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 야구는 흐름의 경기

흔히들 야구를 흐름의 경기라고 한다. 경기 전체의 흐름을 우리 쪽으로 끌고 오느냐 상대에게 넘겨주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스포츠가 바로 야구라는 뜻이다. 그런데 결국 야구 경기의 목적은 승리를 거머쥐는 일이다. 따라서 플레이 하나 하나가 팀의 승리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는지를 해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흐름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흐름을 보여주는 값이 바로 WP(Win Probability)다. WP는 낱말 뜻 그대로 '기대 승률'이라는 의미. 진행중인 이닝과 아웃카운트 그리고 점수차, 주자 상황 등을 토대로 현재 시점에서 승리를 거둘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주는 값이다. 예를 들어 경기가 시작하기 전 양 팀의 기대 승률은 모두 .500이다. 두 팀 모두 경기를 가져갈 확률이 반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나면 한 팀의 승률은 1이 되고 다른 팀은 0이 된다.

이런 확률값을 어떻게 구할 수 있었을까? 이 분야를 처음으로 연구한 사람은 미국의 세이버메트리션 크리스토퍼 쉐이(Christopher Shea)였다. 그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벌어진 모든 메이저리그 경기를 토대로 위에서 언급한 상황이 실제 승리로 연결될 확률을 알아냈다. 이를테면 이렇다. 위의 기간 동안 벌어진 32,767 경기에서 홈 팀이 승리를 거둔 경기는 모두 16,922번이었다. 승률로 따지자면 .516이 된다. 따라서 경기가 시작할 때 홈팀의 WP값은 .516이다.

여기서 착안한 많은 세이버메트리션들은 이 도구를 더더욱 세밀하게 연구했다. 그 결과 이제 WP는 특정한 시대나 리그가 아닌 일반적인 야구 경기에도 모두 적용할 수 있는 도구로 발전했다. 오늘 날에는 득점 상황, 즉 구장 차이라든지 리그의 투고타저 경향 등에 따라서 얼마든 경기 중에도 WP 값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아주 간단한 아이디어 하나가 도입됐다. 이런 WP 값을 그래프로 그려보자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말하자면,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벌어지는 각 이벤트별 WP값을 구하고 이 값을 그래프로 그리면 야구 경기의 흐름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WP와 함께 요긴하게 쓰이는 두고는 바로 LI다. LI는 Leverage Index의 약자로 각 상황이 경기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값이다. 똑같은 동점 상황이라고 해도 1회초와 9회말 2아웃 주자만루가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LI는 이런 차이를 보임으로써 각 이벤트가 경기에서 어느 정도 임팩트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LI는 당시 상황에서 홈런과 삼진이 유발할 WP 차이의 평균을 뜻한다.


▶ '06 준플레이오프 1차전 ; 한화 3 對 KIA 2

여기까지 알아 봤으니, 한번 한화와 KIA의 준플레이오프 3 경기를 WP 그래프를 통해 보면서 실제로 이 그래프가 어느 정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 알아보도록 해보자. 먼저 8일 대전에서 벌어진 1차전의 WP 그래프를 승리 팀 한화 관점에서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선취점은 장성호의 방망이에서 비롯됐고 이재주도 이에 뒤질 새라 홈런을 터뜨렸다. WP .500에서 시작됐던 경기는 이 홈런 두 방으로 KIA 쪽으로 다소 기울었고, 한화의 WP는 .355로 내려갔다. 달리 말해 대전 구장에서 1회초에 원정팀에게 먼저 두 점을 내준다면 홈팀이 승리할 확률은 35.5%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4회 고동진이 때린 타구가 펜스와 철망 사이에 끼면서 고동진은 3루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데이비스가 희생 플라이를 때려내며 한화는 KIA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화의 WP는 .384로 올라갔다. 그리고 연이어 5회에 곧바로 이범호의 동점 홈런이 터지며 WP값은 .569까지 올랐다. 이날 경기에서 처음으로 한화의 WP가 .500, 즉 50%를 넘는 순간이었다.

