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스포츠가 공용어입니다.


❝스포츠에서 유일한 것이 승리라면 이기는 그 순간 다시 경합을 벌여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과 로저 클레멘스가 나이 마흔에 계속 경쟁을 벌였던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中에서

홋토못토 필드 고베로 출근(?) 중인 이치로! 아사히(朝日)신문 제공


이치로!(46)가 19년 만에 고베(神戶) 종합 운동공원 야구장에서 9이닝 야구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이 야구장은 이치로!가 일본 프로야구 시절(1992~2000년) 몸 담았던 오릭스가 안방으로 썼던 천연잔디 구장. 이제는 도시락 업체 홋토못토(ほっともっと)와 네이밍 계약을 맺어 '홋토못토 필드 고베'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12월 첫 날 반바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이 구장에 들어선 이치로!는 취재진에게 인사를 건넨 뒤 곧 야구 유니폼으로 갈아 입었습니다. 오릭스 OB전이라도 여는 걸까요?


그런데 이치로!가 입은 유니폼 가슴에는 'ORIX' 네 글자가 아니라 'CHIBEN'이라고 여섯 글자가 써 있었습니다.


지벤 유니폼을 입고 타석에 들어선 이치로! 아사히신문 유튜브 캡처


CHIBEN 그러니까 지벤(智辧)나라(奈良)·와카야마(和歌山)현에서 초·중·고 8곳을 운영하는 사립학교 법인 이름입니다. 이 학교 법인은 해마다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오기 때문에 국내 언론에도 이따금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치로!만 지벤 유니폼을 입은 게 아닙니다. 이날 이 구장에서 맞대결을 두 팀 모두 지벤이었습니다. 선공에 나선 팀은 와카야마 지벤으로 이 학원 교직원이 꾸린 팀이고, 후공을 맡은 고베 지벤은 이치로!가 지인들과 함께 만든 쿠사야큐(草野球·동네야구)팀입니다.


이치로!가 이 사학 법인과 인연을 맺은 건 지난해 11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이치로!는 일본에서 개인 훈련 중이었는데 우연히 와카야마 학원이 추계(秋季) 킨키(近畿) 지구 대회를 치르는 걸 지켜보게 됐습니다. 


이 학교 야구부는 아카시상고(明石商高)에 0-12 콜드게임으로 패했지만 브라스밴드를 비롯한 이 학교 학생 수백 명은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나올 때까지 응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선발고등학교야구대회(봄 고시엔) 당시 와카야마 응원단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 말로 이치로!를 이치로!로 만든 원동력. 이날 이후 이치로!는 이 학교 팬을 자처했고 그 뒤로 1년 넘게 계속 교류를 이어왔습니다.


유니폼 앞에 쓴 글자만 달랐던 게 아닙니다. 이날 이치로!는 익숙한 등번호 51번 대신 1번을 달고 그라운드를 밟았습니다. 일본 야구에서 1번은 '에이스'에게만 허락하는 번호. 이치로!는 이날 투수로 마운드에 섰습니다.


등번호 1번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서 공을 뿌리는 이치로! 아사히신문 제공


그리고 마운드 위에서 정말 끝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치로!는 연식구로 경기를 치른 이날 총 131구를 던지면서 16탈삼진 무실점 투구를 선보였습니다.


와카야마 지벤 지명타자로 출전한 후지타 기요시(藤田淸司·65) 이사장은 "시속 130㎞는 나온 것 같다. 내가 칠 수 없는 공이 없다"면서 "살살 공을 던지면 실례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정면 대결을 벌였다. 과연 이치로!답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퍼펙트 투구였던 건 아닙니다. 안타를 6개 맞았고 투구 준비 과정에서 공을 떨어뜨려 보크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투수' 이치로!를 상대로 안타를 뽑아냈다면 이유야 어찌됐든 가문의 영광이 됐겠죠? 


이치로!는 경기 후 "왼쪽 종아리가 조금 불편했지만 어깨와 팔꿈치는 괜찮았다. 아직 안 죽었다"면서 "아주 재미있었다. 내년에도 또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트레이드마크 타격 준비 자세를 선보이는 이치로! 아사히신문 제공


이치로!는 이날 타자로는 5타석 4타수 3안타 1볼넷을 남겼습니다. 올든 팬들에게는 애석하게도 이치로!의 몸은 이미 오릭스 시절 선보였던 '시계추 타법' 대신 오른발 움직임을 줄인 메이저리그식 타격 자세에 익숙한 상태였습니다. 


이치로!는 2회말 첫 타석에서 볼넷을 얻어낸 뒤 4회에는 타구가 1루를 타고 넘어가는 사이 3루에 안착했습니다. 5회에는 포수 땅볼로 물러났지만 7회 2루수 앞 내야 안타를 기록했고 8회에는 정확한 타이밍에 우전안타를 기록했습니다.


이치로!는 경기 후 "느린 공을 치는 건 역시 어렵다"면서도 "야구는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 아주 재미있는 동네야구 데뷔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후지타 이사장에 따르면 이치로!컵 동네야구 전국 대회를 만드는 걸 꿈꾸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이날 경기는 고베 지벤이 16-0으로 승리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3루쪽 스탠드를 가득 채운 지벤 학원 응원단은 마지막 아웃트가 나올 때까지 응원을 계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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