확실히 자리매김 한 정민태. 1999 시즌에는 20승을 기록하며 최동원-선동열로 이어진 리그 에이스 계보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 울보 정민태
시즌이 끝나자 정민태는 그 동안 가슴 깊숙이 품고 있던 꿈을 처음으로 구단에 이야기했다.
"일본에 가고 싶다."
반면 구단은 쉽게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 어느 팀이 리그 최고의 에이스를 함부로 포기하겠는가. 꿈을 이루지 못한 울분에 정민태는 울어야 했다.
팬들은 겨우 그깟 일에 사내가 우냐며 정민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국 2000 시즌 팀을 두 번째 챔피언으로 이끌고 나서야 구단은 OK 사인을 냈다.
이때만 해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정민태가 일본에서 그렇게 초라하게 돌아올 줄 말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보낸 2년간 정민태의 성적은 평균 자책점 6.28에 2승 1패가 전부였다. 눈물을 보인 대가 치고는 너무도 가혹한 성적표였다.
구단에서는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했다. 정민태는 메이저리그에 가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일본에서의 실패가 실력차 때문이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 국내용 정민태
팬들은 쇼하지 말라며 정민태를 비난했다.
물론 정민태의 최종 선택은 유니콘스였다.
팬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돈 몇 푼 때문에 난리를 부렸다고 했다.
하지만 2003년 정민태는 우리가 2000년에 봤던 바로 그 정민태였다. 17승 2패, 평균 자책점 3.31. 이 시즌 정민태는 선발 21연승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팬들은 국내용이라며 정민태를 비난했다.
유니콘스는 2003년도 고과를 반영해 정민태와 7억 4000만 원에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2004시즌 허리 부상에 시달리며 7승 14패에 그치고 말았다. 추락의 시작이었다.
팬들은 역시 돈만 밝힌다며 정민태를 비난했다.
재활 의지를 높게 평가한다는 감독 코멘트가 나와도 소용 없었다.
부상이 겹쳤지만 팬들은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이번에는 어디 다쳤다는 핑계냐며 팬들은 정민태를 비난하기 바빴다.
해마다 큰 폭으로 연봉이 삭감됐지만 여전히 그의 연봉은 리그 탑 클래스 수준이었다.
그러는 사이 현대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다는 게 널리 알려졌다.
# 그래도 정민태
이후 3년간 유니콘스는 정민태를 사실상 잃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부활 소식이 들리고, 그가 마운드에 오르는 날이면 그 조용한 수원 구장도 들썩거렸지만 늘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정민태가 요미우리에서 뛰던 2001, 2002년에 그랬던 것처럼 우승 트로피는 유니콘스의 것이 아니었다.
# 유니콘스 20번 정민태
이제 정민태는 영원히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투수의 말로 치고는 확실히 초라하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이대로 정민태가 은퇴 선언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유니폼을 입은 정민태는 도저히 응원할 자신이 없으니 말이다.
정민태는 통산 126승 가운데 107승을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고 거뒀다.
유니콘스 유니폼은 정민태를 위해 디자인 된 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