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29일 안방 경기서 볼티모어를 상대로 투구 중인 류현진. 버팔로=로이터 뉴스1


'블루 몬스터' 류현진(33·토론토)은 임시 안방 구장 세일런 필드에서 28일(이하 현지시간) 볼티모어를 상대로 이번 시즌 일곱 번째 선발 등판에 나섰습니다.


5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은 류현진은 6회초 수비 때 2사 만루 위기를 맞았습니다.


류현진은 이때 타석에 들어선 라이언 마운트캐슬(23)을 상대로 바깥쪽 낮은 코스에 떨어지는 체인지업(시속 130km)을 던져 땅볼을 유도했습니다.


토론토 3루수 트래비스 쇼(30)가 타구를 잘 건져냈지만 1루수 미트가 아니라 그라운드를 향해 던진 게 문제였습니다.


토론도 1루수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21)가 이 공을 뒤로 빠뜨린 사이 볼티모어 2, 3루 주자가 홈플레이트를 밟았습니다.


실책이냐? 내야 안타냐? 그것이 문제로다


공식기록원은 처음에 이 장면을 3루수 실책으로 기록했습니다.


야구에서 원바운드 송구가 나왔을 때는 공을 던지는 선수에게 실책을 기록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실책으로 점수를 내줬으니까 이 상황에서 류현진은 자책점을 한 점도 기록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기록원이 내야 안타로 판단을 바꾸면서 이 두 점 모두 자책점이 됐습니다.


류현진은 다음 타자 팻 발라이카(28)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일단 이닝을 끝마쳤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한화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류현진


경기가 끝난 뒤 류현진은 이 상황에 대해 "구단과 코칭스태프에서 잘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구단에서 오기(誤記)에 대해 이의 신청을 할 것으로 믿는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류현진이 이런 식으로 자책점이 올라간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류현진은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 시절에도 2014년 4월 27일 경기를 비롯해 총 세 차례에 걸쳐 자책점을 정정 받았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보스턴 시절 무키 베츠


그런데 자책점은 뭐고 비자책점은 또 뭘까요? 야구에서는 왜 이 둘을 구분하고 있는 걸까요?


야구 규칙은 자책점(自責點)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9.16 자책점(EARNED RUN 自責點)

자책점이란 투수가 책임져야 할 실점을 말한다. 자책점을 결정하려면 실책(포수의 타격방해 포함)과 패스트볼을 제외하고 그 이닝을 재구성 하여야 한다. 실책 없이 진루한 베이스를 결정할 경우 의심스러운 것은 투수에게 유리하도록 한다. 

자책점을 결정할 경우 고의4구는 보통의 4구와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혹시 몰라 말씀드리면 여기 등장하는 패스트볼은 'fastball'이 아니라 'passed ball' 그러니까 포일(捕逸)입니다.


여기서 제일 재미있는 표현은 "의심스러운 것은 투수에게 유리하도록"입니다.


투수에게 이렇게 실책 또는 패스트볼이 나왔을 때만이 아닙니다.


한국 프로야구 유격수의 흔한 수비


야수 중 누군가 말도 안 되는 수비를 성공시키는 바람에 실점을 막았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러면 투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고 (오히려 잘못을 했을 수도 있고) 야수가 잘한 거지만 이득을 보는 쪽은 투수입니다.


아무도 '평범한 야수가 있었다면 n점을 내줬을 테니 그만큼 자책점을 올리자'고 말하지 않으니까요.


야수는 그저 투수에게 고맙다는 박수 갈채를 받을 뿐입니다.


요컨대 투수는 자기는 잘했는데 야수가 잘못했을 때는 할인을 받지만 자기 잘못을 야수가 커버했을 때는 할증을 받지 않는 존재입니다.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최고 타자로 평가했던 윌리 킬러. 시카고 역사 박물관 홈페이지


이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사실 한자어 '자책점'과 영어식 표현 '언드 런'(earned run)은 살짝 뉘앙스가 다릅니다.


자책점이 자기(투수)가 책임져야 할 점수라는 뜻이라면 언드 런은 '자기가 벌어들인 점수'라는 뜻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맞습니다. 야구에서 언드 런과 언언드 런(unearned run·비자책점)을 구분하는 건 원래 '타격 기록'이었습니다.


미국야구조사협회(SABR)에 따르면 이 둘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은 최소 1871년부터 나왔습니다.


1887년이 되면 '상대 실책으로 이득을 보지 않고 얻어낸 점수'로 언드 런으로 정의하게 됩니다.


이런 구분이 필요했던 건 당시에는 실책이 정말 많았고 그래서 자책점 비율도 엄청 낮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당시에는 볼넷을 '투수 실책'으로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볼넷 이후 얻어낸 득점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한 쪽에서는 '볼넷도 실책이니까 언드 런 집계 때 다른 실책과 마찬가지로 볼넷 이후 나온 점수는 제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반대 쪽에서는 '볼넷은 다른 실책과 엄연히 성질이 다르다. 볼넷 이후 점수가 났을 때는 언드 런 집계에 포함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이 중 두 번째 주장이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면서 언드 런은 수비 기록 자책점이 됐습니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투수 잘못 때문에 올라간 점수를 언드 런에서 제외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결국 수비 쪽 책임을 이야기하는 거니까요.


지금도 메이저리그 공식 기록원이 기록지 투수 이름 옆에 써야 하는 숫자는 'earned runs'가 아니라 'earned runs allowed'입니다.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자리한 헨리 채드윅 현판


'자책점과 비자책점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물 가운데는 흔히 '야구 기록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헨리 채드윅(1824~1908)도 있었습니다.


박스 스코어를 고안한 것도, 삼진을 알파벳 'K'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도 모두 채드윅이었습니다.


타율, 평균자책점 역시 채드윅의 발명품입니다.


채드윅은 1879년 "어떤 투수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주는 지표를 단 하나만 고르라면 그건 이 투수를 상대로 상대팀에서 뽑은 언드 런"이라고 썼습니다.


채드윅은 이로부터 5년 뒤(1884년) '승리 투수'라는 개념도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 다시 4년이 지나서는 패전 투수 아이디어도 세상에 내놓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511승 316패로 다승과 다패 1위를 모두 기록한 사이 영. 동아일보DB


자책점에 이어 승리·패전 투수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야구 이야기'가 훨씬 풍성해졌습니다.


만약 이런 개념이 없었다면 '류현진은 6이닝 동안 2실점했다'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법이 있기에 우리는 '투수는 정말 잘 던졌는데 야수 실책 때문에 패전 투수가 됐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게 됩니다.


채드윅에게 이런 기록이 필요했던 건 그가 뉴욕타임스 등에서 일한 야구 기자였기 때문입니다. 


기자에게는 항상 '이야기'가 필요하게 마련인데 채드윅은 이런 기록을 고안해 스스로 이야기감을 만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100년이 넘게 흐른 뒤 태평양 건너편에 사는 저 역시 그 덕에 이렇게 길고 긴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긴 글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 모두 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시대를 자책점 없이 승리 투수로 마무리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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