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20일 국회에서 고유민 관련 기자회견을 진행 중인 박지훈 변호사, 어머니, 송영길 의원(왼쪽부터). 뉴시스


고유민 선수를 죽음으로 내몬 종범은 악성댓글이지만 정작 주범은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주범은 구단과 코칭스태프의 의도적 따돌림과 훈련 배제, 그리고 법과 규약에 약한 20대 여성 배구인을 상대로 한 구단의 실질적 사기다.


체육 시민운동 단체 '사람과 운동' 소속인 박지훈 변호사는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같이 주장했습니다.


박 변호사는 지난달 31일 숨진 전 프로배구 여자부 현대건설 고유민(향년 25세) 유가족 법률 대리를 맡고 있습니다.


현대건설 동료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주고 받는 고유민(왼쪽).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구단과 코칭스태프의 의도적인 따돌림'이 있었는지 판정하는 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실제로 구단과 코칭스태프가 훈련 과정에서 고유민을 배제했다고 해도 그게 정말 다른 의도를 가지고 그런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확인 가능한 상황만 따져보면 이렇습니다.


사건 발단은 현대건설 주전 리베로 김연견(27)의 부상이었습니다.


김연견은 2월 4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흥국생명과 2019~2020 V리그 5라운드 방문 경기를 벌이던 도중 발목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김연견이 빠지면서 선두를 달리고 있던 현대건설은 등록 최소 인원(14명)으로 시즌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한국배구연맹(KOVO) 규정에 따라 프로배구는 4라운드 시작 이후에는 트레이드를 할 수 없습니다.


제7조 (이적 선수의 등록)

① 구단은 이적선수의 등록을 위하여 구단 간 선수 양수·양도에 관한 다음 각 호의 서류를 계약체결일 부터 10일이내에 연맹에 제출하여야 한다.

1. 선수 등록 신청서 1부

2. 선수 양수·양도 계약서 1 부

3. 이적 동의서(필요 시) 1부

② 경기 개시 하루 전 오후 6시까지 제출한 이적 등록 서류에 한하여 해당 선수는 다음 날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

③ 이적의 등록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할 시 공시가 불가하다.

1. 정규리그 네 번째 라운드 시작일로부터 FA보상 절차완료일까지 국내선수 간의 이적

2. 팀 창단 지원조건으로 신인선발제도에 따라 1라운드에 지명된 신인선수의 1시즌 간 다른 구단으로의 이적(여자부 제외)

3. 계약체결일부터 11일 이후에 등록을 요청한 이적

④ 시즌 중 이적선수는 이적 후 차기시즌에는 이적 직전 팀으로의 복귀는 제한된다

─ KOVO 선수등록규정


이에 구단에서는 이 시즌 원포인트 서버로 경기에 나서고 있던 레프트 고유민에게 리베로를 맡기기로 합니다.


고유민은 이후 첫 경기였던 그달 11일 안방 경기에서 한국도로공사를 상대로 서브 리시브 성공률 5.9%를 기록하는 데 그쳤습니다.


나흘 뒤(15일) KGC인삼공사를 상대로는 리시브 성공률이 아예 제로(0)까지 내려갔습니다.


리시브가 흔들리면서 현대건설은 11일에는 0-3, 15일에는 1-3으로 패했고 2위 GS칼텍스에 승점 2점 차이로 쫓기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리고 2월 29일 고유민은 "아무런 의사 표명없이"(현대건설) 팀을 이탈했습니다.


결국 생애 마지막 출전이 된 2월 15일 경기 당시 고유민.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원래 이럴 때 구단이 꺼내 들어야 하는 카드가 바로 임의탈퇴입니다.


제52조 (임의탈퇴 선수)

①임의탈퇴선수는 선수가 계약 및 제반 규정을 위반 또는 이행하지 않아 계약의 유지를 희망하지 않는다고 인정될 경우에 구단이 복귀조건부로 임의탈퇴선수로 지정할 것을 요청하여 총재가 이를 공시한 선수를 말한다.

②임의탈퇴 선수는 공시일로부터 선수로서의 모든 활동이 정지되며, 복귀할 때까지의 연봉은 지급하지 않는다.

─ KOVO 규약


사실 이때 현대건설에서 한국배구연맹(KOVO)에 고유민을 임의탈퇴선수로 지정해 달라고 요청했으면 이대로 이 사안은 끝입니다.


그런데 현대건설은 이런 요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수단에 최소 등록 인원밖에 없었기 때문에 임의탈퇴선수 지정이 불가능했던 겁니다.


이에 현대건설과 고유민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상호합의 하에 3월 30일자로 계약을 '중단'"(현대건설)하기로 합니다.


단, 이날 유가족이 공개한 서류를 보면 현대건설과 고유민은 계약을 '해지'했습니다.


선수 계약 해지 합의서. 고유민 유가족 제공


이 합의서에 대해 유가족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현대건설은 고유민 선수에게 트레이드를 시켜주겠다며 계약해지 합의서를 쓰게 한 뒤 잔여 연봉 지급을 하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고유민 선수에겐 일언반구 말도 없이 임의탈퇴 선수로 묶어 어느 팀에서도 뛸 수 없게 손발을 묶어놨다.


고유민 선수는 자신의 임의탈퇴 소식을 접한 뒤 가족, 지인, 동료들에게 구단에 속았다며 배신감과 절망감을 토로했다.


계약을 해지하면 고유민은 자유계약선수(FA)다. FA는 임의탈퇴 처리할 수 없다.


일단 용어 선택에 살짝 잘못이 있습니다.


KOVO 규정상 고유민이 현대건설과 계약을 해지했다고 해서 FA 신분이 되는 건 아닙니다.


