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분위기가 가라 앉은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 대표팀 더그아웃. 도쿄=로이터 뉴스1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은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겁니다. 그런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정을 마무리한 뒤 소위 '야구인' 관점에서 나오는 대안을 보면 '문제가 무엇인지 정말 알기는 아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적지 않습니다.

 

일단 A 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패했는데 '고교 야구 문화를 바꾸자'는 주장부터 나오는 게 올바른 접근법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만 봐도 고교 시절부터 '튀는' 선수도 물론 있지만 프로에 와서 성장한 선수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마치 고교 야구를 바꾸지 않으면 당장 큰일이 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 가운데 '다시 알루미늄 합금(알로이) 방망이를 쓰자'는 이야기는 한국 야구가 소위 '세계 야구'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그렇게 주장하시는 분들이 학창 시절에 썼던 알로이 방망이는 이제 '불법 무기'입니다.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알로이 방망이 관련 규정. WBSC 홈페이지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은 18세 이하 월드컵부터는 나무 방망이만 쓰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15세 이하 월드컵 때는 BBCOR(Batted Ball Coefficient of Restitution) 인증을 받은 알로이 방망이만 쓸 수 있습니다. 'Batted Ball'은 무슨 뜻인지 아실 테고 'Coefficient of Restitution'은 공인구를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반발 계수'라는 뜻입니다.

 

반발 계수는 두 물체가 충돌했을 때 속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알려줍니다. 예컨대 당구에서 흰 공이 가만히 있는 빨간 공과 정면충돌하면 빨간 공은 흰 공이 굴러온 속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굴러가게 됩니다. 이건 당구공의 반발 계수가 1.0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BBCOR 인증을 받으려면 반발 계수가 1.05 이하여야 합니다. 1.05가 기준인 건 나무 방망이의 반발 계수가 보통 1.05 언저리이기 때문입니다. 알로이 방망이 길이나 무게 관련 WBSC 규정 역시 결국 '나무 방망이와 비슷한 성능을 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BBCOR 인증 제품을 소개하고 있는 '배트 다이제스트' 화면. 배트 다이제스트 홈페이지 화면 캡처

미국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알로이 방망이를 규제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현재 전환기입니다. 올해까지는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고시엔)에서 '고반발 알로이 방망이'를 써도 되지만 내년 선발고교야구대회(센바츠)부터는 '날지 않는'(飛ばない) 방망이만 써야 합니다.

 

이렇게 알로이 방망이 성능을 야구 방망이 수준으로 떨어뜨려 가면서도 계속 알로이 방망이를 허용하는 건 물론 경제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야구 방망이가 부러지는 일보다 알로이 방망이가 망가지는 일이 훨씬 드물거든요. 또 알로이 방망이는 한 팀이 돌려가며 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종합하면 야구인들은 국제 대회 성적이 문제라서 고교 야구를 알로이 방망이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 대회 때는 그 방망이를 쓸 수가 없습니다. "한국 빼고 다 알로이 방망이 쓴다"는 주장 역시 요즘 알로이 방망이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주장에 가깝습니다. 고교 야구 활성화 차원에서 알로이 방망이를 쓰자고 할 수도 있지만 국제 대회 성적 때문에 돌아가자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2003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알로이 방망이로 홈런을 치고 있는 성남고 김현중(전 삼성). 동아일보DB

알로이 방망이를 쓰자는 건 타격이 문제일 때 나와야 하는 주장입니다. 알로이 방망이를 쓰자는 건 평균 타구 속도를 끌어올려 보자는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한국 타자들은 여전히 잘 칩니다.

 

이번 WBC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호주에 8-7로 패한 이유가 겨우 7점밖에(?) 뽑지 못한 타선 때문이라고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한국이 일본에 4-13으로 패한 게 굴욕적인 것과 별개로 일본이 이번 조별리그에서 중국(8-1), 체코(10-2), 호주(7-1)에 허용한 점수를 모두 합쳐도 4점이 전부입니다.

 

투·타구 정보 제공 시스템 '스탯캐스트'에 따르면, WBC 역대 최다인 한 경기 22점을 뽑은 중국전을 제외해도, 한국 타자들이 이번 대회에서 기록한 평균 타구 속도는 시속 146.2㎞입니다. 이는 일본(143.6㎞)보다도 빠른 기록입니다. B조에 속한 나머지 세 나라 호주, 체코, 중국은 이 두 나라와도 차이가 작지 않습니다.

 

한국 타자들은 처음 만난 투수를 상대로 빠른 타구를 날릴 줄 압니다.

한국은 B조 5개국 가운데 팀 타율(0.336)과 장타력(0.542)에서 1위를 차지한 팀입니다. 장타력에서 타율을 빼서 계산하는 순수 장타력(0.206)도 역시 조 1위입니다. 중국전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중국과 경기한 게 한국만은 아닙니다.

 

이번 WBC 때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한국은 2021년 열린 도쿄 올림픽 때도 6개 본선 참가국 가운데 팀 OPS(출루율+장타력) 1위(0.816)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야구가 타격 때문에 국제대회에서 고전하고 있다고 보는 건 옳지 않은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타자들이 이미 이렇게 잘 치는데 고교 야구에서 다시 알로이 방망이를 써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을까요? 문제는 공격이 아니라 수비, 특히 투구, 그 가운데서도 투구 속도에 있습니다.

