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2020 프랑스 오픈 여자 단식 챔피언십 포인트. 유튜브 화면 캡처


'이제 때가 됐다'는 듯 이가 시비옹테크(19·폴란드·세계랭킹 53위)가 포핸드 공격을 날렸습니다.


코트 반대편에 있던 소피아 케닌(22·미국·6위)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공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 순간 미국 록 밴드 '건즈 앤 로지스'가 1987년 발표한 '웰컴 투 더 정글'은 2020년 프랑스 오픈 여자 테니스 대회 여자 단식 공식 주제가가 됐습니다.


이번 대회 들어 경기 시작 전 계속 이 노래를 들었다는 시비옹테크가 이 한방으로 올해 수잔렝글렌컵 그러니까 프랑스 오픈 여자 단식 우승 트로피 주인이 됐기 때문입니다.


수잔렝글런켑을 들고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는 이가 시비옹테크. 파리=로이터 뉴스1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오고 나서 14년 뒤 태어난 시비옹테크는 "매일 듣다 보니 솔직히 조금 질렸다"면서 "그래도 루틴을 바꾸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노래를 바꾸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10일(이하 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스타드 롤랑 가로스에서 열린 결승전 역시 최종 결과는 2-0(6-4, 6-1)이었습니다.


이번 대회 여섯 경기에서 전부 2-0 승리를 기록했던 시비옹테크는 결국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챔피언 자리에 올랐습니다.


프랑스 오픈 여자 단식에서 무실세트 우승을 차지한 건 2007년 쥐스틴 에넹(38·벨기에·은퇴) 이후 시비옹테크가 13년 만에 처음입니다.


▌이가 시비옹테크 2020 프랑스 오픈 경기 결과
 경기  상대 선수  상대 랭킹(시드)  1세트  2세트  경기 시간
 1회전  마르케타 본드루소바  19위(15)  6-1  6-2  1시간 3분
 2회전  셰수웨이(謝淑薇)  63위  6-1  6-4  1시간 7분
 3회전  외제니 부샤르  168위(WC)  6-3  6-2  1시간 14분
 16강  시모나 할레프  2위(1)  6-1  6-2  1시간 8분
 8강  마르티나 트레비산  159위(Q)  6-3  6-1  1시간 18분
 준결승  나디아 포도로스카  131위(Q)  6-2  6-1  1시간 10분
 결승  소피아 케닌   6위(4)  6-4  6-1  1시간 24분


폴란드 선수가 메이저 대회 단식 우승을 차지한 건 남녀부를 통틀어 시비옹테크가 아예 처음입니다.


그 전에는 아니그네슈 라드반스카(31·은퇴)가 2012년 윔블던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게 1968년 이후 폴란드 선수 최고 성적이었습니다.


1968년은 프로 선수가 메이저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된 해로 이때 이후를 보통 '오픈 시대'(Open Era)라고 부릅니다.


오픈 시대 이전에도 야드비가 엥드제호프스카(1912~1980)가 세 차례 준우승을 차지했을 뿐입니다.


엥드제호프스카는 1937년 윔블던·US오픈, 1939년 프랑스 오픈 준우승자 출신입니다.


수잔렝글런켑을 앞에 놓고 기념촬영 중인 이가 시비옹테크. 프랑스 오픈 홈페이지


이 대회 전까지 여자프로테니스(WTA)투어에서 단 1승도 없었던 시비옹테크는 이날 우승으로 160만 유로(약 21억7000만 원)를 받아가게 됐습니다.


이전까지 누적 상금이 110만6808 달러(약 12억7000만 원)였으니까 한번에 1.7배 이상 수입을 늘린 겁니다.


시비옹테크는 이날 승리로 세계랭킹도 17위까지 오르게 됐습니다. 물론 역대 개인 최고 랭킹입니다.


시비옹테크는 "메이저 대회 우승은 먼 훗날에나 일어날 일인 줄 알았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이상할 정도"라면서 "어찌됐든 난 메이저 대회 챔피언"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비옹테크 가족. 아가타 시비옹테크 씨 인스타그램


시비옹테크가 테니스를 시작한 건 '세살 많은 언니를 이겨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올림픽 조정 선수 출신인 아버지 토마슈(56) 씨는 두 딸도 운동 선수로 키우고 싶어 했습니다.


먼저 테니스를 시작한 건 아가타(22) 씨였습니다.


그러나 언니는 부상에 시달린 끝에 2015년을 마지막으로 '승부의 세계'에서는 모습을 감췄습니다.


대신 동생이 이듬해(2016년) 프로로 전향한 동생이 이번에 '대형 사고'를 치면서 언니 테니스 커리어도 다시 조명받게 됐습니다.


2020 프랑스 오픈 여자 단식 우승을 차지한 이가 시비옹테크. 파리=로이터 뉴스1


시비옹테크는 사실 이번 대회 전까지도 대학 진학 여부를 놓고 고민 중인 여고 졸업반이었습니다.


시비옹테크는 지난해 대회 16강에서 시모나 할레프(29·루마니아·2위)에게 45분 만에 0-2로 완패한 뒤 "이제 집으로 돌아가 기말고사를 봐야 한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스스로를 '세미 프로 선수'라고 규정하는 시비옹테크는 이번 대회 전 대학 진학 계획에 대해 질문을 받자 "일단 앞으로 2년 동안에는 테니스에만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세계랭킹 10위 안에 들고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노릴 만큼 성적을 낸다면 테니스에 집중할 거고 아니면 대학 진학으로 방향을 틀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건즈 앤 로지스 덕분에 아마 시비옹테크가 당분간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소피아 케닌(오른쪽)에게 인사를 건네는 이가 시비옹테크. 파리=로이터 뉴스1


시비옹테크가 올해 마지막 메이저 대회 정상을 차지하면서 여자 단식 무대는 정말 '정글'이 됐습니다.


최근 4년 동안에는 같은 해에 메이저 대회에서 2승을 기록한 선수도, 같은 대회에서 2연패를 차지한 선수도 없습니다.


▌2017년 이후 메이저 대회 여자 단식 챔피언
 연도  순서  대회  우승자
 2017  1  호주 오픈  세리나 윌리엄스
 2017  2  프랑스 오픈  옐레나 오스타펜코
 2017  3  윔블던  가브리녜 무구루사
 2017  4  US 오픈  슬로안 스티븐스
 2018  1  호주 오픈  캐럴라인 보즈니아키
 2018  2  프랑스 오픈  시모나 할레프
 2018  3  윔블던  앙겔리크 케르버
 2018  4  US 오픈  오사카 나오미
 2019  1  호주 오픈  오사카 나오미
 2019  2  프랑스 오픈  애슐리 바티
 2019  3  윔블던  시모나 할레프
 2019  4  US 오픈  비앙카 안드레스쿠
 2020  1  호주 오픈  소피아 케닌
 2020  2  US 오픈  오사카 나오미
 2020  3  윔블던  이가 시비옹테크


과연 내년에는 이 정글에서 여왕을 차지하는 선수가 나오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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