다시 FA 계약 시점으로부터 세 시즌이 지나야 다시 FA 자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8조 (FA자격 재취득)

FA선수가 제2조 제1항의 기준을 충족하여 정규리그 3시즌을 경과하면 다시 FA자격을 취득한 것으로 한다. 

─ KOVO 자유계약선수관리규정


고유민은 2018~2019 시즌이 끝나고 FA 자격을 얻어 현대건설과 재계약했기 때문에 아직 이 자격은 안 됩니다.


대신 구단에서 '은퇴동의서'를 작성하면 '자유신분선수'가 될 수는 있습니다.


제53조 (은퇴 선수)

은퇴 선수는 선수 본인이 선수생활을 종료하고자 하는 선수를 말하며, 계약이 만료되지 않은 선수가 선수생활을 종료하고자 계약해지를 원하는 경우

구단이 연맹에 은퇴동의서를 제출한 후 은퇴선수로 접수한다. 단, 은퇴선수로 접수 시 연맹은 자유신분선수로 전환하여 공시하며, 모든 구단과 자유롭게 선수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 KOVO 자유계약선수관리규정


따라서 현대건설은 △계약을 해지하지 않은 채 고유민을 임의탈퇴 선수로 지정하거나 △은퇴동의서를 KOVO에 제출해 자유신분선수 신분 전환을 보장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계약을 해지했을 때 현대건설과 고유민이 어떤 관계가 되는지 '선수계약서'에 별도로 나와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현대건설-고유민 선수 계약서. 고유민 유가족 제공


어떤 선수를 "임의탈퇴 또는 은퇴 당시 구단으로의 복귀"만 가능하게 하려면 이 선수를 임의탈퇴 선수로 지정해야 합니다.


현대건설은 결국 4월 6일 KOVO에 고유민을 임의탈퇴선수로 지정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KOVO는 이 요청을 반려합니다. KOVO 규정에 따라 선수 신분 변경이 불가능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제9조 (구단의 보상 및 이적료 등)

⑦구단은 정규리그 종료 후부터 FA선수에 대한 구단의 보상이 종료 될 때까지 연맹에 은퇴, 임의탈퇴, 웨이버, 트레이드 등 선수신분에 관한 공시를 요청할 수 없다." 

─ KOVO 자유계약선수관리규정


여기서 문제가 하나 더 생깁니다.


KOVO 관계자가 현대건설에서 보낸 임의탈퇴 공시 요청 e메일을 꼼꼼하게 읽어보지 못했던 것.


한국배구연맹(KOVO) 로고


현대건설에서 보낸 e메일 본문에는 고유민이 계약을 해지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지만 KOVO는 시기만 문제 삼아 이를 단순 반려했습니다.


사실 KOVO는 "계약을 해지했다면 임의탈퇴 선수 지정이 불가능하다"고 현대건설에 통보해야 했습니다.


그 대신 선수 신분 변경이 가능한 5월 1일이 되자 현대건설 요청을 받아들여 임의탈퇴 사실을 공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유민도 자기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임의탈퇴 공시 전에는 선수 본인에게 확인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고유민 역시 계약 해지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계약 해지 합의서에 "본 합의서에 대하여 비밀을 유지"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으니까요.


유가족이 공개한 모바일 메신저 대화 내용을 보면 "고유민이 구단에 속았다며 배신감과 절망감을 토로했다"는 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유민이 구단에서 자신을 임의탈퇴선수로 지정했다는 소식을 한국배구연맹(KOVO)으로부터 전달 받은 뒤 주고 받은 모바일 메신저 대화 내용. 고유민 유가족 제공


단, 현대건설에서 고유민을 임의탈퇴 처리했다고 해서 그게 꼭 트레이드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지는 않습니다.


프로야구는 한국야구위원회(KBO) 야구 규약에 따라 공시일로부터 1년이 지나야 복귀가 가능합니다.


제66조 [복귀신청]

①임의탈퇴선수는 총재가 당해 선수를 임의탈 퇴선수로 공시한 날로부터 1년이 경과한 날부터 복귀를 신청할 수 있다. 

─ KBO 2020 야구 규약 


반면 프로배구에서는 한 달만 지나면 임의탈퇴 선수를 다시 등록할 수 있습니다.


제15조 (임의탈퇴 선수의 등록)

① 임의탈퇴선수는 등록선수 정원에 제외된다.

② 임의탈퇴선수의 선수복귀는 공시일로부터 1개월이 경과하여야 하며, 탈퇴 당시의 소속구단으로 복귀하여야 한다.

③ 임의탈퇴 선수의 해지 공시는 상기 ②항을 제외한 모든 기간에 가능하다.

─ KOVO 선수등록규정


현대건설에서는 6월 15일 고유민과 만나 복귀 의사를 타진했다고 해명합니다.


구단에서는 임의탈퇴 공시 후 배구에 대한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6월 15일 고인과 미팅을 하며 향후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고인은 배구가 아닌 다른 길을 가겠다는 의사가 확고해 배구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이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고인은 7월 모 유튜브 채널에서 은퇴했다고 설명하며 이러한 본인의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 과정에서 현대건설 관계자가 현재 상황에 대해 고유민에게 충분히 설명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설명을 충분히 듣지 못했다면 고유민은 자신이 그저 버림받았다고 느끼면서 유튜브에 출연해 그렇게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르니까요.



유가족이 법률 대리인을 앞세웠다는 건 이 문제를 법원으로 끌고가겠다는 듯.


현대건설 역시 소송전에 대비하는 모양새입니다.


경찰에서 정식 조사 절차를 밟고 있는 가운데 객관적으로 명확한 사실 관계 확인 없이 추측만으로 일방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미 고유민이 세상을 떠난 상황이라 '객관적으로 명확한 사실 관계'를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터.


그래도 누구 하나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사실을 밝힐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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