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 어느 경기의 한 장면

지난 해 8월 18일 수원 구장에서는 홈팀 현대 유니콘스와 SK 와이번스간의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SK의 7회초 공격이 시작되기 전까지 2회와 4회 각각 1점을 얻은 현대의 2:0 리드. 현대는 7회초 수비에서도 가볍게 2아웃을 잡아내며 경기를 쉽게 풀어나가는 듯 했다.

하지만 갑자기 현대 선발 장원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9번 타자 김태균에게 좌전 안타를 허용한 후로 연거푸 3안타를 허용 2:1로 쫓기게 된 것이다. 현대는 아웃 카운트 하나가 너무도 절실한 상황이었다. 결국 2사 주자 1, 2루 상황에서 당시 김재박 감독은 장원삼을 내리고 특급 셋업맨 신철인을 마운드에 올렸다. 타석에 찬스에 유난히 강한 박재홍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신철인은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꽂아 넣으며 공격적인 피칭을 시도했고, 박재홍 역시 2구째에 노리고 들어간 듯한 큰 스윙을 선보이며 만만치 않은 승부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승부가 난 것은 7구째. 박재홍이 때린 타구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홈 승부를 위해 다소 앞쪽에서 수비를 펼치던 이택근은 타구를 쫓아 뒤로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람이 문제였다. 태풍의 영향으로 야구장 위에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고, 외야 수비에 익숙하지 못한 이택근은 결국 낙구 지점을 포착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라운드에 떨어진 공은 이택근을 비껴 옆으로 굴렀다. 이택근이 재빨리 내야를 향해 공을 던졌지만 이미 박재홍은 2루에 안착해 있었다. SK가 3:2로 역전에 성공한 후였다.

그러나 SK의 공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 타자는 누구보다 현대 투수들을 잘 알고 있는 박경완. 중견수 뒤를 향해 날아가던 커다란 타구는 결국 담장을 넘었고, 박경완은 2루에 나가있던 박재홍과 홈에서 반가운 세레모니를 선보일 수 있었다. 현대 출신 두 타자가 너무도 보기 좋게 친정팀을 울린 것이다. 물론 박경완에게 홈런을 허용한 투수 역시 신철인이었다.


# 평균 자책점의 허상

이렇게 쓰고 보면 신철인이 이 경기 패전의 책임을 져야만 할 것처럼 보인다. 역전을 허용하는 점수를 내준 것도 신철인, 쐐기점을 허용한 것 역시 신철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경기의 패전 투수는 바로 장원삼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역전 득점을 올리는 홈플레이트를 밟은 김강민은 장원삼이 책임져야 할 주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근우의 득점까지 포함, 장원삼의 기록에는 자책점 2점까지 추가됐다. 그 결과 실제로 장원삼이 마운드에 있을 때 내 준 점수는 1점이었지만, 이 경기에서 장원삼이 허용한 점수는 모두 3점이 된 것이다. 선발 투수의 슬픈 숙명 또는 평균 자책 계산의 허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다시 상황을 거슬러 가보자. 만약 신철인이 박재홍을 범타로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면 장원삼의 기록에는 자책점 2점이 기록될 필요가 없었고,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면 승리 투수 역시 장원삼의 몫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원삼은 이미 자신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결과물로 전혀 다른 성적표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불펜 투수가 단지 선발 투수의 승리를 날리는 것뿐 아니라 이렇듯 패전의 멍에를 씌울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야구다.

하지만 신철인도 굳이 주자가 나가 있는 상태에서 마운드에 오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루상에 주자가 아무도 없을 때보다 주자가 이미 출루해 있는 경우에 실점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 스코어링 포지션에 나가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 한번 이런 생각을 해보자. 도대체 위 상황에서 신철인은 어느 정도 실점 확률을 안고 마운드에 올랐을까?


# 득점 기대값 (Run Expectancy)

이 상황에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자료가 바로 득점 기대값(Run Expectancy)이다. 득점 기대값은 루상의 주자 상태와 아웃 카운트에 따른 24가지 상황에 대해 평균적인 득점 정도를 정리한 자료료, 흔히 도표(Matrix)로 나타낸다. 우리 프로야구 2006 시즌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은 결과물이 나온다.

<표 1> 2006 KBO 득점 기대값 메트릭스(Matrix)

다시 신철인과 장원삼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신철인은 2사 1, 2루에서 마운드에 올랐다. 이 때 현대의 실점 기대값은 0.42점이다. 그런데 신철인은 2점을 실점했다. 따라서 이 경우 신철인이 책임져야 할 몫은 2점에서 0.42점을 뺀 1.58점이다. 거꾸로 이야기해 장원삼은 책임지지 않아도 될 1.58점을 자신의 자책점에 더하게 된 것이다.