이후 경기는 팽팽하게 흘러갔다. 그러다 사건은 7회에 터졌다. 이범호와 한상훈이 연속해서 안타를 기록하며 한화의 WP가 .722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하지만 KIA 중견수 이종범의 빠른 판단으로 이범호가 2루에서 아웃 처리 되며 다시 한화의 WP는 .592로 급락했다. 결국 공식 기록은 중견수앞 땅볼. LI 2.90의 중요한 상황에서 나온 아쉬운 플레이였다.

하지만 기회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9회말이 시작되기 전 한화의 WP는 .650, 김태균이 안타를 때려내자 이 수치는 .721까지 올라갔다. 분명 한화에게 유리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사건이 터졌다. KIA 투수 한기주가 사인 미스로 보크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김태균은 걸어서 2루로 향했고, 한화의 WP 역시 .822로 올랐다. 안타를 맞았을 때도 .071밖에 오르지 않았던 WP가 .100이나 오른 것이다.

WP는 .500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100은 전체 승패의 20%에 해당하는 엄청난 영향력이다. LI 또한 2.83에서 4.23으로 급상승했다. 김수연의 희생번트가 성공하고 이범호가 타석에 들어서자 LI는 7.64까지 수직으로 올라갔다. 일반적으로 5.00이 넘으면 경기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여기서 KIA 코칭스탭은 만루 작전을 내렸고 한화의 WP는 .839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터진 클리어의 끝내기 희생플라이 경기가 끝나며 한화의 WP는 1.000이 됐다. 클리어가 때려낸 타구의 WP값이 .161의 엄청난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 '06 준플레이오프 2차전 ; KIA 6 對 한화 1

하지만 이 정도 변화는 2차전에서 이현곤이 때려낸 만루홈런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마찬가지로 10일 광주에서 열린 2차전을 승리팀 KIA 관점에서 그린 그래프다. 과연 이현곤의 홈런이 가진 위력은 어느 정도나 됐을까?


한 눈에 보기에도 KIA의 WP값이 얼마나 수직상승했는지 알 수 있다. 팽팽하던 경기가 단 한 순간에 KIA 쪽으로 완전히 급격하게 기울었다. 깁원섭이 볼넷으로 걸어 나갈 때 KIA의 WP는 .603이었다. 물론 여전히 높은 수치였다. 하지만 이현곤이 홈런을 터뜨린 시점에서 이 기록은 무려 .936으로 상승한다. WP .334가 변한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따지자면 전체 승부의 66.8%가 이 홈런 한방으로 결정됐다는 얘기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이후 LI값이 급격하게 감소한다는 것이다. 이현곤의 타석 때 LI값은 3.80이나 됐지만 이후에는 0.5를 넘은 것이라고는 7회초 한화의 첫 타자 한상훈의 타석 때(0.66)뿐이다. 물론 한화 타자들이 결국 추격에 실패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확실히 그만큼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큰 사건이 터졌다는 사실이 LI를 통해서도 증명이 되는 셈이다.


▶ '06 준플레이오프 3차전 ; 한화 6 對 KIA 4

그럼 3차전에서 공수 양면에 걸쳐 120%의 활약을 펼쳐준 이범호는 어느 정도의 WP값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범호가 팀 승리에 기여한 비율은 어느 정도나 됐는지 알아보자는 얘기다. 방법은 단순하다. 한 선수가 경기 동안 기록한 WP값의 누적치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알아보면 된다. 이를 흔히 WPA(WP Added)라 부른다. 그래프부터 보고 계속해 보도록 하자.


김민재의 선제 솔로 홈런(WP .663)이후 KIA 선발 이상화는 곧바로 조원우에게 대형 파울 홈런을 허용하는 등 핀치에 몰려 있었다. 결국 조원우를 땅볼로 잡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고동진이 때린 타구는 바운드가 컸고 KIA 2루수 김종국이 공을 한번 더듬는 사이 1루 안착에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진루타가 된 데이비스의 타구로 2사 주자 2루. 다시 김태균이 볼넷으로 걸어 나가며 한화는 2사 후이기는 했지만 1, 2루의 좋은 찬스(WP .655)를 맞이했다.

