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기본적으로 야구에서 타자가 맞서 싸워야 할 제일 첫 번째 상대는 투수다. 하지만 더러 자신이 정해 놓은 오직 한 포인트에 맞서 외로이 고독한 싸움을 펼치는 검객들이 타석에 들어설 때가 있다. 우리는 이분들을 '공갈포'라는 영예로운 이름으로 부른다.

이분들의 특징은 대체로 이렇다.

•  안타 가운데 홈런이 차지하는 비중이 퍽이나 높다. 기본적으로 홈런이 아닌 이상 이들에게 안타는 큰 의미가 없다. '안타는 거들 뿐'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래서 이들의 스윙은 언제나 힘차고 날카롭다. 공이 와서 맞을 뿐, 애써 맞추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  때문에 이들에게 패배는 야수에게 타구가 잡히는 것이 아니다. 승리의 주체도 패배의 대상도 모두 자기 자신뿐이다. 분명 투수에게 삼진을 당한 것이지만, 이들의 칼끝은 자기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서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이들은 삼진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  그러나 이들에게 볼넷은 수치다. 호랑이는 굶주려도 풀뿌리는 쳐다보지 않으며, 공갈포는 출루율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타자에게 참을성이 요구되고, 사회적으로 양성평등의 목소리가 제 아무리 드높아도 이들은 '마초' 근성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 한다. 볼넷을 고르려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공갈포의 미덕이다.
그렇다. 무도계에 '최배달'이 있다면 야구계엔 공갈포가 있다.


딱 공이 날아오면 말이야. 너 공이냐? 너 야구공? 나 공갈포야. 그리고 방망이 잡어. 그리고 무조건 휘두르는 거야. 공이 담장 밖에 날아갈 때까지. 커브볼하고 맞장 뜰 때도 마찬가지야. 너 커브? 나 공갈포야. 그리고 기다려, 그냥. 그럼 타자가 가만히 있으니까, 공이 떨어지게 돼 있어. 그러다 공이 노리던 지점을 지나. 봐봐. 그렇게 돼 있어. 커브볼은 떨어지게 돼 있어. 그럼 이렇게 말하는 거야. 커브볼은 야구공 아냐? 그리고 담장 넘어갈 때까지 또 있는 힘껏 휘두르는 거야. 그 공갈포 정신! 공갈포!
그러나 실제로 타격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도 잘 모를 극단적인 체중 이동과 팔목 힘에 집착하고 '다운스윙'을 강조하는 코칭 문화가 더더욱 득세하는 현재, 숭고하기 그지없던 '공갈포 정신'은 이미 훼손된 지 오래다.

2005 시즌 신세대 공갈포로 주목을 받았던 이성열 역시 공이 와서 맞지 않으며 공갈포 슬럼프에 시달리고 있다. 오호통재라! 잘못된 코칭 문화가 공갈포의 성장을 막았구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공갈포의 추억은 찬란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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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 누가 퀸란을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데뷔 첫 시리즈부터 대전 구장을 초토화시킨 그의 공갈포 정신! 공이 어디로 들어오든 한결 같던 힘차고 아름다운 스윙 궤적! 리버스 스윕을 꿈꾸던 두산의 기세를 처절하게 짓밟아 버렸던 그의 늠름한 기세!

2002년 LG로 이적해서도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은 결코 흐트러짐이 없었다. 21타수 무안타 10삼진. 공이 와서 맞지 않은 것을 어찌 퀸란의 잘못이라 할 수 있었겠는가? 어찌 함부로 퀸란을 '선풍기파'의 일원이라 깎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퀸란을 그렇게 보낸 것은 우리 '공갈포' 계보의 큰 상실과 단절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은 수비에서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으셨으면서도, 전체 아웃 카운트의 51%를 삼진으로 헌납하신 그 자비로움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이라고 공갈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대와 당대의 공갈포에 대한 기준이 달랐을 뿐이다. 리그 평균을 공갈포의 기준으로 삼으면 '공갈포'가 진짜 중요한 이유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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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가? 역대 최다 홈런의 주인공 장종훈 선생이 세 시즌 연속으로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고 계시다. 그리고 어떻게 되셨는가? 1990 시즌 28홈런을 날리신 데 이어 35홈런, 41홈런을 연달아 날리시며 우리 홈런의 새로운 지평을 여셨다.

박경완 선생은 이만수 선생 이후 최초로 포수 홈런왕을 차지하셨으며, 퀸란과 더불어 '공갈포' 콤비가 대전 구장에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바 있다. 청보, 태평양 팬들이 스터프 제왕 선동열을 그나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던 것 역시 치명적인 '공갈포' 김동기 선생이 자리잡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정현발 선생은 존함부터 어쩐지 "Smells like 공갈포 spirit"이 떠오르지 않는가?

타석에서는 물론 뜬금 '공갈 도루'로 상대 배터리를 흔들었던 장채근 선생. "형, 왜 공 안 던졌어요?"하는 장채근 선생의 질문에 한 선배 포수는 "새끼야, 니가 뛰니까 어이가 없어서 생각이 안 났다."고 담백한 찬사를 보낸 바 있다. 그리고 몇 해 전 올드 스타 경기에서도 또 한번 도루를 보여주시며, '공갈포 정신'의 몰락을 탄식하는 퍼포먼스를 몸소 행하셨다.

한때 꼴찌 팀 태평양의 7번 타자로 시즌 중반까지 홈런 더비 1위를 달리기도 하셨던 강영수 선생 역시 어떠한가? 그가 공갈포 정신을 계승하지 않았다면, 95시즌에 홈런을 21방이나 날린 타자라는 걸 우리가 여태 기억할 수 있을까? 이처럼 공갈포 정신은 오늘날에도 마땅히 계승되어야 할 지고지순한 전통인 것이다.

삼진을 두려워하지 말고, 선풍기 스윙이라는 조롱을 이겨내라! 자장면 같은 볼넷으로부터 벗어나라! 흰 쌀 밥에 고깃국 같은 홈런 아니면 콩밥 같은 삼진!

타석에서 늘 당당하라! 공이 와서 맞지 않는 건 결코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팬들의 원망에 지지 마라!하늘이 자신을 버린다며 천하의 항우도 슬피 울지 않았는가. 세상살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공갈포 정신 만세! 공갈포여, 영원하라!

GBP(Gonggal Batter Point) 계산법

GBP = HR/H + SO/Out - BB/PA ; 안타 대비 홈런 비율과 아웃 대비 삼진 비율을 더한 후 타석 대비 볼넷 기록을 뺀다.

GBP+ ; 해당 시즌 GBP를 역대 GBP 평균 .210에 맞춰 시즌간 비교를 가능하게 보정한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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