 

이번 대회 B조에서 가장 빠른 공 68개를 전부 일본 선수가 던졌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일본 투수들은 포심 패스트볼, 투심 패스트볼, 싱커 등 속구 계열을 던져 평균 시속 152.6㎞를 기록했습니다. 한국은 시속 7㎞ 가까이 뒤진 145.9㎞였습니다. 한국 투수는 상위 25%가 시속 148.4㎞였는데 일본은 하위 25%가 149.1㎞였습니다.

 

세상에는 "속도보다 제구력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분들이 적지 않고 그 말이 영 허튼소리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차이가 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일본에서는 '나는 속도가 안 되니까 제구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공이 느린 투수가 한국에 오면 당장 '상위 클래스'에 이름을 올리게 되니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속도와 제구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속도가 나오면 투수가 자기 공에 자신을 갖게 되고 그러면 소위 '코너워크'에 신경을 덜 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B조에서 공이 가장 빨랐던 일본, 가장 느렸던 중국 그리고 한국을 비교하면 이 차이가 드러납니다.

 

중국 투수들도 당연히 '코너워크'에 신경을 씁니다.

이 그림에서 색깔이 짙을수록 해당 위치에 공을 많이 던졌다는 뜻입니다. 중국 투수들은 1루 쪽 보더라인 낮은 코스로 공을 던지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반면 일본 투수들은 그냥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에 던졌습니다. 한국은 과도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결과는 일본 - 한국 - 중국 순서대로 좋았습니다.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南海·현 소프트뱅크)에서 감독 겸 포수 겸 4번 타자로 뛰었던 노무라 가쓰야(野村克也) 감독(1935~2020)은 "강타자의 최고 어드밴티지는 상대 투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공이 느려서 자기 공에 자신이 없는 선수는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제구도 더욱 흔들리게 됩니다.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 넣었다가 맞으면 안 되니까요. 반면 공에 자신이 있으면 단순 명료하게 던지면 됩니다. 제구를 잡으면 구속이 따라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구속이 올라오면 제구에 목을 매달 필요까지는 없는 겁니다.

 

메이저리그 홈페이지 화면 캡처

체코를 상대로 선발 등판한 사사키 로키(22·지바 롯데)는 1회초 1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상대 3번 타자 마레크 흘루프(24)에게 3루 아래쪽 코너에 꽉 차는 시속 164km(B조 공동 1위)짜리 공을 던졌습니다(위 그림 ③). 흘루프는 이 공을 받아 쳐 2루타로 연결되는 빨랫줄 타구를 만들어 냈습니다. 구속과 제구 모두 좋았는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요?

 

세상에 만병통치약 같은 투구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빠르고 정확하게 던져도 상대 타자에게 아예 맞지 않는 건 아닙니다. 대신 공이 빠르면 그 확률은 줄어듭니다. 이번 대회 B조에서 타자가 때린 공이 시속 150㎞ 이상일 때는 31%가 살아서 1루를 밟았습니다. 시속 140km대에서는 36.8%, 130km대에서는 40.1%로 이 비율이 오릅니다.

 

전체 투구 결과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체 투구 가운데 스트라이크가 늘어나거나 타자가 아웃 되는 등 투수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는 비율을 따져 보면 시속 150km 이상일 때는 58%였다가 140km대에서는 55%, 130km 대에서는 46%로 줄어듭니다. 공은 일단 빠르고 봐야 합니다.

 

'드라이브라인'에서 구속 강화 유소년 프로그램을 소화 중인 야구 소년. 드라이브라인 홈페이지

'드라이브라인'은 역학적으로 동작을 분석하는 '바이오메카닉스'를 활용해 야구 선수 기량 발전을 돕는 회사입니다. 유망주는 물론이고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뛰는 선수 가운데도 이 회사 도움을 받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회사에서는 "제구를 잡고 나면 '나중에' 구속이 따라온다는 말은 있다. 그 '나중'이 도대체 언제냐?"면서 "빠른 공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는 건 기본적인 진리(Basic Truth)"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어릴 때 구속을 끌어올리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이 회사에서 '집중 연습'만큼 강조하는 한 가지는 회복(recovery)과 휴식(rest)입니다. 근육에 부하를 준 다음에는 운동 효과가 제대로 발현될 수 있게끔 '적극적으로' 쉬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한국에는 여전히 '연습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야구 지도자가 적지 않습니다.

 

밥 위주로 밥상을 차린 구한말 풍경.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조선 시대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 때 사용했다는 밥그릇을 이제 와서 보면 '저걸 정말 다 먹었다고?'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 옛날에는 밥을 제외하면 영양분을 공급할 만한 수단이 없었기에 밥이라도 많이 먹어야 했던 겁니다. 이제는 먹을거리가 넘쳐나다 보니 밥을 저렇게 많이 먹었다가는 '무식해 보인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우리 학생 선수들은 '과학적인 연습'이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처럼 일단 무조건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 걸까요? 미국에서는 보통 일주일에 자기 나이만큼 훈련하는 걸 기본으로 칩니다. 만 15세 선수라면 일주일에 15시간이 적정 훈련량이라는 의견입니다.

 

'직장인 군단' 체코 대표팀이 이번 대회에서 잔잔한 감동을 안길 수 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논문'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야구 관련 최신 논문을 읽으면서 이를 연습에 적용한 결과 '세계 야구'에 성큼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한국 야구팬들은 언제까지 과학적 근거도 찾기 힘든 알로이 방망이, 제구력 타령을 견디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요? 자칭 야구인 여러분, 제발, 쪼옴!

 

원래 '데이터 비키니'로 썼던 글인데 어른들 사정으로 블로그에 옮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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