사실 야구를 보다 보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따라서 선발 투수가 루상에 주자를 남겨 놓고 마운드를 떠날 때의 실점 기대값과 다음 투수가 실제로 허용한 실점과의 차이를 알아보는 것 역시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어떤 투수가 불펜진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지 혹은 불펜에 의해 손해를 많이 봤는지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표 2> 선발 투수별 +/- (<0일수록 선발 투수에게 이득)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위에서 선발 투수의 슬픈 숙명에 시달려야 했던 장원삼이 불펜진의 도움을 가장 받지 못했다. 장원삼은 루상에 주자를 남겨 둔 채 총 13번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이때 장원삼이 허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대값은 8.74점, 실제로 다음 투수들이 허용한 점수는 12점이었다. 빈약한 불펜 지원으로 인해 약 3.26점이 자책점에 추가되고 만 것이다.

반면 한기주는 불펜진의 도움으로 5.68점을 절약했다. 물론 이는 한기주가 선발로 나섰을 때의 성적이다. 불펜 투수로 전향한 이후 한기주는 이런 은혜에 톡톡히 보답했다. 자신 역시 선발 투수들의 점수를 1.52점 막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은혜를 보다 더 확실히 갚은 선수는 같은 팀의 이상화다. 이상화가 선발로 나선 경기에서 불펜 투수들은 이상화의 자책점을 3.82점 줄여줬다. 이상화가 줄여준 선발 투수들의 자책점은 4.44점으로 그보다 많다.

한편 선발 송신영은 불펜 투수들의 도움을 1.57점 받았지만, 불펜 송신영은 선발 투수들의 자책점에 3.58점을 더했다. LG의 경헌호 역시 이 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경헌호는 선발로 나섰을 때 1.00점의 혜택을 봤지만, 오히려 선발 투수들의 자책점을 3.61점 더하는 모양새를 보여주기도 했다. 안영명의 기록 역시 재미있다. 선발 안영명은 불펜 투수에 의해 1.12점 가량 자책점에 손해를 봤고, 자신 역시 선발 투수들의 자책점에 3.47점을 더했다.

<표 3> 구원 투수별 +/- (<0일수록 선발투수에게 이득)


# 평균 자책점 비틀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알아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한 선발 투수가 불펜의 역할로 인해 자책점에서 어느 정도 이득 또는 손해를 봤는지 알아봤다. 이 결과는 고스란히 투수의 자책점에 반영돼 평균 자책점 계산에 쓰이고 있다. 그럼 거꾸로, 불펜의 영향력을 제거한 평균 자책점도 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한번 불펜 투수들 때문에 생긴 +/-를 실제 자책점에 대입해 보자는 뜻이다.

예를 들어 평균 자책 1위 류현진의 경우 선발로 나선 197.6 이닝 동안 49 자책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5.37점은 불펜 투수들이 줄여준 효과가 반영돼 있다. 따라서 류현진이 평균적인 불펜 지원을 받았다면 그의 자책점은 54.37점이 될 것이다. 이 경우 2.23이던 그의 평균 자책점은 2.48점으로 올라간다. 한화 팬들, 걱정하실 필요 없다. 그래도 부동의 1위니까 말이다.

<표 3> 불펜 영향력을 제거한 평균 자책 (선발 등판시만)


# 야구의 주인공은 선발 투수

물론 좋은 투수일수록 주자를 남겨둔 상태에서 마운드를 떠날 일이 더 적을 것이다. 그리고 주자를 내보낸 상태에서 투수를 교체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 역시 감독의 선택에 크게 좌우되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분명한 건 불펜의 도움을 받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 선발 투수의 기록은 확연히 달라질 가능성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선발 투수들은 마운드에서 내려온 후에도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이닝을 끝까지 지켜본다. 효과적으로 이닝을 매조지한 불펜 투수에게 누구보다 기쁜 하이파이브를 건네는 선수가 바로 선발이고, 또 구원에 실패한 투수에게도 누구보다 따듯한 격려를 보내는 선수가 또 선발 투수다. 결국 책임은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선발 투수들은 때로 자신의 수고를 덜어주는 고마움에, 또 때로 누구보다 자신에게 구원 투수가 미안해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배려로 그렇게 덤덤히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인다. 마치 경기의 주인공으로서 당연히 치러내야 하는 통과의례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야구는 결코 혼자 하는 종목이 아니다. 위에서는 불펜 투수의 영향만 언급했지만, 수비진의 역량 역시 실점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팀의 승패는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개인 기록에도 팀워크가 반영돼 있는 종목이 바로 야구라는 얘기다.

추운 겨울,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되는 멋진 사내들이 너무도 그리운 건 아마도 그런 까닭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야구가 곧 사람살이라는 이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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