여기서 이범호의 석 점 홈런이 터졌다. WP 역시 .867까지 .212나 상승했다. KIA는 곧바로 조경환의 홈런으로 1점을 따라 왔지만 이 홈런도 겨우 .058의 WP 변화밖에는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넉 점과 석 점의 리드 차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탱고 타이거(Tango Tiger)로 알려진 미국의 세이버메트리션은 WP 그래프를 두고 '야구를 보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게 만든 도구'라고 평했다.

이후 KIA에 찾아온 첫 번째 찬스는 장성호의 볼넷 때 최영필이 폭투를 저지른 것이다. 3루 주자 김종국이 홈으로 쇄도하며 2점째를 올렸고 한화의 WP는 .744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무리하게 홈으로 뛰어 들던 이종범이 아웃 되며 다시 WP는 .803이 됐다. 흥미로운 건 김종국의 득점으로 얻어낸 WP 변화가 +0.053인데 비해, 이종범이 죽은 건 -0.058이라는 점이다. 얻는 것보다 잃은 게 많은 상황이었다는 뜻이다. 더욱이 이날 경기에서 나온 가장 높은 LI값인 2.17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KIA 팬들에게는 더더욱 아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면 이종범이 아니다. 다시 2사 후에 그의 앞에 찬스가 다가왔고 우중간을 가르는 2타점 2루타를 터뜨리며 다시 경기를 한 점 차로 좁혔다. 한화는 5회에 터진 이범호의 홈런으로 이미 5점을 올린 뒤였다. 한화의 WP는 .160이 떨어진 .718이 됐지만 장성호가 범타로 물러나며 다시 .781로 올라갔다. 이후 점수는 한점 차이로 팽팽한 듯 보였지만 이미 구대성이 마운드에 올라 있는 상황에서 KIA가 경기를 뒤집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WP 그래프가 이를 증명한다.

그럼 다시 WPA 이야기를 해보자. 이범호는 홈런 두 방으로 각각 .212와 .077의 WP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아웃을 기록한 타석에서는 (-)값의 WP 변화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이범호는 공격에서 모두 .229의 WPA를 기록했다. 수비에서도 .039를 보탰다. 따라서 3차전에서 이범호가 기록한 최종 WPA는 .268이 된다. 물론 이 날 경기의 그 어떤 선수보다도 높은 기록이다. 확실히 이범호에게 MVP 자격이 충분했음이 WPA를 통해서도 증명이 되는 것이다.


▶ WP와 MVP, 야구와 드라마


이는 1, 2차전에서도 마찬가지다. 1차전에서 가장 높은 WPA를 기록한 선수는 한화의 김태균(.287)이었고, 2차전에서는 KIA의 이현곤(.261)이었다. 하지만 준플레이오프 전체를 놓고 볼 때 고동진(.278)의 기록이 사실 1위는 아니다. 김태균(.370), 이범호(.341), 구대성(.289) 등의 선수들이 기록이 더 뛰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타격감과 멋진 수비, 그리고 부상에도 아랑곳 않는 그의 열정은 확실히 MVP감이었다. 아마 동료 선수들이나 야구 팬들 역시 이점에 동의할 것이다.

위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WP 그래프는 경기를 즐기는 새로운 한 방식으로 각광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세이버메트릭스 도구들처럼 이 자체가 완벽한 진리는 아니다. 그저 경기의 전체적인 진행 양상을 파악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한 수단일 따름이다. 게다가 이종범의 기가 막힌 주루 플레이가 주는 감동 역시 WP 그래프는 보여주지 못한다. 그것이 숫자는 언제까지나 야구가 선사하는 서스펜스와 드라마를 보조하는 역할에 만족해야 하는 까닭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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